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해병대가 2월 20일 오전 백령도와 연평도 등 서북도서 지역에서 사격훈련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북한군 전선서부지구사령부가 서해 5도 일대에서 군사적 도발이 시작되면 무자비한 대응타격이 개시될 것이라면서 해당 지역 남한주민들이 안전지대로 미리 대피하라고 ‘통보’했다. 당장 군사적 충돌이 가능한 상황이다. 왜 남북한은 이렇게 속절없이 싸우고만 있어야 하나? 우리 주변 국가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중장기적인 전략적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는데, 우리는 민족의 자부심과 희망을 잃은 채 무엇을 하고 있나?

대내정치에서의 정답은 분열이 아닌 ‘통합’이고, 대외정치에서는 전쟁이 아닌 ‘평화’가 정답이다. 지금이 언제인데 우리가 아직도 전쟁의 유령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참담한 현실은 정치의 정답을 거부한 남북 정치지도자들이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다. 남북한 주민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엄중한 상황에서 남북한 정부가 당장 긴장완화의 조치들을 취하지 않는 것은 ‘민족의 희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민족화해, 평화정착, 그리고 통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면서 민족의 희망을 세웠던 때가 언제던가. 비록 우리가 처한 현실은 참담하지만, 우리들과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민족의 희망을 세우는 노력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천만다행히도 우리에게는 본격적으로 민족의 희망을 세웠던 김대중 대통령의 생각과 전략이 자산으로 남아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1991년 소련 멸망으로 냉전시대가 끝나고 일정한 과도기를 거치고 있던 당시, 강대국 간에 형성되어가는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에 대응하는 우리민족의 전략을 확고히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한 전략적 대응은 세 가지였다.

첫째,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을 시작하기 전인 탈냉전 과도기에, 남북한이 적극 협력하여 새로 형성될 국제질서에 우리민족의 생존과 번영의 전략이 수용되고 담보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을 설득하여 6.15공동선언에 합의하고 6.15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두 지도자는 민족문제와 통일문제, 그리고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우리민족의 ‘당사자 원칙’을 선언했다. 이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판이 짜이는 과정에서 우리민족이 ‘주인 의식’을 갖고 ‘주인 정체성’을 확립하여 주체적으로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의 평가처럼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시발점으로 남북한은 사상 처음으로 한민족 전체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었다. <파이낸셜타임즈>는 ‘남북정상회담은 한국이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의 운명을 결정해온 미·일·중·러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로 평가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평가들이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의 의의를 매우 정당하게 평가한 것으로 생각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을 통해 국제사회로 하여금 기존의 대한반도 정책을 수정케 함으로써 한반도문제에 있어서 우리민족의 주인으로서의 공간과 역할을 확보했다. 즉, 탈냉전 과도기에 우리가 주도적으로 한반도관련 국제정치의 판을 흔들어 우리민족이 원하는 방향으로 민족화해와 평화정착, 그리고 통일을 위해 우호적인 국제환경을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6.15공동선언을 계기로 기존의 대북정책을 수정하였고, 몇 개월 후인 2002년 10월 북미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북미공동코뮈니케에 합의했다. <BBC>와 <닛케이신문(日経新聞)>은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을 1972년 닉슨-모택동 회담에 비유하였고, <르 피가로>는 이를 1970년 동서독 총리와의 첫 만남을 연상시킨다면서 그로부터 19년 후 독일이 통일되었음을 상기시켰다. <쥐트도이체짜이퉁>도 이와 비슷한 입장에서 남북정상회담은 ‘훗날 한반도 통일의 출발점으로 간주 될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뉴욕타임즈>는 ‘북한을 불량국가로 취급할 근거가 없어질 것이란 희망의 근거가 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셋째, 김대중 대통령은 항상 주변4강 어느 한 나라도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미국은 우리의 동맹국이니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들을 소원케 하는 외교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김 대통령은 우리나라는 외교를 잘해야 먹고 살며 생존과 번영을 기약할 수 있다면서, 미국 외에도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들을 모두 중요하게 대하였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일본, EU, ASEAN 등 모든 나라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이 남한의 동맹국인 미국과 함께 남한의 대북정책을 지지한 것은 실로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알렉산더 버쉬바우(Alexander Vershbow) 전 주한미대사는 비밀 전문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적인 정치가이며, 거의 모든 방면의 외교 정책에 능숙’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이명박 대통령이 들어서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잃어버린 10년”의 정책으로 폐기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비핵.개방.3000’이라는 일방적인 대북전략의 틀 속에서 공식적으로는 ‘상생과 공영’을 대북정책으로 내세우면서, 속내로는 북한을 붕괴시켜야 하며 또 붕괴시킬 수 있다는 개념과 자신감을 갖고 북한을 대했다. 북한급변사태론, 북한붕괴론, 통일준비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논의들을 모두 그러한 속내를 나타낸 것이었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태도는 북한의 극심한 불신을 자초했고,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협조는커녕 무력도발을 초래함으로써 한반도가 6.25전쟁 이후 최대의 안보위기에 빠지기에 이르렀다. 저명한 남한 언론인은 자신의 칼럼에서 이명박 정부의 사람들을 ‘한국판 네오콘’으로 명명했다.

