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선, 사월이
<연재> 심규섭의 아름다운 우리그림 (157)
옛 중국의 그림에는 아름다운 여성을 그린 작품이 있다. 이를 [사녀도 仕女圖]라고 한다.
[사녀도]는 말 그대로 벼슬, 공직을 가진 여성이란 뜻인데 궁녀를 일컫는다.
궁녀는 직위를 가진 공인이면서 동시에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이다.
[사녀도]의 형식은 일반 공신이나 어진과 같은 초상화나 풍속화와는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녀도]는 한 명의 여성을 단독으로 그린다.
이런 부분에서는 여타의 초상화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림의 주인공은 왕이나 공신과 다르게 특정한 이름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또한 [사녀도]의 주인공은 특별한 공덕이나 업적을 남긴 존재가 아니라 그냥 아름다운 여성이다. 청나라 때 창작된 [사녀도]를 보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자수와 같은 바느질을 하거나 상념에 잠긴 모습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한가로운 여성의 삶을 표현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궁녀들의 모습을 보고 사치스럽고 허영에 빠져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녀도]는 여성의 이상적인 모습을 표현한 그림일 뿐이다.
‘윤진미인도’는 실크페인팅 기법으로 제작된 총 12폭의 작품으로, ‘구장대경(裘装對鏡)’, ‘홍로관설(烘爐觀雪)’, ‘의문관죽(倚門觀竹)’, ‘입지여의(立持如意)’ 등의 주제를 담고 있다.
고궁 연구학자는 청나라 궁궐의 미인을 주제로 한 ‘윤진미인도’의 정식 학술 명칭은 ‘옹친왕제서당심거도병(雍親王題書堂深居圖屏)’이며 궁정 서화(書畵), 도자기, 공예 미술품 및 생활 모습을 그려냈다고 설명했다. (<흑룡강신문>-하얼빈) [자료사진 - 심규섭]
김홍도는 중국의 [사녀도]를 참조하여 그린 작품을 남겼다.
김홍도가 그린 [사녀도]는 당나라 시대의 주방(周昉)이 그린 [잠화사녀도 簪花仕女圖]의 일부를 참조하고 상상을 보태 창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주방(周昉)의 그림을 참조했으리라는 추정은 배경이 단순한 없는 점, 학을 그려 신선세계처럼 표현했다는 점이 김홍도와 닮았기 때문이다.
[잠화사녀]는 그야말로 머리에 꽃을 꽂거나 꽃이 있는 비녀 장식을 한 궁녀를 말한다.
주방이 그린 [사녀도]는 하늘거리는 옷의 표현과 농염하고 자태가 풍만한 것이 특징이다.
물론 김홍도의 [사녀도]는 귀부인이나 궁녀도 아니고, 화려하거나 요염하지도 않다. 오히려 소박한 여선(女仙)에 가깝게 표현되어 있다.
이후 김홍도의 [사녀도]는 신윤복의 [미인도]가 출현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래-사녀도(仕女圖)/김홍도 37세/종이에 담채/121.8*55cm 족자/1781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자료사진 - 심규섭]
독립적인 여성을 표현한 작품은 많지 않고, 그린 화가도 별로 없다.
실제 여성을 그릴 수 있는 미술적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려야 하는 사회적 합의나 근거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윤복의 [미인도]는 충격적인 작품이다.
화원 가문 출신의 신윤복이 평소 마음에 두었던 기생을 그려주었다는 헛된 망상을 하지 않길 바란다.
그 당시 요즘처럼 개인성을 드러내는 초상화에 대한 정서는 없었고 수용되지도 않았다. 차라리 신윤복의 명성과 실력이면 화조병풍을 그려 선물했다면 환심을 얻기가 쉬웠을 것이다.
팔지도 못하는 초상화가 뭔소리란 말인가.
아무튼 신윤복이 독립적인 기생을 그릴 수 있었던 바탕이 있었다.
선비는 곧 신선이라는 사회적 정서가 만들어지고 선비와 풍류를 즐기는 여성이 곧 여선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김홍도는 [사녀도]나 [신선도] 속에 여선을 그려 넣어 미술적 근거를 만들어 주었다.
그 당시 선비들과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사회적 신분을 가진 여성은 기생 밖에 없었다. 아무리 풍류를 즐긴다지만 궁녀는 일단 왕의 직속이기에 잘못하면 모가지가 날아갈 판이다. 그렇다고 남편이 있는 부인이나 양반집 처자를 밖에서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고, 백성들의 아녀자나 노비들은 글을 모르고 풍류를 몰랐다.
결국 기생은 현실적인 여선일 수밖에 없었다.
이 그림은 여선을 그렸지만 소재는 무수리-궁녀이다.
나는 아직 현대의 여선을 어떻게 그려야 할 지 잘 모른다. 연예인이 여신(女神)이라 추앙받는 현실이기에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최소한 한복을 입으면 성적 대상이나 상품으로 보는 시선이 약해진다. 우리 한복은 몸이 아니라 얼굴에 주목시킨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 없는 궁녀를 그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극 때문에 궁녀의 복장이나 모습은 쉽게 고증되나 모델을 구하는 일은 내 형편에는 어렵다.
결국 인터넷에 떠도는 사극 배우들의 여러 모습을 찾고 짜깁기를 해서 형태를 잡을 수밖에 없다. 이 그림에서 묘한 연예인의 향기가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이해하기 바란다.
그림 속의 여성의 이름은 [사월이]이다.
[사월이]는 특정 이름이 아니다. 그냥 4월이란 시간을 드러내고 노란색 옷고름과 모은 두 손, 차분한 표정은 현실을 반영한 장치이다.
나는 우리나라 여성들을 신선, 여선이라고 생각하고 그렸다.
여선은 아름답고 성적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허영심을 드러내거나 천박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세상에 대해 정의를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대적 양심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