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사경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16)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14) 돈황사경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필자가 돈황사경(敦煌寫經)을 처음 본 것은 1980년대 후반에 일본 간다의 진보초에 있는 고서점 옥영당으로 기억한다. 이후 1993년 11월 29일, 오전 10시 15분 뉴욕 소더비에서 개최한 ‘중국회화경매’에 lot 1.으로 출품된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권제8, 1책을 낙찰받았고, 1996년에는 해외의 다른 경매에서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을 낙찰받았다,
이 두 책을 고찰한 논문을 1997년에 한국고서협회 회지 『고서』 제4호에 「돈황석실장본 <금광명최승왕경>과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에 대한 일고찰(一考察)」이라는 제호로 발표하였는데, 이 글은 우리나라에서는 돈황사경을 다룬 첫 번째 논문이다.
필자는 계속하여 『대반야바라밀다경』 권제358, 『정명경관중소』 권상, 『금광명경』 권제4, 서명 미상의 『당나라 시대의 사경 뒷 면에 월력이 기록된 고문서』 1점 등 4종을 더 입수하였다.
이들 자료 가운데 『금광명최승왕경』 권제8 등을 국립중앙박물관에 납품을 시도하였으나 거절되었고,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은 어느 승려가 매입하였으나,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반품되었으며, 『대반야바라밀다경』 권제358은 모씨에게 횡령당했으나, 결국에는 내가 다시 매입한 바 있다.
이후 6점 모두를 중국가덕박매유한공사와 북경보리박매유한공사의 고적선본박매에 출품하여 모두 최고에 매도하였다.
2013년에 『금광명경』 권제4를 출품하면서 앞부분 1장을 분리하였는데, 현재 필자에게는 그 1장과 2019년 3월에 일본의 어느 경매에서 낙찰받은 『심경(心經)』 1장 만이 남아 있다. 필자를 거쳐 나간 이들 사경 가운데 우리 민족의 역사와 관련되는 것은 『금광명최승왕경』 권제8과 『당나라 시대의 사경 뒷 면에 월력이 기록된 고문서』 1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금광명최승왕경』 권제8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등을 중점으로 다루며 우리 민족 승려들의 활발한 대외 활동을 언급하고자 한다.
가. 돈황과 돈황사경
돈황(敦煌)은 동서의 교역을 잇는 실크로드(Silkroad)의 중심점이다. 돈황은 당나라 때까지 서역과의 교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던 오아시스 도시였다. 당시 번영의 산물 가운데 하나가 세계 최대의 석굴사원 막고굴(莫古窟)이다. 16세기 대항해시대 해상교통이 발달하면서 실크로드가 문명의 교역 창구로서 역할이 약화되고 둔황의 석굴사원도 점차 퇴색되었다.
막고굴은 돈황 시가지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명사산 기슭에 있다. 산 비탈의 암벽에 1000여 개의 석굴이 뚫려 있어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한다. 막고굴은 1000여 년 동안 수많은 승려와 화가‧석공‧도공들이 드나들며 축적한 종교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1000여 개의 석굴사원 가운데 발굴된 것은 500여 개인데 용도에 따라 예배굴과 참선굴로 구분한다. 예배굴은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졌고, 승려가 거처하면서 참선하는 참선굴은 감실과 측실이 딸려 있다.
어떤 석굴이든 벽면은 모두 건식 프레스코 화법으로 화려하게 채색한 석가 일대기나 극락과 해탈을 열망하는 내용의 벽화로 덮여 있으며, 채색된 조각상이 놓여 있다. 벽화를 한 줄로 전시 한다면 그길이가 54Km에 달한다고 한다. 총 2400여 체(體)가 발견된 채색 조각상은 불상‧보살상‧제자상 등으로 짙은 색채가 특징이다.
