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권 평화자동차 대표이사가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연말 김정일 위원장 조문을 다녀온 경과를 밝혔다.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지극히 인간적으로 보였다. 그렇게 뭐 특별히 만들어졌니 어쩌니 많은 얘기가 있었는데, 내가 볼 때는 아주 성숙하고 세련되고 정제된 20대 후반의 보통사람으로 보였다.”

지난해 연말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회장이 김정일 위원장 조문을 다녀온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박상권(61) 평화자동차 대표이사가 조문을 갔고 김정은 당시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직접 만난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박상권 대표는 세계평화연합 조문단의 일원으로 지난해 12월 24일 DMZ(비무장지대)를 넘어 개성을 거쳐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광장에서 분향했고, 26일 금수산기념궁전에서 이희호 여사, 현정은 회장에 이어 조문하고 김정은 부위원장을 만났다. 뿐만 아니라 28일 영결식과 29일 추모대회 및 위로연에 모두 참석하고 돌아왔다.

지난달 31일 국내언론과는 처음으로 인터뷰에 응한 박상권 대표는 문형진(34)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회장과 <워싱턴타임즈> 주동문 회장 그리고 박 대표가 김정은 부위원장을 만났다며 “악수도 하고 인사도 했다”고 밝혔다.

박 대표는 김정은 부위원장을 만난 인상에 대해 “그렇게 특별하게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이 없었다. 참으로 인간적으로 보였다”며 “굉장히 고마워하고 감사해하는 그런 눈빛이라고 할까, 아버지 잃은 사람으로서의 슬픔 그런 것들이 눈에 비쳐서 얼굴에 흐르고 있었다”고 전했다.

또한 “사람들을 맞이하는 모양이 대단히 진지하고 참 따뜻한 마음, 감사해하고 정중한 그런 아주 좋은 분위기였다. 가볍지 않은 모습으로 봤다”고 덧붙였다.

당시 평양의 분위기에 대해서 그는 “분위기는 옛날 김일성 주석 서거 때와 똑 같았다”며 “인민들이 보여준 도로에다 자기들의 옷을 벗어 깐다든지 목도리를 벗어서 깐다든지 그런 모습은 그때는 더웠고 이번에는 눈이 와서 달랐지만 그때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면모”라고 전했다.

그는 “60년 이상을 하나님 같은 수령을 하나님처럼 모시고 살았고 그 뒤로 또 국방위원장을 하나님처럼 모시고 살았다”며 “북한에서 집단지도체제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일이 12월 17일이고 3월 말이면 100일이 지나게 된다”며 “100일까지는 북쪽 사람들이 말하지 않고 비교적 조용히 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천안함 사건 이후 5.24조치로 남북간 교류가 모두 막혀있는 상황에서도 미국 국적인 박 대표는 꾸준히 남북을 오가고 있으며, 3년 전부터 평화자동차가 흑자로 전환했고, 보통강호텔도 흑자를 내고 있다고 그 노하우에 대해서 들려줬다.

또한 그는 18년 동안의 대북교류 경험을 근거로 북한이 추구하는 ‘강성대국’의 의미라든지 ‘세계를 향하여’라는 구호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도 자신만의 분명한 해석을 내놓았다.

다음은 1월 31일 오후 4시 50분경부터 서울 강남 도산대로에 위치한 평화자동차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평화자동차, 금년에 2,000대 이상 팔 것”

▲ 박상권 대표와의 인터뷰는 1월 31일 오후 평화자동차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 최근 평양을 다녀온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가 도로에 자동차가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여성 교통순경 대신 신호등이 들어섰다는 보도도 있었다. 실제로는 어떠한가?

■ 통계적으로 몇 대가 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항상 통계가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 자동차가 지난 3년 전부터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 지난 10년 전부터 차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보통 1년에 300대 팔기가 어려웠다. 하루에 한 대 팔기도 어려웠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3년 전부터 1,000대가 넘기 시작해 작년에는 1,870여대가 팔렸다. 금년에 2,000대 이상 팔 것이다.

우리 자동차가 그만큼 늘어났고, 아마 다른 데서도 차를 사오는 것 같다. 특히 군대에서 그렇다. 전반적으로 얼마나 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1년에 소요량이 약 4천대 이상 필요할 것으로 추산한다. 우리가 파는 게 2천대 정도고, 다른 루트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을 합하면 4천대 이상 될 것으로 본다. 참고로 통계청의 '북한통계지표'에 따르면 2010년 북한의 자동차 총 생산량이 4,400대이다.

