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질문, 명분과 현실

<간서치의 둔한 서평④> 오세영 『북벌 - 1659년 5월 4일의 비밀』

2015-04-22     간서치

작년 초 새해를 맞으며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돌이켜보니 2014년 독서를 꽤 무거운 주제로 시작했던 것 같다. 북벌이라니, 병자년의 치욕을 되갚기 위한 조선의 출병이라니, 소설이라 해도 그리 가벼운 주제는 분명 아니다.

▲ 오세영, 『북벌 - 1659년 5월 4일의 비밀』
, 시아, 2011.7 . [자료사진 - 통일뉴스]
한반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것. 바로 ‘지정학적’이란 수식어다. 애매하긴 하다. 하필 우리 주변을 세계 4대 강국이 병풍마냥 둘러싸고 있다. 미국이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는 않지만, 어쩜 나머지 세 국가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맞다.

때문에 외교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냉철한 현실 인식도 필요하다. 언제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질 수 있으니(그동안 많이 터진 바 있기도 하고), 매사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혹자들은 이것이 우리의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어리석은 나는 솔직히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기엔 양심이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조상들이 그놈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했는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 살벌해졌다. 미국의 부활로 인해 잠시 숨을 고르고는 있지만, 중국은 덩 샤오핑의 ‘도광양회’를 넘어선 지 오래다. 국내 학자나 언론인 중 일부는 러시아가 미국에 의해 큰 곤경(!)에 빠진 것을 목격한 중국이 ‘신 도광양회’로 대외전략을 바꾸었다고 말하지만, 난 여전히 중국이 ‘주동작위’와 ‘돌돌핍인’ 그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중국은 스스로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을 만큼 거대해 졌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나락으로 떨어졌던 미국도 다시 부활하고 있다. 물론 그 과정이 그리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미국은 세계 경제와 군사 부문을 장악하고 있고, 이러한 추세는 단 시일 내에 바뀔 것 같지 않다.

그럼 일본은? 러시아는? 각자 처한 상황이 만만치 않긴 하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의 경제 강국이고 또한 대국이다. 미국에 대해 이를 갈고 있을 푸틴은 더 이상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겠다는 심산이고, 아베 역시 어떤 어려움을 무릅쓰더라도 다시금 일본을 세계가 두려워하는 국가로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동북아는 지금도 요동치고 있다.

우린 여기에서 항상 실리와 명분이라는 두 과제를 적절히 섞어가며 외교력을 펼쳐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경제적으로 이미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중국을 무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오랜 동맹인 미국과 소원해질 수도 없는 상황이다. 결국 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영리하게 실리를 취하고, 또한 명분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아니, 정부의 생각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늘 궁금했던 것이 있다. 우리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동안, 우리가 그렇게 계산을 하는 동안, 과연 다른 나라들은 놀고 있을까? 미국과 중국은 우리의 속셈을 전혀 모르고 있을까.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냥 우리가 하는 대로 지켜보고만 있는 것일까.

그건 절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미국과 중국 두 나라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기실 우리의 선택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그들은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실리외교, 균형외교. 이런 것들은 기실 허상일 뿐이라는 소리다. 게다가 우린 북한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상수(이자 변수)를 안고 있다. 답은 그리 많지 않다.

얼마 전 러시아 전문가 한 분을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그 분은 이른 바 ‘경제외교’를 위해 중남미로 떠난 대통령의 행보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장기간 해외 순방이 과연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느냐는 우려였다. 이는 세월호 문제나 성완종 리스트 파문, 연금 개혁 등 국내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사드(THAAD)배치 문제, 러시아의 5월 전승절 행사에서 푸틴과 김정은의 만남 등 주목할 만한 국제정치의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우리 외교부가 자부하고 있는(!) 전략적 모호성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동안 한국이 모색해왔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가 사실상 협상 타결 이후로 미뤄진 점을 지적한 것이다. TPP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이 그동안 우리 정부가 보여준 기회주의적 처신(이것이 외교부가 자부하는 전략적 모호성!)에 분개하여 한국을 TPP 초대 멤버에서 제외했다는 설명이다. 역시 대통령이 없을 때 이뤄졌다.

설명을 더 들어보자.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TPP는 사실상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과 대척점에 있다. 하지만 경제적 파급효과는 인프라 개발에 치중한 AIIB와 달리 TPP가 엄청나다. TPP 협상에 참여 중인 12개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이 전 세계 GDP의 37%를 차지할 정도다. TPP가 본격 가동되면 지금까지 체결된 다자간 FTA 규모로는 최대이다.”

전략적 모호성? 실리외교? 역시 어리석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 수밖에 없다. 이것도 철저히 국익을 생각하여 결정한 것인지, 명쾌한 설명을 듣고 싶지만 어쩐지 답변을 듣기 두렵다. 실망할까봐.

우리의 ‘외교력’이라는 것을 보자면 여전히 고려시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직까지 고려의 서희를 우리 외교의 상징으로 말할 만큼, 빈약한 것이 아닌가. 서희 이후의 외교다운 외교는 없었던 걸까. 명분에 얽매인 사대주의가 판치던 역사는 이후 조선의 멸망과 대한제국의 몰락, 일본의 식민지와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외교? 그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외교라는 건 단지 미국과의 그것이 전부처럼 보인다. 그게 바뀐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미국이 아닌 외교를 말할 수 있을까? 맞습니까?

여전히 외교부는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임을 자부한다. 물론 강대국들에겐 한없이 약하지만. 최고의 엘리트라면 최고는 아닐지라도 최선의 외교정책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 텐데, 그런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암튼 그렇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외교라는 게 말이다.

중국의 AIIB 가입과 미국의 사드 참여 사이에서 우리 외교부의 수장은 “축복”이라 말했다. 무엇이 축복인지 심히 궁금하지만, 암튼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그 자체에 행복감을 느낀 게 아닐까 싶긴 하다. 씁쓸하다. 자신도 말하고 나서 우울하지 않았을까.

오직 명나라를 주인의 나라로 모시던 조선은 명을 멸하고 일어난 청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다. 피난 간 조선의 왕은 남한산성에서 청의 군사들에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명나라 왕실을 위해 엎드려 절을 하고 춤을 추었다. 신하들은 끝까지 싸우자는 편과 항복하자는 편으로 갈라져 싸웠다. 그 사이 백성들은 죽어갔다.

<북벌>은 효종의 청나라 출병 계획과 이를 막으려는 서인, 친청파들의 치열한 암투와 음모를 다룬다.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결국 북벌은 이뤄지지 못했다. 만약 효종이 죽기 전 출병을 명했다면, 조선이 청을 공격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조선이 청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 다시 명이 일어설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조선 백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베니스의 개성상인>으로 이미 그 필력을 인정받은 작가는 효종의 북벌 시도라는 역사를 통해 3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과연 명분과 현실, 그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 무엇인지.

생존과 명분. 명나라와 청나라, 이 두 나라가 과연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차이로 다가왔을까. 그들은 그저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만을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명분이라면 누굴 위한 명분이고, 국익은 누굴 위한 국익일까.

AIIB이던 TPP이던 THAAD이던,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백성이어야 한다. 그들은 더 이상 조선시대의 그들처럼 ‘백성’이 아니다. 주권을 가지고 있는 이 땅의 주인들이다. 그들을 고려하지 않은 국익이나 명분 따위는 필요치 않다. 그게 핵심이다.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 전개와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이 활약하는 <북벌>은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아울러 소설을 덮고 나서도, 강한 여운과 물음표를 남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이 질문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