돈황 석굴사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돈황 문헌’이다. ‘돈황 문헌’은 1900년경에 제17호 석굴(藏經洞)의 밀봉된 석실에서 도교(道敎)의 도사(道士) 왕원록(王圓錄, 1851~1931)에 의하여 발견되어 외부에 알려진 후, 1905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오브루체프(Vladimir A. Obruchev, 1863~1956)가 왕원록에게 승려의복용 직물, 향, 등잔용 기름, 구리 주발 등이 든 6꾸러미를 주고 고문서 2상자를 가져간 것이 시작이다.
이후, 1907년 영국의 스테인(M. A. Stein, 1862~1943)이 왕원록에게 소액의 기부금을 주고 약1만 점을 유출하여 영국박물관에 가져갔고, 1908년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가 다시 5천 점의 유물을 프랑스로 가져갔다. 펠리오가 유출한 고문헌 중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필사본도 들어 있었다. 나머지는 청나라 정부가 북경으로 옮겨가서 현재 중국에는 6000점 정도가 남아 있다. 뒤이어 일본의 오타니(大谷光瑞, 1876~1948) 탐험대가 흩어져 있던 약 600점의 문서와 불상을 유출해갔고, 미국의 랭덤 워너(langdon Warner, 1881~1955)는 불상과 벽화를 뜯어갔다.
돈황에서 출토한 이 자료에서 경전‧문서 등이 3만여 점 이상이 있는데, 여기서 출토한 경전 가운데는 불가서가 대종을 이루지만, 유가서라든가 도가서, 심지어는 기독교서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 내용이 방대하여 이를 연구하는 ‘돈황학’이 형성되었다. 신라시대의 고승 혜초(慧超, 704~787)가 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도 돈황에서 발견되어 펠리오에 의하여 프랑스로 옮겨져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돈황에서 출토된 고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인 353년의 필사본이고, 가장 늦은 시기에 작성된 것은 북송(北宋) 때인 1030년에 작성된 필사본이다. 이를 보면 돈황에 고문헌을 수집하여 밀봉한 것은 11세기 중반으로. 이후 1900년경까지 850여년간 장경동 석실(石室)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 고승전
우리 민족 승려들의 활발한 대외 활동을 살펴보고자 하면, 우리나라의 고승전(高僧傳)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고승전도 참고하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고승전으로는 1215년(고종 2)에 고려의 승려 각훈(覺訓)이 지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2권1책이 있다. 그러나 이 현존본은 원저(原著)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현존 책1은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와 그 수용에 대한 기록과 구법승(求法僧)에 관한 전기이다. 구법승전 가운데 각덕(覺德)에서 안함(安含)까지는 중국에서 구법한 승려들의 기록이고,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에서 마지막 현태(玄太)에 이르기까지는 인도로 구법의 길을 떠났던 승려들의 기록이다.
2권에 수록되어 있는 고승은 정전(正傳)에 18명, 방전(傍傳)에 17명 등 모두 35명이다. 즉, 순도‧망명(亡名)‧의연(義淵)‧담시(曇始)‧마라난타(摩羅難陀)‧아도(阿道)‧법공(法空)‧법운(法雲)‧각덕‧지명(智明)‧원광(圓光)‧아리야발마‧혜업(慧業)‧혜륜(慧輪)‧현각(玄恪)‧현유(玄遊)‧현태 등의 정전과, 묵호자(墨胡子)‧원표(元表)‧현창(玄彰)‧명관(明觀)‧원안(圓安)‧담화(曇和) 및 인도 승려 2인, 한나라 승려 3인, 현조(玄照), 망명(亡名) 2인, 승철(僧哲) 등의 방전이 있다.
이 책에서는 참고하고 인용한 문헌과 전거(典據)를 일일이 밝혔다. 『국사(國史)』‧『기로기(耆老記)』‧『수이전(殊異傳)』‧『화랑세기(花郎世紀)』 등 우리나라 문헌, 『송고승전(宋高僧傳)』‧『속고승전(續高僧傳)』‧『신라국기(新羅國記)』 등 중국 문헌, 아도비(阿道碑)‧난랑비(鸞郎碑)‧안함비명(安含碑銘) 등의 비문과 최치원(崔致遠)이 찬한 「의상전(義湘傳)」 등이다.