전반적으로 차가 늘었지만, 신호대가 생기자 교통순경이 없어졌다는 말은 맞지 않는 것 같다. 신호가 생긴 곳이 있지만 여성 교통순경은 여전히 있다. 도로가 넓고 워낙 차들이 많이 다니는 곳은 위험하기도 하니까 신호등을 몇 군데 달았더라. 신호대가 달린 곳은 평양시내에서 10-20% 정도이고 아직도 거리거리 마다 교통이 서있다. 오히려 여성 교통이 서있는 것이 더 보기 좋고 고유한 것이 아니겠나 생각한다.

□ 일반인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북한이 식량난이 심각하고,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에도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는 발표도 있지만 그에 반해 강성대국 진입을 앞두고 경제활동도 활발하고 새 건축물들도 들어서고 있다는 상반된 보도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 나는 지방도 가봤고 평양도 가봤지만 우리가 보통 북한을 말할 때는 평양을 말하게 된다. 그런데 평양에서 식량이 없어서 사람이 죽는다든지 식량이 없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든지 하는 것은 잘 모른다. 가서 느껴볼 수 없다.

그런데 쌀값이 비싼 것은 사실이더라. 10킬로 한 봉지에 10달러로 꽤 비싸더라. 그렇다고 해서 식량난이 어렵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요즘 보니까 건물도 많이 올라가고 있고, 사업하는 것도 많고, 앞으로 4월에 100주년 행사하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니까 그렇겠지만, 그런 것 준비하기 위한 돈을 많이 쓰니까 조금 더 어렵지 않겠냐 하는 느낌은 있다. 그렇지만 과거에 비해 굉장히 어려워졌다거나 많이 굶는다는 그런 느낌은 못 받았다.

□ 최근 남북교류와 경협이 전면 차단되면서 중국자본과 기업들이 많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실제로 체감이 되나?

■ 그렇다. 중국 사람들이 많이 왔다갔다 한다. 우선 우리는 못 가지만 중국 사람들은 자유롭게 올 수 있고 하니까, 아마 옛날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고 할 것이다.

▲ 평화자동차가 조립생산한 대표적 승용차인 휘파람Ⅲ. [사진제공 - 평화자동차]
▲ 평화자동차의 연도별 차량 판매 현황. 2009년부터 1,000대를 넘어서 흑자로 전환됐다. [자료제공 - 평화자동차]
실제로 우리 자동차도 달러나 유로로 팔고 있는데, 자동차 한 대에 1만5천 불, 2만 불이다. 그런 자동차를 사려면 어디선가 달러를 벌어야지 그냥 돈이 나오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러면 러시아나 중국을 통해서 뭘 갖다 팔든지 또 가지고 와서 팔든지 보따리 장사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중국 사람이 많이 들어왔다기 보다는 중국과의 관계, 특히 경제관계가 우리와의 관계가 멀어지면서 좀더 심화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오고간다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 차도 잘 팔리지 않겠나. 그러니까 틀림없이 중국과는 좀더 깊은 관계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거래를 시작하거나 우리가 관계를 시작했을 때 중국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입거나 그 사람들 때문에 우리의 갈길, 우리가 자리잡는 것이 좁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북쪽 사람들의 정서가 기본적으로 주체 아니냐. 주체라는 말 자체가 ‘사람 중심의 사상’ 이런 것도 있지만 민족을 앞세우고 외세나 대국에 먹히지 않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우리가 우리의 문제는 결정하고 간다는 것이 굉장히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국에 영향을 받아서 나라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무질서한 거래는 안 할 것이다. 나는 그건 믿고 있다.

□ 그런데 최근 보도들을 보면 광산이나 지하자원 같은 것들을 중국 측에 50년 장기 임대해줘 자원을 다 뺐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 그런 것도 내가 볼 때는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렇게 자원을 다 뺐기고 모든 것을 다 뺏기면서 국가 유지를 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충분히 거기에 대한 대책도 있을 것이고 또 준비를 잘해서 하기 때문에 북쪽 사람들이 그렇게 허술하게 뭣을 뺏겨가면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과거 김일성 주석 시대부터 쭉 배워온 주체정신과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사람도 없거니와 오히려 자꾸 그렇게 이야기함으로써 두 가지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한 가지는 남쪽이 빨리 북쪽과 교류를 해야 된다라는 것을 윽박지르는 방법으로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고, 또 한 가지는 그쪽에서도 “야, 우리가 이렇게까지 가는데 너희들 가만 있겠느냐” 이런 측면에서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두 가지 다 조금씩 맞고 조금씩 틀리다고 생각한다.

