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새끼, 엄마가 미안해”

[간서치의 둔한 서평 (161)] 박도의 『한국전쟁Ⅱ- NARA에서 찾은 6·25전쟁의 기억』

2021-03-08     간서치
박도, 『한국전쟁Ⅱ- NARA에서 찾은 6·25전쟁의 기억』, 눈빛, 2010. 6. [자료사진 - 통일뉴스]

1950년 여름, 난리는 참혹했다. 남편은 “알아서 일단 남쪽으로 피신하라”는 연락만 남긴 채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남편이었으니, 인민군에게 잡히게 되면 십중팔구 총살될 것이 빤했다.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집에 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훗날 남편은 서울에서 인민군에게 잡혀 ‘죽으러’ 끌려가다가 엎어치기로 두 병사를 때려눕힌 후 기적적으로 도망쳤다고 말했다. 유도선수로 일정시대 일장기를 달고 일본에서 열린 유도대회에서 우승한 사람이었다. 그 유도가 남편을 살렸다.

허겁지겁 짐을 꾸렸다. 짐이랄 것도 없었다. 명색이 공무원이라 해도 늘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살림이었으니 아이들 옷가지나 주섬주섬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길을 나섰다. 남쪽에 아는 친척이나 지인은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 남쪽으로 가야만 했다.

열 한 살 큰딸, 일곱 살 큰아들, 그리고 그 아래 세 자식들.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작은 아이를 안고 큰 녀석들을 앞장세워 무작정 남쪽으로 걸었다. 피난길은 험난했다. 무엇보다 언제 폭격을 맞아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지독했다. 나 하나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 다섯 아이들은 누가 돌볼 것인가. 언제 지애비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두려움이 더 컸다.

길가엔 죽어 나간 주검들이 즐비했다. 죽은 엄마 옆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살아야 했다. 주먹밥 하나 손에 쥐어주고 제 갈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걸은 것 같았지만, 다섯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길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조바심이 마음을 짓눌렀다. 이렇게 느리게 내려가다 언제 인민군에게 잡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없는 큰딸은 엄마가 늦게 걷는다며 투정을 부린다. 큰아들 녀석은 주위에 주검들을 애써 모른 척하며 땅만 보며 걷고 있다. 절망이 다가왔다. 그리고 선택의 시간이 다가옴을 느꼈다. 별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천천히 길옆 논으로 내려갔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따라 내려온다.

“너 잠깐만 여기에서 기다려라. 엄마 잠깐 다른 곳에 들렀다 다시 올게. 알겠지?”

큰딸을 논바닥에 앉히고 주먹밥 두 개를 손에 쥐어주었다. 지애비 닮아 성격이 남자 못지않은 큰딸은 버럭 화부터 냈다.

“왜 나만 여기서 기다려야 해? 언제 올 건데? 빨리 와! 알았지?”

그러마, 빨리 다시 오마, 하며 뒤돌았다. 제 누나를 바라보며 내 손을 더 꽉 잡은 큰 녀석은 알고 있었을까. 엄마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다시 길을 나섰다. 이내 눈앞이 뿌옇게 되더니 피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내 새끼를 길바닥에 버리고 남은 것들을 살리겠다고 도망치는 나는 도대체 제정신인가.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게 맞다고, 어쩔 수 없다고 억지로 다잡았다.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딸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발걸음이 자꾸만 더뎠다. 죽고 싶었다. 1시간쯤 걸었을까. 결국 주저앉아 버렸다. 땅을 치고 통곡했다.

“안 되겠다. 그냥 우리 다 죽더라도, 이렇게는 안 되겠다.”

다시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마음처럼 발걸음도 급했다. 혹시나 그 사이에, 혹시나 우리 딸이, 잘못했다, 미안하다, 용서해라.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다시 딸을 찾아 걸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논바닥. 이미 어두워진 논바닥에 딸아이가 누워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데.

“뭐야! 왜 이렇게 늦었어! 배고파 죽을 뻔했단 말야!”
“미안하다. 엄마가 미안해. 우리 새끼. 엄마가 미안하다.”

딸을 붙잡고 또 한 번 통곡했다. 딸은 엄마가 왜 이러나 하는 얼굴로 쳐다만 봤다. 그래,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우리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다시는 너를 놓지 않으마.

세월이 흘렀다. 많은 사연들이 나를 찾아왔고 많은 인연들이 나를 떠나갔다. 전쟁통에도 살아남았던 막내아들은 취직 후 처음 참석한 회사 야유회에 갔다 물귀신이 되어 돌아왔다. 부산에 아들을 묻었다. 스무 살 청춘을 가슴에 묻었다.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다시 전쟁이 날 것처럼 무서웠던 시절도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정치 따위는 나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무조건 살아남아 자식새끼들을 먹여야 했다. 그것밖에 중요한 것은 나에게 없었다. 군인들이 정권을 잡은 후 애 아빠는 공직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왔고, 곧 장사를 시작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 하나 없이 혼자 힘으로 조금씩 재산을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돈 좀 있는 남자에게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난 늘 자식들만 챙기며 살아갔다. 서럽지도 미련이 남지도 않았다. 은퇴 후 동해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다른 여자와 살아가던 애 아버지는 가끔씩 자식들을 보러 찾아왔고, 그때 잠깐씩이나마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남북의 우두머리들이 처음으로 만나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이듬해 남편이 세상을 떴다. 그래도 눈물이 흘렀다. 정이 남아 있었나. 곧 따라갈게요. 잘가요. 인사를 전했다.

그 후로도 참 오래 살았다. 이승에 무슨 미련이 그리도 많았는지, 자식들 힘들게 참 오래도 살았다. 어린 시절 많이 얻어먹지 못해 늘 비쩍 말랐던 큰손주는 무슨 통일운동을 한다고, 이북을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다. 늘 조심하라고 이야기했지만, 늙은 할미 말을 듣는지나 모르겠다. 지애미를 구박했다고 이 할미가 많이 밉기도 했겠지.

무서운 전염병이 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전쟁보다 무서울까. 큰손주 놈이 하는 일이 부디 이 땅에 다시는 난리가 나지 않도록, 이북과도 친하게 지내고 같이 먹고 사는 세상을 만들도록 하는 것이면 좋겠다. 그래서 내 손주 놈의 자식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전쟁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

이제 애 아버지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스스로 참 애썼다고 말해주고 싶다. 부디 남은 아이들이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잘 살아라.

분단된 이 땅에 살아가는 누구든, 서러운 사연이 없을까. 늘 자식들 걱정으로 자신은 돌보지 않았던 할머니를 기억한다. 할머니가 바랐던 평화로운 한반도를 꼭 아이들에게 물려주겠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가야겠다. 이 땅의 모든 할머니에게 인사를 전한다. 할머니, 잘가. 또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