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도의 해와 하늘

<연재> 심규섭의 아름다운 우리그림 (94)

2014-06-20     심규섭

장생도에는 해, 하늘, 구름, 바다, 산, 바위, 소나무, 대나무, 복숭아나무, 영지, 학, 사슴, 거북처럼 13가지의 소재가 등장한다. 그림에 따라서는 한두 가지 요소를 빼고 그리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소나무를 빼고 복숭아나무를 넣는 경우가 있는데, 반대로 복숭아나무를 빼고 소나무만 넣은 작품도 있다.
13가지의 요소가 있는 그림을 ‘열 가지 장생하는 요소를 담은 그림’이라고 해석하여 ‘십장생도(十長生圖)’라고 부르는 것은 뭔가 맞지 않다. 하지만 ‘십장생도(十長生圖)’에서 10(十)은 사물의 개수를 뜻하는 숫자가 아니라 ‘완성, 완결’을 의미하는 상징 언어이다.
‘백수백복(百壽百福)’, ‘백록(百鹿)’의 백(百)도 숫자가 아니라 ‘완벽한, 완성된, 더할 나위 없는, 풍성한, 아주 많은’의 의미를 가진 상징 언어이다.
그러니까 ‘십장생도(十長生圖)’는 ‘완성된 장생도’, 혹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장생도’라는 뜻이다. 이것을 인문학적으로 풀이하면, ‘완벽한 이상세계’가 된다.
인간이 상상하고 구현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보다 더 나은 이상세계는 없다.
조선이 망한 후에는 모란, 원추리와 같은 꽃이 결합하기도 하고 봉황, 기린, 용 따위의 상상의 동물이 사슴이나 학을 대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작품은 장생도와 같은 궁중회화를 도교적으로 해석한 민화의 영향 때문이다. 완벽한 장생도에 여러 다른 요소를 넣으면 완벽성이 흐트러지거나 훼손된다. 이것은 조선의 이상적 가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그림은 궁중회화 형식을 차용한 민화라고 보아야 한다.

민화에서는 십장생도를 ‘불로장생, 부귀영화’의 도교적으로 해석한다.
복숭아나무, 거북, 영지 따위는 불로장수의 의미로 해석하고 학과 사슴은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본다. 하지만 나머지 해, 하늘, 구름, 산, 바다 따위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불로장수, 부귀영화’와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해나 구름처럼 오래 사세요’, ‘산과 바다처럼 부귀영화를 누리세요’라는 말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의 핵심 요소에 인간의 욕망을 투영시킨 상징은 없다. 다만, ‘하늘과 바다처럼 넓은 마음’, ‘구름과 같은 정처 없는 인생’, ‘태양과 같은 열정’ 따위의 비유는 가능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십장생도에서 도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요소는 절반도 되지 않고 특히 장수(長壽)와 관련된 것은 서너 가지에 지나지 않은데 ‘장수하는 그림’이라고 우기는 것은 무지한 탓이다.
하지만 십장생도를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로 수용한 상태에서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장수와 부귀’를 활용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다. 어려운 궁중회화의 내용을 대중들이 이해하는 언어로 쉽게 풀어내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도교의 ‘장수와 부귀’와 달리 장생도를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라는 인문학적 내용과 조형적 형식으로 보면 모든 요소가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이 중에서 해(日)와 하늘에 대해 살펴보자.
장생도에는 해가 빠짐없이 그려져 있다. 해가 빠진 장생도는 장생도가 아니다. 조선의 왕을 상징하는 ‘오봉도’에는 두 개의 해가 그려질 만큼 중요하다.
태양은 지구생태계에 속한 모든 생명의 시작이자 끝이다.
지구라는 행성은 태양에 의해 탄생되었고 태양에 의해 존재한다. 지구가 없는 태양은 존재하지만 태양이 없는 지구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문명은 태양과 관련한 숱한 신화를 가지고 있고 태양 그 자체를 창조신으로 여긴다. 태양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냥 모든 것이다.
태양은 눈에 보이는 존재이지만 인식되지 않는 존재이다. 인간의 인식수준으로는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양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장생도라는 그림에 국한시켜 본다면 해의 표현은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라는 내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요소이다. 나머지 12가지 요소를 아무리 강조해도 해의 존재감을 당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장생도의 해가 조선의 왕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오봉도]에 표현된 두 개의 해를 부정하고 해와 달로 규정하는 오류에서 나온다. 이렇게 해는 왕을 상징하고 달은 왕비를 상징한다는 논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다. 조선시대에는 해와 왕을 동일시 여기는 사상과 문화는 없다. 가끔 왕을 해의 찬란함에 비유했던 아첨꾼은 있었다.

