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교착상태란 없다

[간서치의 둔한 서평(164)] 안병진의 『예정된 위기』

2021-05-30     간서치

그런 줄 알았다. 세상 모든 것은 피아의 구분이 분명하고, 즉 절대선과 절대악이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때문에 메마른 성정이 더욱 거칠어졌고, 나의 생각과 다른 이들을 만날 때면 위화감이 나도 모르게 드러나곤 했다. 형편없이 굴었다.

이는 독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판단하기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떠든다고 생각되는 책은 가혹하리만큼 비판했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쓰레기라 비난하기도 했다.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악으로 본 것이다. 정말 형편없이 굴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뭐 그저 자연적으로,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니, 그걸 크게 자랑하거나 유세를 떨 일은 아니다. 그나마 그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에서 내 인식의 폭이나 사고의 다양성도 함께 성숙하기를 바랄 뿐이다. 오히려 더 꼰대가 되어버리면 그 꼴을 어찌 본단 말이냐. 이미 그런 이들을 너무 많이 봐 왔기에 두려울 뿐이다.

그렇게 한가득 겁을 집어먹고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러다 아주 가끔 다행이라고 느끼는 순간을 만난다. 최근 그런 순간을 경험했다. 어느 순간 다른 이의 책에 대한 나의 평가가 훨씬 유해졌다는 사실을 느낀 것이다. 어린 시절이었으면 당장 집어던지며, “저걸 책이라고 낸 작자와 또 책으로 펴낸 출판사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인간들이냐!”기함을 토했을 법한 경우에도, “음,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이 행성에는 존재하는군.”하고 넘어간다. 더 관용적으로 바뀐 것일까, 아님 이 세상에 대한 기대가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것일까. 뭐, 암튼 마음은 한결 더 편해졌다.

따지고 보면 방향 설정이 애초에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일단 아직까지 난 남북관계나 국제외교 분야에 있어 누군가의 연구나 저작을 마구 ‘깔’만한 내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한 인간의 주장이나 이론에 대해 동의 혹은 반대할 수는 있지만, 이른바 논리적으로 제대로 반박하려 마음을 먹으면 살짝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당연하다. 내가 아직 그 정도로 지혜로운 녀석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연구자 혹은 학자, 전문가라면 끊임없이 이론을 발표하고 논문을 쓰고, 이 세상을 단 1센티미터라도 나아질 수 있도록, 지식인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 한다. 만약 그의 이론이나 논문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라면, 이내 다른 이들로부터의 공격과 반박을 불러올 것이다. 그럼 다시 저자의 반박이 이어지고, 그러면서 조금씩 그 이론은 발전할 것이다. 만약 크나큰 오류를 가진 것이었다면 이내 사라질 것이고.

물론 사라진다고 해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논쟁의 그 과정을 이끌어낸 계기가 되었으니, 궁극적으로는 학계나 나아가 이 세상에 조금이나마 기여한 것이다. 단, 반인륜적이나 다분히 상업적 목적을 가진 것들은 제외해야 하겠지만.

오히려 비난받아야 하고, 궁극적으로 퇴출되어야 할 이들은 따로 있다. 전문가라는, 또 연구자, 학자, 교수라는 모자를 눌러 쓰고 그에 따른 특권은 마음껏 누리면서, 정작 본연의 역할인 연구활동은 나 몰라라 하는 족속들이다. 그러면서 다른 이들의 연구나 이론에 대한 ‘모두까기’만 한다. 방송에 단골로 출연한다고 해서 모두 전문가가 아닌 이유다. 진정한 전문가들은 그 시간에 연구하고 공부하느라 바쁘다.

학위 논문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연구 성과 하나 없는 이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다. 그러면서 방송에는 남북관계, 국제문제 전문가라고 소개된다.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모습들이다. 더 우스운 것은 자기 전공 분야가 아닌 온갖 수많은 분야에도 죄다 한마디씩 던지는 그 호연지기다. 이미 종편을 보면 변호사들이 이 나라의 모든 분야에 대해 떠들어댄다. 이러니 개그 프로그램들이 다 없어지지.

