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한국의 主流사회와 金正日」의 대결 구도(1)
2000-10-10 연합뉴스
조갑제(월간조선 편집장)
30명이 탄 어선이 태풍 속에서 실종된 경우, 사회면 2~3단 기사로 보도되다가 사망한 것이 확실해져도 곧 잊혀지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언론은 실감할 수 없는 뉴스에 대해선 작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먼바다에서 30명이 사망한 어선실종 사건보다도 서울시내의 음식점에서 일어난, 몇 명이 다친 프로판 가스 폭발사고가 더 크게 보도되는 이유가 그런 것입니다.
1987년 11월29일 미얀마 남쪽 공해 상공 11km에서 발생한 대한항공 858편(보잉 707기) 폭파사건의 비극성은 제대로 실감된 적이 없습니다. 屍身(시신)은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고, 조종사들은 구조요청 신호를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가족들은 아직도 아들, 딸이 살아있다고 믿으려 하면서 밤중에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때는 가슴이 뛴다는 것입니다. 저는 11년 전 안기부가 폭파 실험한 비디오 필름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金勝一(김승일)·金賢姬(김현희) 두 공작원이 대한항공기 선반에 두고 내린 라디오 안에는 콤포지션-4란 폭약이 약 350g 들어 있었습니다. 라디오에 달린 시한폭파 장치가 이 폭약을 터뜨리면 그 옆에 둔 액체폭탄도 동시에 터집니다.
안기부 수사팀에선 밀가루 반죽 같은 350g의 폭약을 쇠상자 안에 넣고 약 200m 떨어진 토치카에서 원격 조종 단추를 눌렀습니다. 쇠상자는 분해되고 찢기면서 날아갔습니다. 파편들이 토치카 창문까지 날아와 실험요원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실험용 쇠상자의 철판 두께는 1cm. 보잉 707기의 외판 두께는 수 mm 정도이고 알루미늄 합금이었습니다. 여기에다가 액체 폭탄까지 함께 폭발했으므로 대한항공기는 동강나고 분해되었을 것입니다.
승객들은 급격한 減壓(감압) 직후의 압력 急增(급증)으로 순식간에 의식을 잃었을 것입니다. 조종사들이 구조신호를 보낼 시간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불덩이가 된 기체는 조각나고 동강난 채 상공에 흩어지면서 115명의 육체들은 영하 수십 도의 高空으로 뿌려졌을 것입니다. 이 사건의 두 범인 중 한 명 金勝一 노인은 바레인 공항에서 검거될 지경에 이르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고, 金賢姬는 삼킨 독약의 양이 적어 살았습니다. 이 항공테러는 金賢姬란 美女 공작원의 등장으로 그 비극성이 희석되었습니다. 저는 1989년 봄 金賢姬를 서울시내 모처에서 5일간 연속 인터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사진보다도 실물이 못하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저는 묘한 체험을 했습니다. 金賢姬의 얼굴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45도 각도로 바라본 金賢姬의 얼굴이 아름다웠습니다. 앗시리아의 浮彫(부조) 같은 단정하고 신비한 분위기.
그녀는 외교관 아버지와 중학교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엄격한 훈련과 교육을 받은 그녀는 수줍음을 타는 반듯한 여자였습니다. 부잣집 며느리감으로 손색이 없는 이런 美女가 어떻게 살인기계가 되어 115명을 죽게 했는가. 더구나 외국에서 누가 권총을 들이대고 행동을 강제한 것도 아닌데 同族(동족), 그것도 노동자들을 떼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었는가. 저는 이 수수께끼를 풀고 싶었습니다. 그 탐구 과정에서 金賢姬는 유일신 金日成의 신도임을 알아냈고, 북한체제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비결을 얻게 되었습니다.
金賢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그다드 출발 대한항공기에 올라 김승일이 폭파용 라디오와 액체폭약이 들어 있는 비닐 쇼핑 백을 좌석 위 선반에 올려놓는 것을 보고 사업결과 총화시 보고할 목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탑승객은 거의가 중동 진출 한국 근로자들로서, 중동에서 일하기가 힘들다면서 소속 회사에 대한 불만을 많이 털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귀국하는 것이 좋은지 즐거워하다가 機內食(기내식)이 끝난 뒤에는 거의가 잠이 들었습니다. 아부다비에 도착하여 내릴 때, 이 근로자들이 죽을 것을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양심의 가책이 왔습니다만 金日成이 지시한 혁명과업의 완수를 위해서는 이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마음먹고 내렸습니다』
독자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중동 건설현장에서 근무하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대다수 근로자들은 가족과 떨어져 2~3년간 근무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경쟁력이라고 했습니다. 부모, 아내, 아들 딸,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로자 본인들의 희생에서 우러난 경쟁력이었습니다.