▲ 서양화법의 기초는 원근법과 명암법이다. 이 조형적 원리를 이용하면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 또한 명암법은 사물에 붙어있는 고정된 상징이나 설명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사물을 창조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다.
이렇게 원근투시법과 명암법을 활용하여 과거, 미래를 포함한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시공간을 창조한다. [자료사진 - 심규섭]

우리민족을 대표하는 그림인 장생도에는 해가 그려져 있지만 서양화에는 해를 그리지 않는다.
어릴 적 학교 선생님은 그림에 해를 그리지 말라고 했다. 확실히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에는 해를 그리지만 10대가 넘어서면 해를 그리지 않는다.
그림에서의 해는 조형적으로 시공간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아이들이 해를 그리는 것은 낮이라는 시간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또한 낮 시간대에 존재하는 공간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만약 밤이라면 해를 그리지 않고 어둡게 배경을 칠하거나 달을 그린다.
시간과 공간은 한 몸처럼 붙어있다. 시간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시간을 채운다. 그래서 ‘시공간’이란 말처럼 함께 붙여 쓴다.
서양화법에서 해를 그리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중세 종교화나 그리스로마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에서도 해는 표현되지 않는다. 서구 중세 종교화에서의 해는 곧 예수, 성모 마리아, 천사와 같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머리에 둥근 모양의 아우라는 해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빛으로 해를 대신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각각의 신은 모두 해와 동격이거나 그 아래다. 아폴로가 태양의 신인 것처럼 그리스로마 신은 곧 해를 상징하기 때문에 굳이 따로 해를 그릴 필요가 없었다.

특히 르네상스의 인본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해는 종교와 신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신과 대적하여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높이려는 인본주의는 신의 상징인 해를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해가 표현된 시공간은 신이 개입하는 시공간이 된다.
해가 신의 관점으로 창조한 시공간이라면 인간의 관점에서는 ‘일인칭 원근법’과 ‘명암(明暗)법’으로 시공간을 창조한다.
서양화법은 르네상스 시대에 일인칭 원근법과 명암법에 의해 완성된다.
일인칭 원근법은 시공간을 창조하지만 그 중에서도 공간의 비중이 높다.
명암법도 시공간을 창조하지만 시간의 비중이 크다.
사람이 인식하는 세계는 모두 빛에 의해 생기지만 사물에 투영된 빛은 명암으로 바뀐다. 사물의 굴곡이나 요철에 따라 밝음과 어둠의 정도가 바뀌고, 바로 이런 밝음과 어둠의 조합에 따라 사물의 형태와 질감과 입체감이 드러낸다.
사물에 명암을 주지 않고 그리는 것은 사물을 설명하는데 적격이다. 사물에 붙어있는 상징을 최대한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실제 붙어있었던 명암을 제거하여 표현하는 방법은 이집트 벽화, 고구려 고분벽화처럼 오래되고 전형적인 방식이다. 명암이 제거된 사물은 형태를 고정시키기 위해 선묘라는 방식을 사용한다. 실제 사물에는 없는 외곽선을 그리는 것이다.
이것은 신의 관점을 투영시킨 시공간을 만들기 위함이다. 명암은 시간에 따라 변하여 사물의 형태를 무너트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신이 절대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신의 관점으로 만들어진 시공간, 사물 따위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이 고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의미로 수용할 수 있다. 개개인의 특성이 개입하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인간의 관점이 투영된 일인칭 원근법은 각각의 개인이 보는 세상이고 명암법은 시간이나 배경에 따라 사물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특성이 있다.
실제 서양화법에서는 형태를 선묘형태(스케치)로 그린다. 하지만 명암이 들어가는 순간 선묘는 사라지고 오로지 밝음과 어둠으로만 이루어진 사물이 재탄생한다. 선묘로 만든 형태와 명암법에 의해 구현된 형태는 전혀 다르다. 선묘로 이루어진 형태가 사물을 설명하는 방식이라면 명암법에 의해 이루어진 형태는 공간(배경)과 결합하면서 추상화된다.
이렇게 명암법에 의해 창조되는 사물은 입체감과 존재감이 높아지고 극대화된다.
해를 그리면 해에 의해 사물의 존재가 결정된다. 하지만 해를 그리지 않으면 명암법을 사용해 사물에 고정된 신의 상징을 떼어내고 흩트릴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사물의 형태나 모양, 무게, 질감 따위를 인간의 의지에 맞게 재창조할 수 있다. 인간의 관점에 맞는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또한 사물에 인위적으로 투영한 명암의 상태에 따라 보이지 않는 해의 위치가 결정되는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낸다.
인간은 해와 빛을 부정하지 않지만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높이기 위해 명암법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 좌측-정홍래/욱일취도/118.2*60.9/견본채색/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측-겸재 정선 <문암에서 해맞이를 보다(門岩觀日出)> 비단에 채색 25.5 x 33.0cm (간송미술관 소장).
모두 아침 해를 그렸다. 하지만 위 그림의 아침 해는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붉은 마음, 즉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단심(丹心)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미학적 가치를 그림에 담은 수묵화에 해가 표현된 그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홍래의 [욱일취도旭日鷲圖]이다. 욱일취도는 바다 위의 작은 바위에 앉은 독수리가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여기서 아침 해는 한 조각 붉은 마음인 ‘단심丹心’을 상징하고 독수리는 선비의 의인화이다. 이 그림은 매화와 참새, 혹은 매화와 달을 그린 [월매도月梅圖]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넘실거리는 파도 위에 홀로 떠있는 바위섬은 선비의 어려운 처지와 환경을 뜻하고 아침 해는 지조와 절개를 향한 꺾이지 않는 마음의 상징이다.
어떤 사람은 아침 해를 조정(朝廷)이나 왕의 상징이라고 보기도 한다. 조정이나 왕은 국가를 상징한다. 결국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알아주는 것은 국가나 조정을 대표하는 왕일수도 있다.
조선(朝鮮)은 나라의 국명인데, ‘깨끗하고 선명한 아침 해가 뜨는 나라’라는 뜻이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해석하는데 상당히 부정적이고 자해적이다. 이것 때문에 조선은 졸지에 은둔의 나라가 되어 버렸다. 차라리 ‘해가 뜨는 신성한 나라’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다.
조정(朝廷)은 나라의 정치를 의논하고 집행하는 곳이다. 여기에도 아침이란 글자가 들어가 있다. 아침 일찍 모여 국사를 논했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조선(朝鮮)과 조정(朝廷)은 모두 해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고 해가 조선이나 조정의 상징은 아니다. 왕이나 국가를 해에 비유할 수는 있어도 상징이 된 경우는 없었다.