□ 최근 들어서는 북측이 첨단 과학기술을 강조하고 ‘세계를 향하여’와 같은 구호들을 상당히 부각시키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새로운 추세인지, 이전부터 강조했지만 잘 안된 것인지?

■ CNC(컴퓨터 수치 제어)라는 말 자체가 이번에 나온 것은 아니다. 김정일 위원장 시대부터 나왔는데 최근에 김정은 대장이 나오면서 좀더 강조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세계를 향하여’는 김정은 대장 시대부터 나왔다. ‘세계를 향하여’ 또는 ‘두 발은 조국에 붙이고 두 눈은 세계를 보라’ 이런 것이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세계를 향하여’라는 말은 저 사람들이 아주 독특하게 만들어낸 대단히 좋은 말이다.

김정은 대장이 젊은 사람으로서 아주 시의적절한 구호를 내놨다고 생각한다. ‘세계를 향하여라는 말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무엇을 생각하며 내놨을까?’ 이렇게 한번 나름대로 생각해봤다.

정치적으로 세계를 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다음에 문화적으로도 남이나 북이나 우리의 고유한 문화가 다 있어서 오히려 우리 문화를 세계에 내보내서 발전시키는 것이지 우리가 다른 나라 문화를 받아들여올 일은 없는 것이니까 ‘세계를 향하여’는 역시 경제적 측면에서 하는 말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제 북쪽의 입장에서는 꼭 남쪽에 의존해야 할 것이 아니라, 또 중국이나 러시아, 미국에 의존할 것도 아니고 전 세계를 향해 날개를 펴나가야겠다. 이런 측면에서는 외국에서 공부한 김정은 대장의 생각이 좀더 강하지 않았겠나 본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우리 민족끼리’, 우리끼리만 강성대국 하자고 이렇게 할 일이 아니라 이제 전 세계를 상대로 발전해나가야 한다. 전 세계를 향해서 세계 사람들과 대화하고 세계 사람들과 교류하고 세계의 모든 기술들을 배워오고 그래서 이제는 적어도 우리도 세계화 시켜나가야 한다. 다분히 경제적 측면에서 그런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은 새로운 리더의 생각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김정은 부위원장, 참으로 인간적으로 보였다”

▲ 12월 28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영결식 모습. [사진제공 - 평화자동차]
□ 김정일 위원장 조문을 다녀온 것으로 아는데, 언제부터 언제까지 평양에 머물렀나?

■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인 토요일 아침에 DMZ(비무장지대)를 통해 갔다가 30일 돌아왔다. 28일이 영결식이 있었고, 29일 추모대회와 밤에 위로연이 있었다. 우리는 24일부터 가서 모든 장례일정이 다 끝난 뒤 나왔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이희호 여사나 현정은 회장은 하룻밤만 자고 왔지만 우리는 끝까지 그들과 슬픔을 함께하고 모든 것을 다 함께 한다는 측면에서 마지막 추모대회까지 보고 오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 김정일 위원장 서거에 대한 북한의 사회적 분위기는 어떠했나?

■ 그 분위기는 옛날 김일성 주석 서거 때와 똑 같았다. 94년 김 주석 서거 당시에는 (평양에) 없었지만 그 직후에 들어갔으니까 분위기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온 나라가 눈물바다고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고 그때도 그랬다.

이번도 그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그때는 굉장히 슬프게 많이 울었는데 이번에는 더 울지도 않고 분위기가 그때보다 못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 같은데, 94년부터 지금까지 18년 동안 왔다갔다 한 내가 볼 때는 김일성 주석 때와 거의 똑같았다.

그때는 김일성 주석의 크기가 워낙 크고 처음 당한 국상이고 그러니까 더 많이 보도되고 더 많이 과장되고 더 많이 사람들이 알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보면 인민들이 보여준 도로에다 자기들의 옷을 벗어 깐다든지 목도리를 벗어서 깐다든지 그런 모습은 그때는 더웠고 이번에는 눈이 와서 달랐지만 그때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면모라고 할까 그런 것들을 이번에 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도 조문을 못 가게 해서 조문을 못 왔지만 이번에도 조문을 못 오게 했는데, 그때와 이번에는 그래도 달랐다. 이번에는 DMZ가 열려서 개성 쪽으로 해서 우리도 들어갔고 이희호 여사와 현정 회장도 들어가 그때보다는 분위기가 더 완화된 셈이다.

