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희 환(인천도시공공성연대 사람과터전 공동대표)


이제 얼마 후면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꼭 62년이 된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이 전쟁은 학계에서조차 ‘6.25전쟁’과 ‘한국전쟁’ 등 명칭을 둘러싸고도 극명한 시각차를 노정하고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인 것이다. 전선이 남에서 북까지 두 차례나 오가며 전 국토, 모든 도시가 전란의 화를 입지 않은 곳이 없지만, ‘황해의 배꼽’에 위치한 인천, 38선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인천은 해상과 육상, 심지어 하늘을 통해서도 엄청난 참화를 겪었다.

한국전쟁은 우선 인천의 도시공간과 물적 기반을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자 미군은 작전수행중인 동부전선과 인천 지역을 집중 폭격하였다. 8월 5일 아침 미군 항공기 편대가 인천시의 신생동, 사동, 관동, 중앙동의 주택지대에 포탄을 퍼부어 주택과 학교, 병원, 극장, 교회를 파괴하고 저공비행으로 시가지에 소이탄을 무수히 투하하면서 인천도 전화를 입기 시작하였다.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 부대가 인천에 들어온 7월 4일 이후 미군의 폭격은 더욱 심해져 상인천역 일대와 송현동 빈민촌의 초가집들, 신생동, 답동 등지의 수백 호 가옥이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하였다. 8월 21일과 24일에는 대규모의 함포사격이 인천시가에 가해졌으며, 8월 27일에는 선혜중학교와 박문초등학교에 폭탄이 투하되어 축지인쇄소, 연극동맹회관, 교회 등 잿더미로 변하였다.

한국전쟁의 전세를 일거에 바꾼 9.15인천상륙작전의 빛나는 전공은 그러나 인천과 시민들의 커다란 희생이 바탕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9월 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자 인천 앞바다를 가득 메운 미 해군 군함에서 발사된 엄청난 함포의 포탄은 월미도와 인천시가지를 잿더미로 만들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은 비단 도시의 물적 파괴뿐만 아니라 엄청난 인명 피해를 초래하였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다. 피아간 국인의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특히 민간인 희생자가 얼마나 발생했는지 현재까지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행정구역상 강화군을 포함하고 있는 오늘날의 인천광역시 지역은 38선에 인접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상을 통해서도 다양한 형태의 접전이 벌어진 지역이었으며, 1.4후퇴 이후 1953년 정전협정에 이르기까지 접전지역이었던 까닭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 민간인 학살이 매 시기마다 다양한 양상으로 벌어졌지만, 그 끔찍했던 전쟁의 악몽은 영영 망각되는 듯했다. 그러나 2006년 과거사청산의 기치를 내걸고 최초로 출범한 정부기구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로 약칭)는 인천지역에서 벌어진 민간인에 대한 집단희생사건의 진실 일부를 역사 앞에 밝혔다.

제일 먼저 2008년 3월 진실규명된 인천지역 사건은 1950년 9.15인천상륙작전 직전 월미도 원주민마을에 가해진 <월미도 미군폭격사건>이다. 1950년 9월 10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의 사전작전으로 미군 해병대 함재기들은 월미도 원주민 어촌마을을 무차별 네이팜탄 폭격을 가하였다. 해방 직후 미군부대가 월미도에 진주했었기에 미군은 월미도 어촌마을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월미산에 위치한 인민군의 은폐·엄폐물을 없애기 위해 기름덩어리 네이팜탄을 무차별로 퍼부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확인된 원주민 100여 명이 죽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주민과 유족들은 속옷바람에 고향마을을 버리고 갯벌을 기어 나와 인천항의 소금창고 옆에 천막을 짓고 이후 60년간 고단한 삶을 살아왔지만 아직도 귀향하지 못하고 있다.

9.15인천상륙작전의 와중에 일어난 월미도 미군폭격사건에 이어 두 번째로 진실규명된 인천사건은 1.4후퇴 때 강화에서 일어난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집단학살사건이다. 강화 갑곶나루터에서 강화향토방위특공대가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 430명 이상을 집단학살한 <강화지역 민간인희생사건>이 2008년 7월에 진실이 규명된 데 이어 2009년 3월에는 강화 교동도에서 벌어진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 183명이 집단학살 된 <교동도 민간인희생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진실화해위는 위원회 활동 종료를 앞둔 2010년 5월에도 인천지역에서 벌어진 민간인희생사건에 대한 두 가지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 하나는 인천형무소와 소년형무소를 비롯한 <중부지역 형무소 재소자희생사건>인데, 신청자의 증언만 있을 뿐 이를 입증해줄 문서자료가 존재하지 않아 진실규명 불능사건으로 처리되었다. 또 다른 사건은 2010년 6월 8일자로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진 <서울.인천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희생사건>인데, 서울과 인천에서 벌어진 21개의 개별사건을 포괄하여 작성되었다. 한국 해군이 인천상륙작전 수행을 위한 배후지로 영흥도와 덕적도에 주둔하면서 일어난 섬지역 집단희생사건의 실체가 부분적으로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벌어진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학살이 1950년 6월 말에 인천지역에서 최초로 벌어졌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러나 이들 사건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은 1·4후퇴 이후 간석동의 민간에서 일어난 일가족 학살사건이다. 캐나다에 거주하는 유족이 신청하여 진실규명결정이 내려진 이 사건은 1951년 2월 12일경 육군 중위와 그의 부하 1명이 난사한 총에 간석동 집에 모여 있던 일가족 17명(어린이 10명, 부녀자 4명, 노인 3명)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문서를 통해 밝혔다. 사건 직후 군법회의에서 무고한 민간인 일가족을 학살한 사실이 밝혀져 가해자인 중위에게는 사형판결이 내려졌으나 국가는 유족들에 대해서는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학살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일가족은 고국을 몰래 떠나 캐나다로 이민한 채 피멍이 든 가슴을 부여잡고 살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인천경찰서에 구금된 우익인사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사건을 비롯하여 인민군이 저지른 학살사건들도 인천지역에서 여러 차례 일어났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인천시사』를 비롯한 여러 공간자료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이 가슴 아픈 사건들, 60년이 다 되어 이제 영영 잊고 싶은 사건들을 새삼 이 푸른 5월에 다시 떠올리는 이유는 단 하나다. 우리는 아직도 온전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준전시상태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이 땅에서 같은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가 죽고 죽이는 어리석은 만행을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된다.