군대 복무 경험이 있는 분들은 쉽게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동 근로자들은 군대 생활을 두 번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 귀국하던 바로 그 비행기였습니다. 제대한 뒤 가벼운 옷가방을 달랑 들고 마지막으로 군용열차에 올라 집으로 향하던 기분을 다들 아시죠? 바로 그런 사람들의 행복과 꿈과 설렘을, 金正日은 「서울 올림픽을 저지한다」면서, 또 「남조선 사람들이 탄 비행기를 폭파시켜야 국제문제가 되지 않는다」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金賢姬는 이 폭파사건이 金正日의 친필지령에 의거한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이런 증언이 없어도 金正日이 실권을 장악한 1980년대 이후 일어난 對南테러는 그의 책임입니다. 그는 對南공작과 외국인 납치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구체적으로 간여했습니다. 그가 申相玉-崔銀姬 부부를 납치하도록 시킨 것이 「나」라고 말하는 육성이 崔銀姬씨에 의해 녹음되어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의 가장 큰 비극은 일부 희생자 가족들이 재판받으러 법정에 나온 金賢姬를 향해서『너는 범인이 아니야. 이건 안기부 조작이야』라고 소리쳤다는 점입니다. 북한정권의 모략 선전과 남한 내 親北세력의 선동에 영향을 받은데다가 「안기부의 조작이라면 승객들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다」는 기대가 뒤섞인 이런 주장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가족들이 아직도 있다고 합니다(이번 호에 실린 「KAL 858기 폭파사건 가족회 사람들 이야기」).
金賢姬가 안기부의 끄나풀이었다면 그의 얼굴이 10여 년간 자유세계에서 그렇게나 널리 알려졌는데도 친척이나 知人(지인)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우리 정부는 이 사건이 나자 미국과 함께 적극적인 외교전을 전개하였습니다. 국제사회에 호소하여 테러집단인 북한에 대한 보복과 제재조치를 하도록 설득하였고, 많은 우방국이 동참하였습니다. 북한이 미국에 의해 테러국가로 지정되어 경제적 규제를 당하고 있는 것도 이 사건 때문입니다.
金正日이 서울을 방문하기 전에 대한항공 폭파사건, 아웅산 폭파사건 등 국내외 테러에 대해서 시인·사과해야 한다는 주장이 金泳三 전 대통령, 李哲承 서울 평화상 위원장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런 의견을 月刊朝鮮 인터넷 여론조사에 부쳐보았더니 68%가 「시인, 사과, 책임자 처벌」에 찬성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金大中 정부는 지난 9월2일 대한항공 사건과 無關(무관)하지 않은 남파간첩 辛光洙(신광수)를 북한으로 보내주었습니다. 辛은, 日本人 요리사 하라 타다아키(당시 44세)를 규슈 미야자키 해안으로 유인하여 술을 먹인 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북한 공작원과 함께 그를 자루에 집어넣어 8인승 고무보트에 실었습니다. 辛光洙와 북한공작원들은 공해상에 있던 북한공작 母船에 이 불쌍한 일본인을 옮겨 실은 뒤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라 타다아키는 오사카 조총련 상공회 이사장 李三俊이 경영하던 음식점에서 요리사로 근무했습니다. 辛光洙는 납치공작에 조총련 조직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북한은 조총련을 對南 침투의 전진기지로 이용해 왔습니다. 북한측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질 조총련 사람들의 母國 방문은 이런 공작 활동의 자유를 넓히는 방향으로 이용될 수 있습니다.
辛光洙는 납치한 하라 타다아키를 북한당국에 넘겨준 뒤 그의 신원사항을 이용하여 본인이 하라 타다아키인 것처럼 위장하고 일본 여권까지 정식으로 발급받아 한국을 드나들면서 간첩질을 했습니다.
올해 71세인 辛光洙는 포항 출신의 재일동포. 해방 후 귀국하여 좌익활동을 하다가 6·25전쟁 중 월북했습니다. 루마니아에 6년간 유학하기도 한 그는 1971년에 對南공작원으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는 1973년 공작선 편으로 일본에 잠입했었습니다.