6.15, 10.4선언 이후니까 그렇겠지만, 그래도 공식적으로 대통령 부인이, 재벌 대표가 들어갔다고 한 것은 그때보다는 좀 남쪽에서 완화시킨 것이고, 또 비록 주민들에게만 조의를 표한다고 말했지만 주민이라는 게 범위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남쪽 당국에서 공식적으로 “조의를 표한다” 이렇게 말을 못했던 이유는 역시 보수의 눈치도 봐야하고 천안함 문제도 있었고, 그래서 그랬겠지만 그때보다는 훨씬 남쪽 당국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화국 입장에서 볼 때는 굉장히 섭섭하고 부족하고 그런 것이다.

분위기는 우리가 개성에 도착했을 때부터 마중나온 사람들이 눈물을 글썽이고 나왔다. 우리가 처음 들어간 거다. 우리 이후에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회장이 26일 들어와서 27일 돌아왔다.

개성에 나왔던 우리 파트너인 아태 사람들이 처음 만났을 때 다 눈물을 흘렸다. 눈이 뻘게져 우리를 만났고, 차에서도 울더라.

□ 그때 조문을 위해 육로로 방북한 경우가 24일 세계평화연합팀과 26일 이희호 여사팀과 현정은 회장팀 이외에는 없었나?

■ 해외동포들은 비행기로 들어왔고 육로로는 우리 포함해 3팀만 들어왔다.

□ 문형진 세계회장과 박상권 대표이사가 조화(弔花)를 바치는 사진이 남쪽에도 보도됐다.

▲ 평양 통일거리 입구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앞에서 세계평화연합 조문단이 포즈를 취했다. 오른쪽 두 번째가 박상권 대표, 세 번째가 문형진 회장. [사진제공 - 평화자동차]
■ 24일 우리가 개성에서 쭉 올라가서 평양에 들어가는데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앞에서 일본 사람들 20여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합류해서 바로 김일성 광장으로 갔다.

김일성광장에 분향소가 있었고, 천리마거리의 평양체육관 앞에도 분향소가 있는 것을 봤는데, 여러 군데 있었다고 한다. 제일 큰 곳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우리가 간 곳은 김일성광장 분향소였다.

그래서 DMZ에서 직접 김일성 광장으로 간 것이다. 가서 우리가 미리 꽃을 준비해 놓도록 했는데, 그 꽃을 들고 걸어서 광장 위의 계단까지 올라가서 꽃을 증정한 사진이 나온 것이다.

우리가 금수산기념궁전에서 직접 조문한 날은 26일이다. 총련이라든지 외국에서 온 대표단들이 맨 앞에 섰고 그 다음에 이희호 여사, 그리고 현정은 회장, 그리고 우리가 서고 그 뒤로 외국 사람들이 서고, 인민들도 섰다. 26일 오전 10시에 들어갔다.

□ 그러면 금수산기념궁전 조문 당시 김정은 당시 부위원장을 직접 만났나?

■ 악수도 하고 인사도 했다. 다 만나는 것은 아니고 거기 간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히 대표될 수 있는 사람들만 만났다. 이희호 여사팀도 다 만난 것은 아니다. 만날 사람과 패스할 사람을 미리 정하더라.

우리도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이 많이 갔지만 문형진 회장하고 미국 <워싱턴 타임즈> 주동문 회장하고 나만 만나고 나머지는 그냥 패스했다.

□ 직접 김정은 부위원장을 만났는데 처음 이었나? 인상이나 느낌은?

■ 처음 만났다. 어제 <NHK>와 인터뷰한 내용에서도 나왔다.

지극히 인간적으로 보였다. 그렇게 뭐 특별히 만들어졌니 어쩌니 많은 얘기가 있었는데, 내가 볼 때는 아주 성숙하고 세련되고 정제된 20대 후반의 보통사람으로 보였다. 그렇게 특별하게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이 없었다. 참으로 인간적으로 보였다.

□ 자연스럽게 보였다는 뜻으로 들린다.

