탐라국 국도(國都)와 삼성혈
[연재] 이양재의 ‘문화 제주, 문화 Korea’를 위하여(4)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고도(故都), 평양이나 개성, 서울이나 경주, 부여 만 고도가 아니다. 제주시도 탐라국(耽羅國)의 고도이다. 권람(權擥, 1416~1465)의 『응제시주(應製詩註)』라든가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이 1778년에 지은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에서도 탐라국의 고도로 제주가 언급되고 있다.
1907년 4월 1일 자로 발행된 『서우』 제5호를 보면 “良乙那는 第一都에 居고 高乙那는 第二都에 居고 夫乙那는 第三都에 居하야 三神人이 三都를 分占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제주의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을 양고부(良高夫) 삼성(三姓) 씨족이 각기 나누어 도읍을 하고 살았다는 의미인 것 같다.
삼성혈(三姓穴)에서 함께 용출한 삼성인(三姓人)의 성은 양씨(良氏) 고씨(高氏) 부씨(夫氏)로 각기 다르나, 이름은 모두 을나(乙那)로 같다. 여기에 무슨 비밀이 있을까? ‘을나’란 순수한 우리 말을 이두(吏讀)로 ‘을나’라 표기한 것일까? 혹 ‘을나’란 경상도 평안도 함경도의 사투리에서 보이는 “얼라(어린아이)”와 같은 의미는 아닐까? 아니면 ‘을나’란 신분이나 직위를 말하는 제주의 고대 사투리인가?
일설에는 ‘을라’란 북방민족 언어로 ‘대족장’ 또는 ‘왕’이라는 뜻 이리고도 한다. 그렇다. 삼성인은 모두 탐라의 세 씨족국가의 왕이자 대족장이었고,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이 합한 지역 그 자체가 초기의 탐라국이자 도읍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세 씨족국가 연합한 부족국가라면 탐라에 왕궁은 있을 수 없었다고 추정된다.
제주에도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있다. 그리고 고조선시대와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고인돌 유적이 있고, 고인돌에서 비파형 단검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학계에서는 탐라국의 시작을 철기시대로 본다. 그런데 남측의 학계에서는 북측에서와는 달리 기원전 3~2세기에 철제 농기구와 무기가 제작되는 등 철기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기원전 3~2세기라면 고조선이 망하고 북부여가 건국되던 시기이고, 단재 신채호의 의견대로 고구려 건국 연대를 2세기 더 올려 잡는다면 고구려가 건국되던 전후의 시기이다. 제주의 양고부 삼성은 후기 고조선의 대족장으로 후기 고조선이 망하자 남하하여 온 부여계(夫餘系) 기마민족의 무사들로 보인다.
제주도는 섬이다. 한라산 정상에 올라가 보면 제주는 타원형 알(卵)의 모습이다. 따라서 삼성인이 삼성혈에서 나왔다는 것은 북부여계의 난생설화(卵生說話)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삼성혈의 원만한 모습은 새의 둥지와 같은 아늑함과 포근함을 감성적으로 느끼게 한다.
제주의 삼성혈은 고이 보존하여야 할 성역(聖域)이다. 그리고 옛 탐라국이라 할 수 있는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 지역은 이제는 많이 늦었지만, 더 이상 난개발은 억제하고, 특히 삼성혈과 산지천 부근의 구도심만이라도 고도(故都)로서의 품위를 갖추어 나가야 한다.
필자는 삼성혈 담벽에 붙은 모든 부동산을 제주도가 매입하고 헐어내어 보석보다 소중한 삼성혈을 성역화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대한항공이 소유하고 있는 삼성혈 북쪽의 칼호텔은 절대로 오피스텔이나 아파트로의 재건축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삼성혈은 제주인들의 정신적인 요람이고, 탐라국의 중심부이므로 그에 걸맞은 성역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45년 전 삼성혈 북측 길 건너편에 호텔을 짓도록 특혜를 준 박정희 정권의 잘못을 목도하고 있다. 만약 칼호텔을 제주도가 매입한다면, 그 장소는 삼성혈과 어울리는 제주도의 문화예술공간으로 바꾸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