한편, 『삼국유사』와 『법화영험전』 등에 『해동고승전』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1637년(인조 15)에 김휴(金烋)가 지은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에도 『해동고승전』의 책명이 나타나고 있다.(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책은 한동안 실전(失傳)하다가 1910년대에 그 일부가 다시 발견되었고, 그 뒤 옮겨 베낀 부분이 일본으로 유입되어 『대일본불교전서(大日本佛敎全書)』의 「유방전총서(遊方傳叢書)」 제2(1917)와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제50권 사전부(史傳部)에 편입, 간행되었다.
현존하는 이 책 『해동고승전』은 완전한 것이 아니고 일부분이라는 아쉬움이 있으나, 이 책의 문헌적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 이 책은 중요한 불교사서(佛敎史書)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일반 전적(典籍) 중에서도 오래 전에 찬술(纂述)된 것이며, 고대불교사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이설(異說)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승전으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여야 할 고승전은 의정(義淨, 635~713)이 편한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이다. 이 고승전에 나온 고승은 61명. 이중 중국인 41명, 신라인 8명, 고구려 1명, 티베트 2명, 베트남 4명, 강거국 1명, 고창국 2명 등이 소개돼 있다. 특히 61명 가운데 신라의 스님들이 4번째부터 10번째까지 앞부분에 나오는 점도 주목된다. “이들의 천축행이 매우 이른 시기부터 시작됐음을 알려주는”것이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 2책은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에 포함되어 있다.
이외에도 중요한 중국의 고승전으로는 송대(宋代)의 승려인 찬녕(贊寧, 919∼1002)의 저술한 『송고승전(宋高僧傳)』 30권이 있다. 『송고승전』은 『양고승전(梁高僧傳)』과 『당고승전(唐高僧傳)』에 이어 당(唐)‧오대(五代)‧송초(宋初)의 고승 전기를 찬녕이 비(碑)‧사전(史傳)‧견문(見聞) 등에 의해 수록한 것으로, 정전(正傳) 533인, 부견(附見) 130인을 수록하였다.
송나라 태종(太宗)의 칙명으로 980년에 착수한 후, 8년 동안 항저우[杭州]에서 집필하여 988년 10월에 완성, 변경(汴京:현재 開封)에서 태종에게 바쳤다. 문헌의 선택에 약간의 문제는 있으나 중국의 중세 불교사 연구에는 불가결의 자료이며,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고승 전기도 여럿 수록하였다. 『송고승전』은 『고려대장경』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남송판대장경(南宋版大藏經)』 이후의 각 장경(藏經)에는 모두 수록되었다.
다. 승장과 혜초
승장(勝莊)은 중국에서 활약한 후기신라의 학승(學僧)이다.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송고승전(宋高僧傳)』 권4 「혜소전(慧沼傳)」에 ‘신라 승장법사’라 하여 신라인임을 알 수 있다. 또 「원측법사사리탑명(圓測法師舍利塔銘)」 등에 의해서 그가 대천복사(大薦福寺)의 대덕(大德)이었고 원측의 제자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703년 당나라의 의정(義淨)이 동도(東都) 복선사(福先寺)와 서경(西京) 서명사(西明寺)에서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능단금강반야경(能斷金剛般若經)』‧『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무상경(無常經)』 등과 『백일갈마(百一羯磨)』 및 『장중론(掌中論)』‧『육문교수론(六門敎授論)』 등 경률론(經律論) 20부 115권을 번역하였을 때 승장이 증의(證義)가 되었다.