■ 자연스럽고 따뜻했다. 두 손으로 내 손을 이렇게 감싸 잡는데 보니까 손도 두껍고 아주 따뜻했다. 굉장히 고마워하고 감사해하는 그런 눈빛이라고 할까, 아버지 잃은 사람으로서의 슬픔 그런 것들이 눈에 비쳐서 얼굴에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을 맞이하는 모양이 대단히 진지하고 참 따뜻한 마음, 감사해하고 정중한 그런 아주 좋은 분위기였다. 가볍지 않은 모습으로 봤다.

□ 김정은 부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눈 것은 없었나?

■ 나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우리 세계평화연합 대표 세 사람은 다 역할분담을 해서 할 이야기는 다 했는데, 그 분은 “감사합니다” 정도지 다른 이야기는 안 하더라.

□ 문형진 회장은 특별히 선친들의 대를 이어가는 입장에서 김정은 부위원장과 공감이라든지 주고받은 이야기가 있었나?

■ 그런 것은 앞으로 내가 왔다갔다 하면서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야겠고, 내가 여기서 말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앞으로 그런 것들이 잘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그런 노력을 내가 할 것이다.

같은 연배고 하니까 문 회장은 “문 총재님께서 우리를 보내서 왔습니다. 세계적으로 우리 신도들이나 우리들과 관계된 사람들은 다 똑같은 마음으로 애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슬픔을 딛고 빨리 나라가 안정되고 모든 것이 잘 되길 바랍니다” 그런 얘기를 했고, <워싱턴 타임즈> 회장은 미국과 앞으로 핵문제를 비롯해서 할 일이 많고 미국 대통령 선거도 있고 해서 “미국에 관한 한 정치적으로 여러 가지로 미국과의 관계를 가까이 하는데 있어서 많은 노력을 하겠습니다” 그런 얘기를 했고, 나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목사도 전도사도 아니니까 비즈니스맨으로서, 사업하는 사업책임자로서 “앞으로 강성대국 가는데 있어서 우리도 있습니다. 우리 같은 회사가 나서서 앞으로 강성대국 발전에 큰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우리도 국가기간산업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고 회사가 잘 발전함으로 말미암아서 강성대국의 일원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저희도 많은 노력을 하겠습니다” 그런 얘기를 했다.

□ 문형진 사장은 몇 살인가? 김정은 부위원장은 출생연도에 대해 다양한 보도가 있다.

■ 문 회장은 올해 34살이다. 김 부위원장 나이는 잘 모른다. 그것이 뭐가 중요한가. 한 살이 많고 적고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북한에서 집단지도체제란 있을 수 없다”

▲ 평양 인근 남포시 소재 평화자동차 종합공장에는 400여 명의 직원이 자동차를 조립 생산하고 있다. [사진제공 - 평화자동차]
□ 현 정부 들어와서부터 남북 경협이 많이 막혀있고, 특히 5.24조치 이후 개성공단을 제외하고는 경제교류 자체가 전면 금지된 상황이다. 평화자동차만 예외라고 볼 수 있는데, 평화자동차는 어려움이 없는지? 다른 일반 경협사업자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 약간 다를 수는 있지만 일본 사람들이 지진을 걱정해서 지진에 대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살기 위해서 생각을 깊이 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는 위험이 좀 적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가 많은 비즈니스를 하고 있긴 하지만, 북쪽 사업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말도 통하고 지정학적으로도 그렇고 가장 쉬운 곳일 수도 있지만 가장 어려운 곳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말은 통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60년 긴 세월을 같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나 모든 것이 다 같은 것은 아니고 생각도 다르다. 그리고 민족 간의 문제를 떠나서 강대국과의 문제도 있으니까 언제든지 잘 오가던 것이 끊어질 수도 있고, 또 여러 가지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북쪽 가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위험에 대비하는 준비는 좀 있었어야 된다. 그런데 전혀 국가도 사람들도 준비가 없이 시작했다. 그저 남북의 문이 열린다고 하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와” 하고 밀려들어갔지만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말해준 사람도 없었고, 무엇이 위험부담인지 잘 몰랐다.

그렇지만 나는 세계 여러 나라를 많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살아본 나라가 많다. 남미에도 조금씩이라도 여러 나라에서 살아봤다. 그러다 보니까 국가와 국가 간의 문제점, 비자나 체류의 문제점 이런 것들을 많이 경험했다.

