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6.15 이회창총재 기자회견문
남북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한나라당의 기본입장
2000-10-10 연합뉴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분단사상 처음으로 남북한의 정상이 만나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고 대화와 협력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큽니다. 저와 우리 당은 이번 정상회담이 한반도의 긴장완화 등 남북관계 개선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산가족의 상봉과 함께 경협을 비롯한 각 분야의 교류·협력을 활성화시켜 나가기로 한 것도, 앞으로 남북관계의 발전과 북한의 개방·개혁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다만, 국민 누구나 기대하였던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에 대한 언급이 공동선언에 한 줄도 없는 점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놀라고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사회 일각에서는 마치 곧 통일이 이루어질 것처럼 생각하는 들뜬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김대통령 스스로 수차례 강조했듯이, 지금 남북간에 가장 절실한 과제는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선언은 긴장완화와 평화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뒤늦게 "정상회담에서 상호침략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이제 전쟁은 없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지만, 그렇게 합의했다면 그 약속을 당연히 공동선언에 명시적으로 포함시켜야 했습니다.
통일방안은 국민의 동의를 얻어야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정상회담의 결과는 남북관계의 장래에 희망을 주는 부분도 많지만 우려를 자아내는 부분도 있어, 이를 지적해 두고자 합니다.
통일문제가 공동선언의 핵심합의가 된 것은 북측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보입니다. 더구나 수식어가 붙기는 했지만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수용한 듯한 표현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크게 놀라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통일방안은 대한민국의 기본이념과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로 반드시 국민적 합의와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대통령을 포함한 그 누구도 가볍게 취급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는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통일논의의 핵심은 무슨 단계를 거쳐 어떻게 통일을 이루느냐가 아니라 "바른 통일"을 이루는 일입니다. 한반도의 통일은 당연히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반한 통일이 되어야 하며, 여기에 어떠한 양보나 타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산가족 문제는 일회성 행사로 그쳐서는 안돼
이산가족 문제는 일회성 방문행사로 그쳐서는 결코 안됩니다. 모든 이산가족을 대상으로 생사확인부터 서신교환, 면회소 설치, 가족상봉 및 고향방문에 이르기까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전시용 단발성 행사에 머물 경우 정상회담 기간 내내 밤잠을 설치며 가족재회의 그 날을 염원해왔던 이산가족의 가슴에 또 한번 큰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언급 안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
국군포로 문제나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비전향장기수 문제의 해결만 합의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입니다. 이 정부가 국군포로나 납북자 문제를 과연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의문스럽고, 나라를 위해 몸바친 우리 장병들을 위해 정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북경협과 지원은 상호주의 원칙하에
남북경협과 대북지원은 분명한 목표의식과 청사진을 갖고 추진되어야 합니다.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이 분명해야 하고, 인도주의적 지원과 상호주의적 지원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북한동포의 식량난이나 의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도적 지원은 국민의 동의하에 우선적으로 추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타의 지원은 상호주의 원칙하에 북한의 개방 개혁과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한 실천적 행동과 연계되어 추진되어야 하며,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되지 않도록 투명하게 감시하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특히 북한의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우리 정부나 국영기업의 대규모 지원은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투명하게 추진되어야 합니다. 상호주의는 남북관계의 기본적이고도 상식적인 원칙입니다. 과거 서독이 동독을 지원할 때에도 반드시 상응하는 조치를 요구했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간의 대북사업은 상업성에 기초한 민간의 자율적 선택과 자기책임이라는 시장경제원칙 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부가 민간의 대북투자를 일일이 지시 명령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정부의 역할은 북한당국과 협력하여 제도적 차원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대북지원에 필요한 재원은 투명하고 공개적인 법적 절차에 따라 확보되어야 합니다. 대북지원을 위한 각종 기금의 확충이나 예산집행은 반드시 국민과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 모든 종류의 대북지원에 대한 지원의 원칙과 재원조달 방법을 규정하는 "대북지원특별법(가칭)"을 제정할 것을 제안합니다.
북한의 자구노력이 중요
현재도 매우 어려운 우리경제에 주름살을 줄 정도로,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 대북지원이 추진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한정된 지원만으로 북한경제가 회생될 수는 없습니다. 북한 스스로 자구노력을 해야 합니다. 본격적인 개방 개혁 정책을 도입하고 글로벌시장경제에 참여해야 합니다. 막대한 군사비를 과감하게 축소하여 경제발전을 위한 생산적 용도에 이를 투입해야 합니다. 북한이 변해야 하며, 그래야만 우리의 지원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방국과 공조 강화
앞으로 미국·일본 등 우리의 전통적 우방국과 더욱 긴밀한 공조를 다지고 중국·러시아와 협력관계도 한층 강화해 나가야 합니다.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반도의 안정유지에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해왔으며 앞으로도 그 중요성은 조금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한반도 문제를 남북한이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는 국제현실을 냉정히 인식하고 주변국과 협조관계를 강화해야 합니다. 이러한 국제적 협조관계는 대북지원과 남북경협에 있어서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국회에서 철저히, 투명하게 검토
정부는 남북관계를 추진해 나가는 데 보다 투명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설명하기 어렵거나 곤란한 내용에 대해서 "공동선언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사실은 이렇다"거나 "공동선언에는 없지만 정상간에 모두 양해되었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태도는 올바르지 못합니다.
정직하고 의연하게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국민에게 밝히고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반드시 국민적 합의와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김대중대통령이 빠른 시일안에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 나와 이번 정상회담의 과정과 결과를 상세히 보고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남북관계를 정략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돼
우리 당은 앞으로도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정착과 남북관계의 실질적 진전을 위해 필요한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집권여당이 남북관계를 정략적 차원에서 이용하려 들 경우, 남북관계에도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뿐 아니라 우리의 국익에도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것이므로, 이는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실천이 중요
지금까지 남북관계를 돌이켜 볼 때, 남북 사이의 합의는 하루아침에 종잇장이 되고만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공동선언문이 채택되었다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정부는 앞에서 지적한 문제점들을 염두에 두고 후속 당국간 회담을 철저히 준비하여 과거와 같이 국민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야당도 필요한 협조를 아끼지 않을 것임을 밝혀 둡니다.
우리 당은 자유민주질서의 파수꾼이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최근 우리는 정상회담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정체성에 일대 혼란이 오고 가치의 전도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전쟁은 없으며 곧 통일이 될 것 같은 들뜬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북한을 자극해서는 안된다는 명분하에 언론과 보도의 자유를 제약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냉철히 직시해야 합니다. 정상회담을 통해 새로운 남북관계의 전기를 맞이한 것은 사실이지만, 남북한간 군사적 긴장은 상존하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도 남아 있습니다.
정상회담 기간 동안 언론을 통해 우리가 접한 북한의 모습이 과연 그들의 참모습인지, 또 우리가 북한의 모습을 보는 만큼 북한주민들도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는지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남북 양측이 서로의 모습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상호불신의 제거와 신뢰구축의 첫걸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번 대한민국의 기본이념과 체제의 소중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풍요, 번영은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국민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고 발전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 당은 이 소중한 가치와 기본이념을 지키는 파수꾼이 될 것임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0.6.19
한나라당 총재 이회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