또 705년 동도 내도량(內道場)에서 『공작왕경(孔雀王經)』을 번역하고 대복선사(大福先寺)에서 『승광천자경(勝光天子經)』 등을 번역하였을 때에도 증의를 맡았다. 710년 대천복사에서 『욕상공덕경(浴像功德經)』‧『유식보생론(唯識寶生論)』 등 20부 88권을 번역하였을 때에도 증의가 되었다. 보리류지(菩提流支)가 『대보적경(大寶積經)』 120권 중 26회(會) 39권을 신역(新譯)하였을 때(706∼713)에도 증의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당나라에서 매우 학덕이 높은 고승으로 평가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저서로는 『금광명최승왕경소』 8권, 『범망경보살계본술기(梵網經菩薩戒本述記)』 4권, 『성유식론결(成唯識論決)』 3권, 『잡집론소(雜集論疏)』 12권, 『불성론의(佛性論義)』 1권, 『대인명론술기(大因明論述記)』 2권, 『기신론문답(起信論問答)』 1권 등이 있다.
이 중 『범망경보살계본술기』 4권만이 현존한다. 그런데 승장이 증의로 참여한 이상의 책들 가운데 1993년 11월 29일, 필자가 뉴욕 소더비에서 낙찰받은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권제8은 책 끝에 있는 조성기(造成記)를 살펴 보면, 703년 10월 4일 의정(義淨)이 번역하고 법해(法海)가 감기(勘記)한 원본(原本)으로 확증된다. 중국의 돈황학자 강양부는 이 책을 가르켜 돈황사경 가운데 최고의 보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승장은 혜초 이전에 활동한 승려이다.
후기신라의 승려 혜초(慧超, 704~787)는 인도를 구법순례하고 중국에서 활동한 우리 민족의 승려로 가장 널리 알려지 분이다. 그는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승려이기 때문이다. 혜초는 719년(성덕왕 18) 중국의 광주(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금강지는 남인도 출신으로 제자인 불공(不空)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와서 밀교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금강지는 당시 장안(長安)‧낙양(洛陽) 등지에서 밀교를 가르쳤는데, 이 때 혜초가 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혜초가 인도구법을 결심한 것도 스승의 권유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구법여행을 떠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723년경으로 추정된다. 인도로 가는 여행도 해로였는지 육로였는지 불분명하다. 그는 만 4년 동안 인도를 여행하였고, 카슈미르(Kashmir)‧아프가니스탄‧중앙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하였다.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것은 30세 전후였다.
733년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도량을 열고 스승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이라는 밀교경전을 연구하였다. 이 때 금강지는 이 경전의 한역(漢譯)을 시작하였는데, 혜초는 필수(筆受)를 맡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 가을에 금강지가 죽었으므로 이 사업은 중단되었고, 금강지의 유언에 따라 이 경의 산스크리트 원문은 다시 인도로 보내지게 되었다.
금강지가 죽은 이후 혜초는 금강지의 제자였던 불공삼장으로부터 다시 이 경전의 강의를 받고, 774년 가을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다시 역경을 시작하였다. 이후 780년 불경을 번역하기 위하여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노년을 오대산의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보내면서, 전에 필수를 맡았던 『천비천발대교왕경』의 한역과 한자음사(漢字音寫)를 시도하여 약 20일 동안 이 한역본을 다시 채록하였다.
그는 787년에 입적하였다. 혜초의 구법여행기(求法旅行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돈황의 석실에서 발견되었다.
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1책은 발견 당시 앞 뒷부분 일부가 훼손된 상태였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총 227행에 5893자로서 세로 28.5cm, 가로 42cm 크기의 종이 아홉 장을 이어붙여 만들었으니 총 길이는 358cm이다.
서지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이 책의 서체(書體)는 돈황사경에서 흔히 볼수 있는 해서(楷書)로 쓴 사경체(寫經體)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필사체(筆寫體)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책은 돈황사경에서 흔히 보이는 황마지(黃麻紙)가 아니라 피지(皮紙)에 쓰여진 것이다. 우리 민족의 닥종이(楮紙)도 피지에 속한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1책은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aul. Pelliot,)가 중국 돈황의 천불동 석실에서 발견하였다. 이 책은 원래는 3권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존본은 그 축약본으로, 앞뒤(首尾)가 떨어져 나갔다.