辛光洙는 1976년 북한으로 돌아가 재교육을 받으면서 대기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이 기간 중 그는 金正日의 3호 청사에 불려가 金正日로부터 직접 이런 지시를 받았다고 후일 안기부에 붙들렸을 때 자백했습니다.
『일본인 남자 가운데 45~50세 정도의 독신자로 일가 친척이 없고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당국에 사진을 제출했거나 前過로 인해 지문을 날인한 사실이 없으며 개인부채 등 금전거래는 물론 은행거래가 없는 사람을 고르라. 대상 인물이 없어지더라도 친척이 찾거나 행방불명 사실이 발각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본인 신분으로 위장하여 적극적인 對南사업을 수행하라』
그는 1985년 한국에 들어왔다가 안기부에 검거되었습니다. 1988년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판결을 받았다가 그해 12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며 작년에 출감했습니다. 그는 수사·재판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우리쪽에 협조했다고 합니다.
일본측으로서는 辛光洙가 그들의 납치 의혹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유일한 物證(물증)입니다. 일본측에서 제기하고 있는 납치사건 가운데 납치한 사람의 자백과 납치당한 사람의 신원이 확실하게 밝혀진 예는 辛光洙건뿐입니다. 辛光洙는 또한 金正日이 납치를 직접 지시한 사실을 자백했으므로 金正日 개인의 범죄행위를 입증할 수 있는 證人입니다. 이런 辛光洙의 북송은 金正日 범죄의 증거인멸이란 성격을 갖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辛光洙가 납치해 간 일본인 하라 타다아키의 생존 여부입니다. 한국 정부는 당연히 辛光洙가 납치해 간 하라 타다아키와 신광수를 맞바꾸자고 요구했어야 옳았습니다. 辛을 북한이 아니라 일본경찰에 넘겼어야 옳았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납치범을 돌려주면서 납치당한 피해자의 安否(안부)나 인권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 정부는 金大中 정부 이외엔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일본 정부와 민간단체 및 언론은 한국 정부에 대해서 유감과 불만을 표시하였고, 앞으로도 두고두고 쟁점이 될 것입니다. 金賢姬 사건 등 국제테러·간첩수사에서 韓日 양국의 公安기관은 서로 협조해 왔는데 辛의 북송은 향후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남북이 합작하여 日北수교 교섭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일본인 납치사건의 범인을 납치당국에 넘겨주었다고 흥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납치사건의 희생자인 金大中 대통령이 납치 피해자의 인권은 외면하고 납치범의 인권만 생각한다는 비판을 들을 때 단순히 『일본인의 문제이니까』 하고 침묵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대한항공 폭파사건의 주범인 金勝一은 하치야 신이치, 金賢姬는 하치야 마유미란 이름의 일본 위조 여권을 갖고 범행을 했습니다. 하치야 신이치는 일본 내 실존인물로서 북한간첩 李京雨(이경우)에 의하여 그의 신원이 파악되어 위조여권을 만들 때 이름이 盜用되었습니다.
납치범 辛光洙가 저지른 범죄 수법이 항공테러에도 이용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辛光洙를 그가 납치한 일본인과 교환하지도 않고 북한에 보낸 것은 북한당국으로 하여금 위조여권 만들기와 납치, 그리고 항공테러를 계속하도록 권장하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북한당국은 당초 辛光洙란 인간은 아는 바 없다고 그 실체 자체를 부인했었습니다. 북한 정권이 그런 辛光洙를 이번에 받아들인 것은 간접적으로 일본인 납치를 인정한 셈입니다.
우리 정부는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가 명단에서 빼주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前 정부하에선 북한을 테러집단으로 규탄, 국제사회의 공동대응을 촉구했고, 그 북한이 대한항공 테러를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는데 피해 당사자인 우리 정부가 유족들과 한마디 협의도 없이 북한에 대해 면죄부를 주자고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저지를 수 있는 最惡(최악)의 失政(실정)입니다. 이번 호 月刊朝鮮에 실린 대한항공 폭파사건 가족들 기사를 읽으면서 저는 金正日의 서울 방문이란 것이 간단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切感(절감)했습니다. 그가 서울을 방문하여 환영을 받는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金正日 테러의 피해 당사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이 不眠(불면)의 밤과 고통, 그리고 고민을 겪을 것입니다.
[조갑제]「한국의 主流사회와 金正日」의 대결 구도(2) 에서 계속됩니다.
월간조선 20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