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독립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간서치의 둔한 서평(159)] 허영만의 『독립혁명가 김원봉』

2021-02-18     간서치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의열단 공약 제1조)

설 명절 이후 약속이나 하신 듯 어른들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 이 땅의 민주화 그리고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백기완 선생님, 멀리 타국에서 일생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셨던 ‘시대의 불침번’ 정경모 선생님, 5·18 당시 가두방송을 하며 광주민주화운동의 맨 앞에서 시대를 불살랐던 전옥주 선생님까지. 무엇이 그리 급하셨는지 남겨진 우리들은 황망하기만 하다.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 같다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현대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순간마다, 주어진 역사의 소명을 거부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냈던 이들의 퇴장은 남은 이들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 여기서 너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굴종을 거부한 용기, 타의로 인해 분단된 조국을 우리의 힘으로 통일하고자 했던 자주, 민주주의를 짓밟는 자들 앞에 무릎 꿇지 않고 떨치고 일어나 외친 함성들. 우리는 어쩜 이 땅의 수많은 백기완, 정경모, 전옥주의 피와 땀을 밑천 삼아 여태껏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떠나가신 세 분을 혁명가로 기억하고자 한다. 불의 앞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 모든 이들은 혁명가다. 자신의 영달이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들은 혁명가다. 그 어떤 거대담론이나 사상에 앞서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이들이 혁명가다. 때문에 이들은 이 땅의 혁명가였다.

허영만, 『독립혁명가 김원봉』, 가디언, 2020. 8. [자료사진 - 통일뉴스]

황망하고 무참한 마음을 안고 서성대다 ‘밀양사람 김원봉’을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우리 시대 대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작가 허영만의 작품이다.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성남시가 진행한 ‘독립운동가 웹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책의 특성은 단순히 김원봉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 의열단의 일원으로, 또한 조선사람으로서 목숨을 바쳐 독립투쟁을 전개한 많은 이들의 활약도 함께 담았다는 점이다.

나는 약산을 제거하기 위해 의열단에 위장 입단한 조선인 첩자를 처단하는 장면에서 한동안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냥 멍하니 있었다. 사람들이 시대를 만들어가지만, 시대가 사람들을 만들기도 한다. 식민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던 군상들의 처절함이 먹먹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싸웠던 의열단을 비롯한 독립혁명가들의 그 치열함과 숭고함에 고개 숙였다.

약산 김원봉은 일생의 투쟁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이루려 했지만, 타국에 의해 해방을 맞자 크게 좌절한다. 그리고 그와 백범의 예감대로 조국은 갈라지고, 친일파들이 다시 득세했다. 결국 약산은 남과 북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혁명가로 우리에게 남아있었다.

남북관계가 얼어붙어 있는 지금, 다시 약산과 의열단을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곁을 떠나간 혁명가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원했던 세상, 그들이 피와 땀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세상은 아직도 저 멀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분단의 극복은 고사하고,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숙제도 풀지 못하고 있는 우리. 누굴 탓할 수 있을까. 그리고 먼저 가신 분들을 훗날 어떻게 뵐 수 있을까. 아니 이미 우리는 부끄러움마저 슬그머니 내다 버린 것은 아닐까.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분단극복과 통일은 그 누구의 힘이 아닌 우리의 노력과 희생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야 한다. 백기완 선생님이 생전 병상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당부한 마지막 이야기도 그것이었다. 남의 힘으로 해방을 맞은 후과를 지금까지 겪고 있지 않은가. 배짱 있게 우리 국민을 믿고 남북의 화해를 위해 과감히 나서라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게도 ‘국뽕’의 기억이 남아있다. 2002년 월드컵 때가 거의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은데, 아무튼 대한민국이 잘 되면 나도 잘 되는 것이라는 믿음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물론 지금도 우리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거창한 ‘애국심’으로 설명하고 싶진 않다. 분명 그것과는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 이웃들, 내 가족들, 그리고 남과 북의 모든 구성원들이 평화롭게 살아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것이 나에겐 애국심일 수도 있겠다.

먼저 가신 혁명가들은 어떠셨을까? 대한민국을 사랑하셨을까. 아님 한반도 전체를 사랑하셨을까. 아님 전 세계 모든 인민들을 사랑하셨을까. 어리석은 내가 알 길은 없지만, 아마 편협한 국수주의나 잘못 해석된 민족주의는 아니었으리라 믿는다.

책의 말미에는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왜 어설픈 자강주의나 실력배양론이 허망한 것인지 똑똑히 설명하고 있다. 강도 일본에겐 폭력과 혁명으로 대응할 수 있을 뿐이다. 문장마다 서려 있는 서슬 퍼런 외침이 지금도 살아 숨 쉬는 듯하다.

김원봉과 의열단의 치열한 투쟁을 마치 영화처럼 생생히 담은 작품이다. 온 가족이 함께 읽어도 좋을 책이다. 이 땅의 온전한 평화와 남북의 하나 됨이 이뤄지기 전에는 의열단의 투쟁 역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제 남겨진 우리가 우리 삶 속의 혁명가가 되어야 할 때다.

아, 백기완 선생님을 추모하는 시민분향소 설치에 대해 어느 젊은 보수 정치인이 백선엽과 비교하며 분노했다고 하는데, 그 천박한 역사 인식이 자랑인 듯하다. 시대를 불문하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고귀한 이들이 있으면 쓰레기도 있는 법이다. 분리수거를 철저히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