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정신


사람이 늙고 병들어 간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젊었을 때 넘쳐나던 기운과 열정은 사라지고 앙상한 고집과 과거에 대한 집착만 남는다. 주변에는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을 한탄하는 친구가 많다. 학창시절 야생마같이 질주하고 쇳덩이도 씹어먹을 만큼 강하게 창작의 열정을 불태우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삶의 에너지가 충만한 사람은 창조적인 생각과 행동을 한다. 또한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자신의 주장을 편다. 언제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자신을 표현할 줄 알며 사회관계를 능동적으로 개척한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가 늙고 병든 몸으로 `창조! 창조!`를 외치는 광고는 삶의 에너지가 충만한 사람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것을 청년정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람이 가진 열정은 무한하지 않다. 흔히 기(氣)라고 부르기도 하고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해 `생체에너지`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삶의 에너지는 다른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사용하면 없어지고 다른 형태로 바뀌기도 하는 물질의 원리에 따른다. 이 에너지는 사람이 성숙하면서 10~20대에 절정을 이루다가 서서히 소멸해 간다. 젊었을 때는 삶의 에너지가 충만하지만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 낭비하고, 나이가 들면 사용방법을 알아도 쓸 에너지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은 젊음을 선호한다. 어쩌면 젊었을 때의 무한한 창조의 에너지를 동경하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머리를 염색하고, 젊은이들의 패션과 문화를 따라하고, 살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에 많은 시간과 돈을 소모한다. 영화, 섹스, 스포츠, 종교 따위에 몰입하면서 사람들은 에너지를 구한다. 어떤 사람은 원조매춘을 통해 어린 청춘의 에너지를 흡정귀처럼 빨아먹는다. 남자가 여자의 에너지를 착취하고, 권력과 돈 많은 사람들이 서민들의 에너지를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자기정화를 거치지 못한 천박한 에너지는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고, 자신도 소모되는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한다. 마치 마약이 가져다주는 에너지와 다를 바 없다.

올바른 삶의 에너지는 사실 나이와 별 관계가 없다. 나이가 들면서 에너지가 없어지는 것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성숙의 문제이다. 사람이 성숙하고 발전하면 훨씬 좋고 아름다운 삶의 에너지가 충만해진다. 세상의 이치를 알고 인간의 존엄을 앞세우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능력은 나이든 사람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 삶의 에너지가 충만한 사람은 예수나 석가모니 같은 성인들이다. 명상과 자기정화를 통해 만들어지고 충만해진 에너지는 자신을 해방시키고 다른 이의 삶과 나누어도 마르지 않는다. 지금의 종교가 타락하는 것은 예수와 석가모니의 삶을 따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명상과 단전호흡, 혹은 수련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과 사회와의 관계를 만들지 못하기에 일회성으로 끝난다. 우리나라에 `도인`들이 그렇게 많지만, 이들로 인해 민주주의가 진전되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미술은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삶의 에너지를 만드는 공장이다. 예술의 본성은 창조하고, 표현하며, 시도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을 배운다. 처음 예술을 접하는 사람은 솟아나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 방종과 치기를 일삼는다. 그래서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세상 사람들을 모두 소외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예술의 에너지를 통제하고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은 차가운 이성과 사회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존중에서 나온다. 많은 에너지와 창조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미술을 포기하는 친구들의 경우는 대부분 자신의 에너지를 감당하고 운용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이 충만한 사회는 늙지 않는다. 흰머리가 나고 주름이 생기는 육체적인 늙음이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몸이 늙어도 정신이 젊으면 청년이다.
세상을 창조적으로 바꾸는 사람은 삶의 에너지가 충만한 청년들이다.



무명화가의 연습작품


▶작가미상/처녀들/조선화/162*94

이번 그림은 작가를 알 수 없는 조선화 작품이다. <처녀들>이라고 붙어있는 이 작품의 제목도 작가가 지은 것인지 아니면 전시기획자가 임의로 지은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이 작품은 `6.15 공동선언 1주년 기념 북한미술특별전`에 전시된 작품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몇 점  안 되는 `생활주제화`이다.

작품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앞에는 가방과 꽃다발을 들고 밝은 웃음으로 걸어가는 처녀들이 그려져 있고 배경에는 공장이 있다. 처녀들의 옷차림이 교복인걸로 봐서 신분은 대학생처럼 보인다. 공장, 가방, 꽃다발, 교복 따위의 소재를 결합해서 내용을 유추해보면 대학생이 방학이나 아니면 특별한 기간에 노동지원을 하러 공장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 식으로 보자면 `공장봉사활동`과 비슷할 것이다. 여대생들이 공장노동지원을 환영하는 행사가 있었을 것이고, 행사를 끝낸 여대생들이 기쁜 마음으로 공장으로 들어오고 공장노동자들이 손을 들어 환영하고 있다. 대학생이 교복을 입는 것이 무척 흥미롭고, 배낭가방을 맨 것이나 다양한 신발도 정감이 간다.

작가는 공장노동지원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여대생의 모습을 통해 노동의 신성함을 표현하고 지식인과 노동자의 간격을 없애고자 의도했을 것이다. 우리의 지식인은 으레 사무직을 선호하고 기름 냄새나는 현장노동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점에서 사회주의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은 북한의 미술전람회에서 낙선한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미대생이나 창작사의 초보 회원이 그린 연습작품에 가깝다. 전람회에 출품하는 작품에 제작연도와 작가의 서명이 없을 수 있겠는가. 또한 전람회에 출품할 정도로 작품의 수준이 높지 않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다.

이 작품에 나타난 기량의 미숙함을 찾아보자. 먼저는 인물의 소묘능력이다. 여기에 표현된 인물은 기초적인 인체비례나 앞사람과 뒷사람의 원근에 따른 크기조절이 되어있지 않다. 머리크기에 비해 상체가 짧고, 하체가 너무 길게 표현된 인물도 있고, 전체 몸에 비해 팔이 길게 표현되기도 했다. 인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원근투시법에 맞지 않는 구석이 많이 보인다. 중앙에 배치된 가방 든 여성과 앞치마를 두른 여성 사이에 그려진 인물의 표현은 매우 어색하다. 여기에 얼굴 표정의 경직성, 걸음걸이의 부자연스러움이 결합하여 전체적으로 어설픈 느낌을 준다.

미술에 있어 인물의 정확한 소묘는 기본에 속한다. 기본이라고 해서 쉽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작가는 미술에 있어 `기본기가 전부다`라고 단언할 만큼 중요하다. 또한 기본기는 지루한 반복과 오랜 시간이 걸려서 만들어진다. 개인적으로 소묘에 대한 철저한 기본기는 이성적인 힘을 키우고 표현에 대한 자신감과 지구력을 키워준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화가가 화가일 수 있는 정말 필요한 밑바탕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좋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오랜 습작과정이 필요하다. 이 습작과정은 그야말로 실패의 연속이다. 그래서 실패를 두려워하면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이 작품을 그린 미대생이거나 혹은 젊은 화가지망생은 나름대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화면구성이나 소묘가 어설프긴 하지만 주제를 포착하는 능력도 좋고, 여러 인물을 표현하고자 하는 대담성도 돋보인다.
언젠가 이름을 뚜렷이 밝히고 당당히 작품을 내보일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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