현존본은 동부 인도 기행부터 기록되어 있는데, 그곳에 진기한 나체족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이어 쿠시나가라(Kushināgara)에 대한 견문으로, 이곳은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곳이며, 다비장(茶毘場)과 열반사(涅槃寺) 등이 있음을 기록하였다.
한 달 동안 다시 남쪽으로 여행하여 바라나시(Varanasi)에 이르는데, 이곳은 석가모니가 오비구(五比丘)를 위하여 최초로 설법한 곳이다. 다시 동쪽으로 여행하여 라자그리하(Rājagrha, 王舍城)에 닿아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이었던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참배하고, 『법화경 法華經』의 설법지 영축산(靈鷲山)을 방문하였다.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잡아 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룬 부다가야(Buddhagaya)를 참배하여 대각사(大覺寺)와 보리수 등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어서 서북쪽으로 길을 찾아 중천축국으로 간다. 이곳에 이른바 사대영탑(四大靈塔)이 있다고 하였으며, 각각을 방문하였고, 또 석가의 탄생지인 룸비니(Lumbini)도 방문하였다.
다음 여행지는 남천축국인데 아잔타‧엘로라 등은 방문한 흔적이 없다. 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서천축국을 거쳐 북천축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지금의 파키스탄 남부 일대와 간다라(Gandhara) 문화 중심지를 차례로 방문하였고, 그 서쪽에 있는 현재의 파키스탄 서북 일대를 답사하였다.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현재의 카슈미르(Kashmir)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소발률(小勃律) 등을 방문하였다. 이번에는 거꾸로 간다라지방을 거슬러 내려오면서 스와트(Swat)‧길기트(Gilgit)‧페샤와르(Peshawar) 등지를 방문하였고, 그 북쪽에 있는 오장국(烏長國)‧구위국(拘衛國) 등도 답사하였다.
다시 실크로드를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바미안에 이른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의 국경지대인 투카라(吐火羅)로 간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페르시아(Persia)를 지난다. 안국(安國)‧조국(曹國)‧석과국(石騍國)‧페르가나국(跋賀那國) 등은 방문하지 못한 채, 그 일대에서 수집한 이야기만을 기록하였다. 그들은 불교를 모르고 배화교(拜火敎)를 믿으며, 어머니와 자매도 아내로 맞는 등 진기한 풍속을 소개하였다. 또 바미안이나 카피스 등에서는 형제가 몇이건 공동으로 한 아내를 맞이한다고 기록하였다.
그곳에서부터 중국으로의 귀로를 잡아 동쪽으로 지금의 파미르고원에 있던 호밀국(胡蜜國)을 지나서 식야국(識匿國)을 거친 다음 총령(葱嶺)을 지나 지금의 중국 영토인 갈반단국(渴飯檀國)에 도착한다. 동쪽으로 카시카르를 지나 구주국(龜註國)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때가 727년(성덕왕 26) 11월 상순이었는데, 이후의 기록은 일실(逸失) 되었다.
이 『왕오천축국전』은 축약본이기 때문에 인도의 각 지역은 물론,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관한 서술이 매우 간략하다. 어떤 곳은 지명이나 나라 이름 등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언어‧풍속‧정치 등 일반적인 언급도 빈약한 편이다. 따라서 사료적인 가치만 따지면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나 법현(法顯)의 『불국기 佛國記』 등에 비하여 떨어진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면에서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의의를 지닌다. 첫째, 전술한 인도 여행기들은 육로기행과 해로기행인 데 비하여 이 책은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되고 있다.