아무리 내가 보기에 개소리라 하더라도 자신의 진심을 담아, 나름의 피땀흘린 연구의 결과로 세상에 내놓는 것이라면, 일단 들어볼 가치는 있다. 판단은 그 이후에 해도 된다. 너무나 큰 오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역시 내 진심을 다해 논리적으로 반박해야 한다. 그래야 고정관념이라는 것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보다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남북관계와 북한문제, 국제문제 역시 다르지 않다. 고정불변의 가치란 애초 존재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당연히 없다. 미국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북한은 영원히 핵을 포기할 수 없다, 북미관계는 영원히 풀 수 없다는 등의 이야기들을 자신 있게 내뱉는 이들은, 자신의 오만함과 나태함을 친절하게 만방에 알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오바마 정부 시기 쿠바와의 수교, 이란 핵 협상 타결 등은 기존의 미국-쿠바 관계의 역사나, 미국-이란 관계만 놓고 보면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즉, 기존의 고정관념에만 빠져 있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럼 한반도 문제, 남북문제, 북미관계는 어떻게 봐야 할까. 2018년 판문점과 싱가포르는 어떻게 봐야 할까? 어쩌다 벌어진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었을 뿐일까? 다시는 오지 않을 꿈같은 과거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안병진, 『예정된 위기』, 모던아카이브, 2018. 12. [자료사진 - 통일뉴스]

『예정된 위기』는 1962년 10월, 자칫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의 전후 과정을 통해 현 한반도 문제를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당시 미국과 소련, 쿠바가 얼마나 상대의 생각을 제대로 읽지 못했는지,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위기를 평화적으로 풀 수 있었는지를 무척 흥미롭게 풀어낸다. 그리고 이제 미국과 새로운 관계 설정에 나서고 있는 북한이 과연 어떻게 미래를 만들어갈 것인지 전망한다.

책이 나온 시점이 2018년 12월이다. 때문에 현재의 상황에서 보자면 저자의 전망은 다소 긍정적인 방향으로 치우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2018년 이전과 지금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상황임은 인정해야 한다. 바이든 정부 역시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북한과의 핵 협상이나 관계설정에 대한 새로운 의지를 밝혔다. 아직 북한이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곧 대화에 나서리라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 이끌어낼 수 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체념이나 무의미한 분노, 반대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저자의 표현처럼 “미국인에게 북한은 아직 화성과도 같은, 태평양 건너편의 수수께끼 같은 나라”다. 아울러 “냉전이 끝난 뒤, 미국-쿠바 관계는 단순하지만, 한반도는 강대국 간의 훨씬 복잡한 고차방정식이 전개되는 공간”이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북미 관계를 “영원한 상호교착 의도”로만 생각하지 말고, 현실을 바꿔낼 수 있는 동력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한다.

저자는 아무리 트럼프가 역대급 ‘미치광이 전술’의 대가였다고 해도, 적어도 기존 민주당계 외교안보 인사들이 가진 ‘편견과 관성, 기득권’과는 거리를 두었다고 평가한다. 때문에 두 차례의 북미정상회담이 가능했고, 싱가포르 선언이 도출될 수 있었다.

다행히 바이든 정부는 기존 트럼프의 성과를 완전히 무로 돌릴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승계하지도 않겠지만, 전면 폐기하지도 않겠다는 절충적 입장이다. 우리는 그 절충의 공간을 넓히고 그 안에서 새로운 북미 프로세스를 만들어내는 신공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언제는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고, 중요한 시기가 아닌 적이 있었을까. 세계인이 감탄하는 한국인들의 상상 초월의 대담함이나 호연지기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감성으로만, 민족적 당위성으로만 남북관계를 풀 수 없음은 지난 시간들이 이미 보여줬다. 이젠 냉철한 이성이 더더욱 필요한 시기이다. 눈물만 흘린다 해서 통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전문가들의 역할이, 언론의 역할이 더욱 더 크고 무겁다. 의미 없는 돌려까기로 방송이나 타고, 조회수를 올려 돈 벌 생각만 하지 말고, 그러다 국회에 기어들어 갈 궁리나 하지 말고, 치열하게 공부하고 연구해야 한다. 과거에는 미처 상상할 수 없었던 기발한 제안들이 여기저기 나와야 하고, 그 생각에 대한 다른 생각들이 뒤를 이어야 한다. 『예정된 위기』와 같은 오랜 연구와 성찰의 결과물들이 끊임없이 나와야 한다. 심지어 이 책은 재미있기까지 하다!

서점을 둘러보면 미중 대결의 승자가 누구일지, 우리는 그 사이에서 어떤 배팅을 해야 할지 주구장창 호들갑 떠는 책들이 수두룩하다. 예전의 나였으면 ‘XX 서점, 원인 모를 방화로 전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어.’등의 기사를 출고시켰을지도 모른다(물론 농담). 하지만 그런 책들이라도 이젠 살펴보련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남북관계의 해법에 대한 저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것이다.

‘너나 똑바로 정신 차리고 공부해!’라고 꾸짖어 주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넵! 열심히 오늘도 밑줄 치고, 포스트-잍 붙여가며 공부하겠습니다!

우리 열심히 공부하자. 공부하면서 욕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