전쟁이 발발한 지 어언 62년이 되어 이제는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유족들도 얼마 남지 않은 채 많은 사람들의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떠났어도 한국전쟁이 남긴 전쟁의 상처는 인천의 도시공간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승전의 논리로 한국전쟁을 기념하는 호전적 전쟁기념물로 채워져 있다.

인천의 역사적 시원인 문학산, 문학산성이 있던 정상부엔 미사일부대가 진주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미군부대가 진주한 이후로 주변이 도심부로 편입된 오늘날까지도 군사적인 이유를 들어 군부대가 진주할 뿐만 아니라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문학산과 마주보는 인천의 읍주산인 승학산에는 예비군훈련부대가 역시 똬리를 틀고 앉아 시시때때로 M16소총 사격소리로 도시의 평화를 균열내고 있다. 인천의 근대역사를 지켜본 월미도는 전란시에는 군사적 요충지로 변했다가 평화시에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변신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였지만, 2001년 해군부대가 나간 이후 월미공원이 조성되고 나서도 휴전상태의 한반도 상황을 반영하듯 <해군주둔기념비>와 <북파공작원추모비> 같은 전쟁기념물만 계속 들어차고 있다. 심지어 인천상륙작전기념공원을 조성하고 9월 15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자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반면에 2004년부터 월미도 원주민과 유족들이 공원 정문에서 농성천막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부평 또한 한국전쟁의 상처가 자심한 곳이다. 부평도 전쟁의 상처가 도시공간에 뚜렷한 곳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 이후 적산(敵産)이 된 부평조병창은 9월 8일 인천항으로 상륙한 미군에 의해 접수되었다. 미군 제24군수지원단, 즉 주한미육군병참본부(Army Support Command Korea)가 이곳을 접수하여 진주하니, 이후 부평은 미군들에 의해 애스컴시티(Ascom City)로 불렸다. 애스컴이 캠프마켓(Camp Market)으로 바뀐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서, 대다수 미군들이 철수한 이후 부평 미군부대는 반환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미군부대가 반환되더라도 그들이 남긴 엄청난 환경오염은 두고두고 고통을 남길 것이다.

강화지역은 접경지역인 까닭에 그 어느 곳보다 전쟁이 남긴 상흔이 심하다. 아직도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강화 민통선 지역의 살풍경한 풍경도 풍경이지만, 어렵게 만든 ‘강화민간인학살추모비’를 그 누군가 고의적으로 훼손한 최근의 사태만 보더라도, 강화는 아직도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이미 두 세대 전에 일어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은 오늘날까지도 인천의 도시공간 곳곳의 전쟁의 상처를 덧내는 전쟁기념물로 가득 차 있다. 전쟁기념물이 보여주는 것은 60년 전의 죽고 죽이는 승전논리에서 아직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의 평화단체인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이 기획하여 문학산, 월미도, 부평미군부대, 강화도를 시민들과 함께 ‘인천평화발자국’ 순례길에 나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60여 년 전,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던 도시 인천, 21세기 국제도시 인천이 간직하고 있는 전쟁의 상처를 걷고 느끼면서 체험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2010년 3월 인천 백령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천안함 침몰사건과 11월의 연평도 포격사건을 경험하였다. 남북 분단의 결절에 해당하는 인천과 인천 앞바다는 언제든지 전쟁터로 변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포성 자욱한 의식과 감성의 극한 대치로 치닫게 하고야 만다.

이제 우리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남·북의 대치를 종식시키고 인천이 반공도시가 아닌 남북화해의 중핵도시, 평화도시로 거듭나게 하는 일인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북한 핵문제를 포함한 모든 군사적 대결을 해소하고 그리하여 한국전쟁을 근본적으로 종전시켜서 연평해전이나 비극적인 천안함 침몰사건, 연평도 포격사건 같은 일이 더 이상 인천 앞바다에서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도 반공도시 인천이 형성되고 굴절되어온 역사적 맥락을 깊이 성찰할 필요가 절실하다. 문학산, 월미도, 부평, 강화도를 걸으면서 시민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인천평화발자국> 순례길이 비록 소박하나마 함께 내딛는 평화의 첫걸음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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