둘째, 전술한 여행기는 6세기와 7세기의 인도 정세를 말해 주는 자료이지만 이 책은 8세기의 사료이다.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해서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인도제국의 제왕들이 코끼리나 병력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 아랍의 제국이 얼마만큼 인도 쪽으로 세력을 펼쳤는가 하는 점들을 시사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튀르크족이나 한족(漢族)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이 어디이며, 그 생활수준은 어떠하였는가 등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셋째, 일반적인 정치 정세 이외에 사회상태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돋보인다. 불교의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지, 또 음식‧의상‧습속‧산물‧기후 등도 각 지방마다 기록하고 있다. 중부 인도에서 어머니나 누이를 아내로 삼는다거나, 여러 형제가 아내를 공유하는 풍습이 있다는 등의 기록은 사실과 부합하므로 이 자료의 신빙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국적인 풍취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인도에는 감옥이나 사형제도가 없고, 죄를 지은 이는 벌금으로 다스린다는 기록, 카슈미르 지방에는 여자 노예가 없고, 인신매매가 없다는 등의 기록이 그것이다.
혜초는 당시로 보아 국제적인 승려였다. 신라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또 인도를 다녀왔다는 그의 행적은 무척 흥미 있는 일이다. 이 책은 1909년 중국학자 나진옥(羅振玉)에 의하여 『왕오천축국전』임이 확인되었고, 1915년 일본의 다카쿠스(高楠順次郎)에 의하여 그 저자가 신라 출신의 승려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1928년 독일학자 푹스(Fuchs,W.)에 의하여 독일어 번역이 나왔고, 1943년최남선(崔南善)이 이 원문과 해제를 붙임으로써 널리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고, 국내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실물 크기로 흑백판과 원색판(1987년)으로 당시의 문화재관리국에서 영인하였다.(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마. 중국에서 활동한 우리 승려들
중국 당나라에서 활동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승려는 여러 분이 있다. 그 가운데 각기 특색이 있는 네 분의 승려를 선정하여 아래에 소개하고자 한다.
1. 현광(玄光)
현광(玄光)은 6세기경 백제의 승려이다. 『송고승전(宋高僧傳)』 제18권에는 "진신라국현광전(陳新羅國玄光傳)"이라는 제목 하에 현광에 대한 전기가 들어 있어, 이 제목에 의거하여 현광이 진나라(陳: 557~589) 때에 활동한 신라의 승려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한국의 고대 불교 전공 학자들에 따르면 현광은 백제의 승려이다. 현광은 웅주(熊州, 현재의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으며, 중국 진나라에 가서 중국 천태종의 종조인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 지의(智顗, 538-597)의 스승이었던 남악대사(南嶽大師) 혜사(慧思, 515~577)로부터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배우고 돌아와서 웅주(熊州) 옹산(翁山)에 절을 짓고 법화를 전함으로써 한국의 법화종(法華宗)의 조사(祖師)가 된 승려이다.
2. 혜업(惠業)
혜업은 신라 선덕왕 때의 승려이다. 정관 연간(627~ 649)에 서역(西域, 인도)에 다니러 갔다. 내륙길을 택하여 낮에는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쉬고 밤에 이동했다고 한다. 중부 인도에 도착해서는 보리사에 머물면서 불교유적지를 두루 참배하였다. 이후 날란다사 진구(眞久)의 청으로 날란다사에 머물렀다. 『정명경(淨名經)』을 연구하며 일생을 보내다가 60세에 입적했다. 『섭대승론』 하권에 '불치수(佛齒樹) 아래에서 신라 승려 혜업이 필사하다'라는 기록을 의정(義淨)이 보았다고 전한다. 의정이 방문하였을 때 사찰의 승려가 ‘이곳에서 마치셨고 나이는 60여 세 가량이었습니다’고 하였다. 그가 베낀 범본(梵本)은 모두 날란다사에 있었다고 한다, 『섭대승론(攝大乘論)』의 별칭으로 대승의 가르침을 총괄한 논(論)이다. 이 논은 원광스님 이후 자장 원효에 이르기까지 분황사에서 강독된 경전인데, 혜업스님이 이 논의 범본을 베껴 신라로 가져가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인도(印度)에서 세수를 마친 것이다.
