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총련 방문단원 민남채씨(종합)
2000-09-23 연합뉴스
다음은 일문 일답.
-- 일본에 징용으로 가신분들이 많다는데.
▲내 경우는 아니다. 나는 세 살때인 1926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부잣집 머슴 살이를 하던 아버지는 생계를 이을 수 없어 일본행을 택했다. 아버지 나이 23살때였다.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있다 아버지가 자리를 잡아 어머니와 나, 그리고 형님 등 식구들을 데리고 갔다.
-- 일본에서의 생활은.
▲아버지는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굴뚝공사장, 도로공사장, 건물 토목 공사장 등 이곳 저곳을 따라 다니느라 나는 소학교 6년간 거의 매년 이사를 다녀야했다. 힘들었다.
-- 총련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23살때인가 해방을 맞았다. 돌아올 생각도 들었지만 당시 우리 또래들은 독립국가 청년으로서 공부를 더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있었다. 나라에 유익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국하는 대신 도쿄(東京)로 갔다.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공부했고 `단체`(조련.총련의 전신)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 남쪽이 고향이면서 총련과 인연을 맺는데 대한 갈등은 없었는지.
▲남이고 북이고 구분할 이유가 없다. 특히 공화국(북한)은 당시 동포들에 대한 `공민권`을 인정했고 문호를 개방했으며 민법이나 호적법 등에서 동포들을 감싸 안았다. 반면에 남측은 동포들을 포용하지 못했다.
-- 이후 지금까지의 생활은.
▲해방 후 55년간은 `창살 없는 감옥 생활` 그 자체였다. 일본의 공화국(북한)적대시정책으로 조선적을 갖고 있는 우리 동포들은 철저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으며 각종의 불이익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난민`(難民) 생활로 이해하면 적절할 것이다.
-- 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최근 17년간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조선사람을 조선사람 답게 키워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일본 전국에 256개의 초중고급학교가 있는데 이들 학교에서 조선 예절과 조선 풍습, 조선어를 배울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정년퇴임 후에도 이곳 저곳 다니며 강연도 하고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고 있다.
-- 민단측의 회유도 많았을텐데.
▲민단 가입을 권유받기도 하고 때로는 국적을 바꾸면 고향에 보내준다는 회유도 받았다. 이는 일본 정부의 `반공화국정책`과 함께 총련 동포들이 더 단합하는 이유가 됐다.
-- 지금은 총련과 민단의 관계가 호전되고 있는데.
▲민단과의 단합을 위해 무척 노력하고 있다. 지난달 24일 협력을 위한 공동기구 설치를 제안하는 등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연합2000/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