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미국이 오랜만에 ‘새로운’ 합의에 도달했다. 북·미는 지난 2월 23, 24일 중국 베이징에서 진행된 3차 고위급 대화 결과를 2월 29일 오후 11시에 동시 발표했다. 이번 ‘2.29합의’의 요지는 이렇다. 북한은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 영변 우라늄 농축(UEP) 활동을 임시 중단하고, 우라늄 농축 중단을 검증·감시하기 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관계자들의 입국을 허용하기로 했다. 미국은 24만 톤의 영양식품을 북한에 제공하고, 추가 식량지원 검토와 양자관계 증진 노력 등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북·미는 현재 가동 중인 뉴욕채널을 통해 북미회담 후속 조치를 논의하게 된다. 북·미가 지난해 7월 뉴욕에서 시작된 고위급 회담을 통해 이번에 ‘의미 있는 결실’을 이룸으로써 2008년 12월부터 중단된 채 3년 넘게 공전하고 있던 6자회담이, 그 재개 가능성까지 기대하게 됐다.

북·미는 지난 1990년대 초 처음으로 고위급 회담을 시작한 이래 이제까지 적지 않은 합의문을 내왔다. 북미기본합의서(1994), 북미공동코뮤니케(2000) 그리고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2005)과 2.13합의(2007) 등이 그것이다. 북·미는 이처럼 양자 또는 다자협의를 통해 양국 관계정상화와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등 거시적인 것에서부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동시행동을 담은 미시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의미 있는 합의를 이뤄왔다. 이렇게 보면 이번 합의 내용은 그 내용과 수준이 그리 높지는 않다. 그렇다고 전혀 폄훼할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2.29합의의 가장 큰 의미는 새롭게 들어선 북한 ‘김정은 시대’에서 북·미가 최초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두 나라가 첫 단추를 잘 끼웠다는 의미다. 이로써 새로운 출발이 가능해졌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이번 합의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작은 첫걸음”이라고 말한 것도 이 점을 뒷받침해 준다.

물론 북·미가 새로운 출발 지점에 서 있고, 올바른 방향을 잡았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일거에 풀린 것은 아니다. 북·미는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양국관계에서 진퇴와 부침이 심했다. 그 이유는 양자가 본질적으로 ‘적대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적대관계 해소를 위해 합의했던 무언가가 파기되면 양국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새로운 합의를 하곤 했는데 이때 늘 제기되는 것이 ‘신뢰구축’ 문제였다. 그만큼 두 나라의 뿌리 깊은 적대관계 탓도 있겠지만, 끊어졌다 이어지는 과정에서 양국의 역관계가 변화해 왔기 때문이다. 이번 2.29합의에서도 두 나라는 신뢰구축 단계에 서 있다. 이제 두 나라는 그 단계를 시험하게 될 것이다. 먼저, 북·미는 뉴욕 채널 등을 통해 UEP 가동중단 방식과 IAEA 사찰단 문제 그리고 24만 톤에 달하는 대북식량 지원 시기문제 등 세부현안을 조율할 것으로 보인다. 이어, 북한 6자회담 수석대표인 리용호 외무성 부상이 7, 8일 방미할 것으로 알려져 북·미 당국자가 협상을 진행할 가능성도 있다. 이들 신뢰구축 문제가 풀린다면 그 다음 수순으로 6자회담 재개와 평화협정 회담이 기다릴 것이다.

문제는 남한이다. 남한은 원하든 원치 않든 새로운 출발점에 선 북한과 미국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축하를 해줘야 할 판이다. 현재의 모양새는 북한에 대해 남한은 문을 닫고 있는 데 미국이 먼저 문을 열었다는 점이다. 자동적으로 통미봉남(通美封南)이 된 셈이다. 우려할 만한 상황이 온 것이다. 물론 이번 합의를 이끌어낸 데이비스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지난달 25일 “베이징 접촉에서 북측에 남북관계 개선 없이 근본적인 북·미관계 개선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안심 놓을 계제가 아니다. 모든 일에는 관성이 있기 마련이다. 북·미관계가 진행되면 될수록 미국은 북한과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미국이 남한을 고려할 시기를 놓쳐 버릴 수도 있다. 남한만 외톨이가 된다는 것이다. 이제 남한이 북한에 대해 기존의 대북 강경책을 가시적으로 바꾸겠다는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 지난 2월 2일 북한 국방위원회 정책국이 남한 당국에 보낸 9개항의 공개질문장에 대한 답이 그것이다. 가장 시급하고 쉬운 것부터 답변하고 나머지는 남북이 만나면서 대화를 통해 푸는 형식을 취하면 될 것이다. 늦었지만 남한도 남북관계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무언가 액션을 취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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