▲ 십장생도에 표현된 해의 모습이다. 여기서 그려진 해는 아침 해이고 시간을 나타낸다. 이것은 곧 생명의 영속적 순환을 통해 생명의 풍부함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해가 표현되어 있는 궁중회화는 십장생도가 유일하다. 해학반도도, 오봉도에도 해가 표현되어 있지만 모두 장생도의 변주에 속한다.
얼핏, 장생도에 그려진 해가 조선을 상징한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장생도는 조선에만 있었던 그림이 아니다. 중국과 일본에도 장생도나 해학반도도가 있다. 중국과 일본의 장생도는 철저히 도교적으로 이해되고 수용된다. 하지만 우리의 장생도는 도교를 넘어 유학적 이상가치를 담은 십장생도를 통해 완성되었을 뿐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장생도에 표현되어 있는 해가 중국의 황제나 일본의 천황을 상징하지 않듯이 십장생도에 표현되어 있는 해가 조선이란 나라나 왕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장생도에는 그려진 해는 붉은 색이다.
여기서 붉은 색의 해는 수묵화의 ‘단심(丹心)’이 아니라 물리학적인 시간,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을 뜻한다. 그러니까 붉은 해는 아침 해, 혹은 떠오르는 해를 뜻한다.
장생도의 각 요소들은 특별한 시간을 드러내지 않는다.
십장생도의 13가지 요소 중에서 유일하게 시간의 개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해 뿐이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것은 하루의 시작이자 생명활동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은 생명활동의 최고점이라는 의미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아침 해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 즉 생명의 순환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의 시간개념은 서양의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라는 직선적 개념과 달리 시작과 끝은 서로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전제이다.
흔히 ‘죽는다.’는 것을 우리는 ‘돌아간다.’라고 표현한다. ‘돌아간다.’는 것은 원래의 출발 자리로 환원한다는 말이다.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십장생도에는 뭇 생명의 존엄과 풍부함이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모든 생명은 탄생과 소멸이라는 자연법칙을 벗어나지 못한다. 생명력이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늙음, 죽음, 소멸이라는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자연법칙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아니 자연의 원리에 부합하면서 생명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앞 세대와 현 세대, 다음 세대로 연결되는 생명의 고리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하여 표현하는 확대원근법이라는 조형적 원리에도 잘 부합한다.
해는 생명의 근원이고 절대적이고 무한한 그 어떤 존재이다.
해는 ‘생명’이고 아침 해는 ‘생명의 무한한 순환’을 통한 ‘생명의 영속성’을 뜻한다.

참고로, 장생도의 붉은 색 해는 아침을 뜻하지만 그림은 사물이 훤히 보이는 낮이다. 하나의 화면에 아침과 낮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시공간을 뒤섞는 확대원근법의 원리가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장생도에는 해에 노란색 띠를 둘린 표현이 있다. 이것은 해를 배경 하늘과 선명하게 구분하기 위한 방편이자 금색으로 장식을 한 것이다. 금색 따위로 장식을 하지 않아도 아침 해의 상징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다만 현대적으로 변주한 장생도의 경우, 일본의 국기와 구분하기 위한 장치로 노란색 띠를 두르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하늘’의 상징은 뭘까?
해를 그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늘이 표현되어야 한다. 실제 하늘은 장생도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늘은 붉거나 누런색이나 짙은 푸른색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표현이 어떠하든 ‘하늘’에 대해서는 입을 닫아야 한다.
‘하늘’에 대한 그 어떤 문제나 논쟁, 설명도 해서는 안 된다. 조선의 유학에서 하늘에 대한 어떤 설명이나 논쟁을 한 기록은 없다.
하늘을 해석하면 곧 신(神)의 개념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유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지 신에 대한, 혹은 신과 인간에 대한 학문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