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은 누가 결정하는가
[간서치의 둔한 서평(154)] 파울로 코엘료 『스파이』
지난 2019년 7월 발간된 『역사의 색 : 이토록 컬러풀한 세계사』라는 책이 있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세계사의 여러 장면 중, ‘1850년부터 1960년까지 존재했던 가장 의미 있는 현장을 200장의 사진으로 압축’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와 제국의 등장과 몰락, 크고 작은 전쟁, 우주 시대의 개막까지’ 역사상 중요한 장면을 담은 흑백사진들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컬러로 복원하고, 역사가가 그 사진의 전후 맥락을 소개한 책이다.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세계사의 결정적 장면들을 생생한 컬러로 확인하고, 사려 깊은 설명이 더해져 나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었다. 당시 민중들의 생활상과 다양한 모습들도 살펴볼 수 있었다. 언젠가 이 연재를 통해 소개하고픈 책이다. 참고로 한국(조선)에 관련된 부분은 명성황후라 추측되는 사진과 6·25전쟁의 참상을 담은 두 컷이 유일했다.
한편 여러 사진 중 내 시선을 끄는 한 장면이 있었다. 그 사진의 주인공은 파울로 코엘료의 『스파이』의 주인공. 마타 하리. ‘태양’ 혹은 글자 그대로 한다면 ‘낮의 눈’을 의미하는 이름으로 세계를 매혹 시켰던 그녀는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 1917년 간첩 활동을 했다는 반역 혐의로 기소되었고, 증거가 매우 희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죄가 선고되어 10월 15일 총살당했다. 장교는 쓰러진 그녀의 머리에 다시금 총알을 박았다. 총살당하기 11년 전 사진 속 그녀는 관능적인 춤사위를 보여주고 있다.
1876년 태어나 1917년 사망한 마타 하리는 여전히 팜므 파탈의 대명사다.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수많은 여성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치가, 군인, 예술가들의 구애를 받았던 세기의 여인 마타 하리. 당시 파격일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무용과(혹자들은 음란한 스트립 쇼일 뿐이라 혹평했다) 무수히 많은 남성들과의 염문, 그리고 비극적 죽음은 그녀를 신화로 만들었다.
하지만 코엘료는 그녀를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로 다시 호명한다. ‘그 시대 남성들의 요구에 저항하며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독립적인 삶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이라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죄’였다고 이야기한다.
소설은 주인공 마타 하리가 변호사에게 전하는 편지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말미에 당시 그녀를 변호했던 변호사의 편지 형식의 고백이 덧붙여지지만, 마타 하리의 편지가 소설의 중심이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부정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스파이라는, 간첩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썼지만 진실은 곧 밝혀질 것임을, 설사 당장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처형된 이후라도 진실은 밝혀지리라 믿었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이 자신을 간첩이나, 창녀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과연 그녀의 바람은 지금 이루어졌을까.
당대 사회가 만들어 놓은 관습, 규율은 남성의 창조물이자 특권이었다. 여기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지키려 했던 수많은 여성들은 핍박과 심지어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그러한 예는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시대를 앞서간 여성들은 결국 자신들이 바꿔버린 시대를 맞지 못하고 사라져갔지만, 다음 그다음 세대의 여성들은 그들로 인해 달라진 삶을 맞을 수 있었다.
여전히 마타 하리는 상반된 평가를 받곤 한다. 문란하고 음탕한 창녀, 혹은 육체적 매력을 이용해 신분 상승을 하고자 했던 욕망의 화신, 아니면 정말 국가를 배반한 반역자.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녀를 온전히 평가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한 단순한 평가만으로 그녀의 뜨거웠던 삶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 속 마타 하리는 자신을 스파이로 몰아가는 세상에 이렇게 외친다.
“죄악은 신이 창조한 게 아니고, 우리가 절대적인 것을 어떤 상대적인 것으로 변형시키려 할 때 만들어졌어요. 우리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만 보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일부가 죄와 규칙, 악에 맞서 싸우는 선을 결정하다 보니 결국은 각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죠.”(133~134쪽)
아마 그녀의 입을 빌어 코엘료가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쟁과 살육의 원인은 절대선과 절대악을 우리가 저마다의 기준에 따라 만들어 왔기 때문 아닐까. 그사이 수많은 마타 하리가 희생되어 온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도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선과 악의 기준으로 타인을 구속하고 절멸시키려 하는 비극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최근 보았던, 전쟁을 주제로 한 미국 드라마와 영화들이 떠오른다. 인류 역사 속에서 비단 미국만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미국은 끊임없이 절멸시켜야 할 ‘악’을 만들어냈다. 민족과 국가만 다를 뿐 악은 늘 만들어졌다. 그들에겐 ‘모조리 죽여버려야 할 나치 새끼들’이 곧 ‘뻐드렁니 일본원숭이들’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없애버려야 할 소련놈들’, ‘호치민의 더러운 베트콩 놈들’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6·25전쟁 시기 북을 무어라 호칭했을까, 그리고 지금은? 여전히 북은 그들에게 악의 축일 따름일까. 중국의 하수인일까. 미친 전쟁광이 다스리는 미개한 국가일까.
우리 현대사는 좌우의 극심한 대결 속에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상처의 역사다. 그 사이 수많은 스파이, 간첩이 남북을 오갔고, 또 권력자들의 필요에 따라 창조되기도 했다. 여전히 우리는 ‘간첩’이라는 단어가 주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 모르면 간첩’이라는 표현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 한국이다. 국가보안법은 절대 가치이고, 그것으로 인해 위협받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무시되기 일쑤다. 과연 우리는 언제 ‘간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코엘료의 『스파이』는 남성이 여성의 전형, 모범을 만들어 놓았던 시대에, 이를 거부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한 여성을 통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차별과 배제를 고발하고자 했다. 하지만 분단된 조국을 살아가는 나에겐 그와 더불어 ‘간첩’이라는 것이 주는 의미가 더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타 하리는 말한다.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를 때는 길을 잃는 법도 없다”고. 우리는 온전히 옳은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 이 길의 끝에는 또 무엇이 나올까. 무엇이 우릴 기다릴까.
분단의 비정상성을 회복하는 여정 속에 인간의 권리가, 여성의 주체적인 삶도 함께 회복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북의 8차 당 대회가 끝나가는 지금, 다시 안전하고 평화로운 한반도를 상상해 본다.
“죽음은 대수롭지 않다. 사실 삶도 그렇다. 죽는 것, 잠드는 것, 무위로 돌아가는 것, 무엇이 대수로운가? 모든 게 신기루다.”(마타 하리가 마지막으로 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