더구나 이념과잉과 비현실성으로 가득 찬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은 미국과 중국이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대결적으로 형성해가고 있는 역사적으로 지극히 민감하고 엄중한 맥락 속에서 추진되었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미중 양국 간의 대결적 구도는 동아시아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남북한을 분리시켜 각각의 세력권에로 흡인하는 원심력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한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엄중하다. 상호 협력하여 그러한 흡인력에 저항하고 공동의 이익을 함께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서로 대결을 지속하여 속절없이 그 흡인력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말 것인가? 이러한 엄중한 선택지를 앞에 놓고서 상호 대결을 지속하고 무력충돌까지 불사하겠다는 남북한의 정책은 민족의 희망에 대한 배신이지 어떤 의미있는 정책이라고 부를 수 없다.

올 2012년은 러시아, 중국, 미국, 남한에서 최고지도자 선거가 있는 해이다. 일본은 언제든지 정권교체가 가능한 나라이다. 선거가 끝나고 내년 2013년이 되면 주변4강의 새 지도자들이 한반도정책을 검토하고 새로운 정책을 내놓을 것이다. 따라서 올해 우리가 어떤 남북관계를 이룩해 낼 것인지가 지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올해 남북관계의 결과가 주변4강 지도자들이 내년 대한반도 정책 검토 시 가장 중요한 기초자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민족’ 개념이 상대적으로 희박하고 ‘친미’ 일변도의 태도를 보여준 이명박 정부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이라도 북한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조치들을 취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해 나가면서 민족의 희망을 다시 세울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전쟁의 유령과 함께 하면서 민족이 서로 찢겨져 각기 미중양국의 영향권에 빨려들어가 한반도평화와 민족통일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고 우리는 또 다시 강대국 정치의 희생물이 될 것인가?

다행히도 동아시아 신질서의 형성은 아직 그 초입에 있다. 이는 아직도 우리민족에게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올 2012년 선거를 통해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민족의 희망을 다시 세울’ 지도자의 탄생을 고대해 마지않는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통일부 정책자문위원회 통일정책분과위원장, 통일부 자체평가위원장, 외교통상부 정책자문위원, 국회 외교.통상 및 통일분과 상임위원회 정책자문위원, 서울-워싱턴포럼 사무총장,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및 한미관계특별위원장, 북한연구학회 부회장, 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연구실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통일부 남북관계발전위원회 민간위원, 민화협 정책위원장, 김대중평화센터 자문위원, 한반도평화포럼 운영위원,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북한 권력의 역사: 사상.정체성.구조』 (2010) 등의
                                          단행본과 “북한정치에서의 군대: 성격.위상.역할” (2011)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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