3. 의상(義湘)
후기신라의 승려 의상(義湘, 625~702)은 625년(진평왕 47년)에 경주에서 태어나, 644년(선덕여왕 13년)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650년 원효(元曉)와 함께 현장(玄奘)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신유식(新唯識)을 배우기 위해 중국의 당(唐) 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요동(遼東)에서 첩자(諜者)로 몰려 사로잡히면서 실패하고 신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661년(문무왕 원년)에 당의 사신을 따라 뱃길로 중국 유학을 떠났고, 양주(揚州)에 머무르다가 이듬해부터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중국 화엄종(華嚴宗)의 2대 조사(祖師)인 지엄(智儼, 602∼668)에게서 화엄(華嚴) 사상을 배웠다. 668년 7언(言) 30구(句) 210자(字)로 화엄사상의 핵심을 도인(圖印)으로 나타낸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저술하였다.
의상은 671년(문무왕 11년)에 신라로 돌아왔는데, 『삼국유사』에는 당 나라 군대가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알리기 위해 서둘러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귀국한 뒤에 동해의 굴에서 관음보살(觀音菩薩)를 친견(親見)하고 낙산사(洛山寺)를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당시의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이 전해진다. 676년(문무왕 16년)에는 왕명에 따라 과거 삼국(三國)의 요충지였던 죽령(竹嶺) 인근에 부석사(浮石寺)를 짓고 그 곳에서 화엄의 교리를 널리 전파하고 제자를 양성하여 ‘해동(海東) 화엄(華嚴)의 초조(初祖)’라 불리게 되었다. 의상과 그 제자들에 의해 화엄사상은 신라 사회에 널리 확산되었고, 신라 하대(下代)에는 전국 곳곳에 화엄종 사찰이 세워졌다. 그 가운데 부석사(浮石寺), 비마라사(毘摩羅寺), 해인사(海印寺), 옥천사(玉泉寺), 범어사(梵魚寺), 화엄사(華嚴寺), 보원사(普願寺), 갑사(岬寺), 국신사(國神寺), 청담사(靑潭寺) 등을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고 한다.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범어사, 갑사 등은 오늘날에도 대찰(大刹)로 이름이 높다. 또한 의상의 제자인 표훈(表訓)에게 화엄사상을 배운 김대성(金大城)이 화엄의 세계를 형상화하기 위해 세운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남아 있다. 의상은 702년(효소왕 11년)에 78세의 나이로 입적(入寂)하였으며, 고려 숙종에게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4. 무상(無相)
무상(無相, 680~756)은 중국 당나라 선종(禪宗)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신라 고승이다. 『송고승전』에서는 신라 국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하였으나, 왕의 이름은 전하지 않고 있다. 728년에 당나라로 들어간 후 당 현종(玄宗)의 배려로 선정사(禪定寺)에 주석하면서 선종을 따랐다. 현종을 따라 촉(蜀, 현 사천(四川))에 가서는 지선(智善)을 사사하고 내전(內殿)에서 현종을 알현하였다. 그리고 정중사(淨衆寺)에 안주하면서 촉의 교화에 진력하였다. 입적 후에 세운 동해대사탑(東海大師塔)이 말해주듯 무상은 중국 선종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바. 불교사를 부정하는 황당사관론자
고구려나 백제, 신라의 승려와 미술가는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였다. 고구려의 담징(曇徵, 579~631)이나 가서일(加西溢), 백제의 인사라아(因斯羅我) 처럼 일본에 갔던 경우도 있고 백제의 현광이나 후기신라의 의상처럼 중국으로 간 승려도 있으며, 심지어 신라의 혜업이나 후기신라의 혜초처럼 인도까지 여행했던 승려도 있다.
문제는 이른바 『환단고기』를 철저히 숭배하는 자칭 민족사관론자 일부가 지나칠 정도로 황당사관 경쟁을 하고 있다. 삼국은 물론 고려와 조선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하였다는 주장까지 나옴으로써, 그들은 우리 역사상의 대표적인 여러 고승(高僧)의 실체를 뭉개는 결과를 유발하고 있다. 즉 『환단고기』는 우리나라의 불교사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환단고기』는 사서가 아니라 20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유사(類似) 종교 태백교의 유사 경전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타종교와 병립(竝立)이 불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