그래서 평양에 갈 적에도 굉장히 신경 쓴 것이 “만약에 우리가 투자했다가 못 가면 어떻게 하지? 안 되면 어떡하지?”였다. 제일 중요한 것은 못 가게 되면 그건 제일 큰 문제 아닌가. 그래서 국적도 바꿔야겠다. 그래서 국적도 바꾼 거다. 내가 18년 사업하는 중에 절반 정도는 한국 국적으로 다녔다. 그러다가 점점 위험이 온다고 생각하고 국적을 바꿨다.

자기 생애에 벌어놓은 모든 돈을 투자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그것을 잃어버리고 불만도 많고 국가에 대해서 소송도 하고 있다. 문제가 일어날 것에 대해 대비를 하지 않고 너무 남쪽 국가를 믿고 뭔가 다 해결해 줄 것을 기대했겠지만 사실 비즈니스라는 건 자기 책임 하에서 투자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철저히 준비했고, 둘째는 외국인 쓰는 문제에 있어서도 굉장히 고심을 많이 해서 회사에 외국인들을 많이 고용했다. 내가 못 들어 갈 때는 언제든지 외국 국적의 사원들이 있으니까 보고도 받을 수 있고 연락도 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외국 사람을 갖다놓는 것도 중요하고 자기 스스로가 국적을 바꿔서 자주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하나 있다. 이게 뭐냐면 저쪽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다. 저들이 나를 믿게 한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 않느냐. 아무리 내가 방비를 잘 하지만 저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 신뢰를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 비해서 피눈물 나는 노력을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한쪽에 가서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남북 양쪽, 더구나 미국 국적을 가졌으니까 미국 정부에 대해서도 신뢰를 가져야 되는 것이다. 미국에 대해서도 그렇고 일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자꾸 취재에 응해주는 이유가 일본 사람들이 우리 회사에 가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 일본 사람 괜찮다. 잘하고 있다. 앞으로 일본도 북한에 진출해서 일할 수 있다” 이런 것을 알려주고 싶다.

□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젊고, 어려운 경제형편에서 지도자가 돼서 좀 불안정하지 않을까. 또는 일부에서 집단지도체제로 갈 수밖에 없다는 평가도 있다. 다른 일부에서는 생각보다 빠르게 단일지도체제로 잘 끌고 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는 어떻다고 보나?

▲ 박상권 대표는 북한에서 집단지도체제란 있을 수 없다고 진단했다.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 나는 북한에서 집단지도체제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라가 차라리 망했으면 망했지 집단지도체제로는 안 간다고 본다. 단일지도체제로 가는 것이 정서에 맞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한 국가가 60년 이상을 독재가 됐든 자유가 됐든 어쨌든 한 지도자를 모시고 살았다. 그런데 사망 후에 눈물 흘리고 우는 것을 남쪽 사람들이 볼 때는 독재고 비합리적이고 “왜 저럴까?” 그렇게 말하지만 그쪽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더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60년 이상을 하나님 같은 수령을 하나님처럼 모시고 살았고 그 뒤로 또 국방위원장을 하나님처럼 모시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집단지도체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어진 상태에서, 신앙적으로 말하면 신앙적 주체나 마찬가지인 절대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진 상태에서 누가 무슨 힘을 발휘한들 과거에 그 분들이 가졌던 절대적인 통솔력, 지휘력, 이런 것들이 발휘될 수 있겠나? 집단지도체제에서는 이런 것들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지금까지 그런 것을 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다.

김정은 체제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3대째 이어오는 이 시스템은 아마 단일지도체제로 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자리잡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정치가 흔들리거나 나라가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내다본다.

□ 지금 북에서는 김정일 위원장 탄생일인 2.16 광명성절과, 김일성 주석 탄생일인 4.15 태양절을 맞아 강성대국 또는 강성국가 준비에 여념이 없는 것 같다. 북한 주민들의 입장에서도 이런 흐름이 현실감이나 성취감이 있을 수 있다고 보나?

■ 물론이다. 그러니까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일이 12월 17일이고 3월 말이면 100일이 지나게 된다. 내 느낌으로는 100일까지는 북쪽 사람들이 말하지 않고 비교적 조용히 갈 것이다. 우리도 그때까지는 뭘 기대하고 요구하고 만나서 대화하자고 안할 것이다.

그러나 4월은 ‘4월의 봄축전’이 있다. 김일성 주석 탄신 100주년 기념이라는 게 4월의 봄축전과 더불어서 오는 건데 4월은 어차피 슬픔에만 잠겨있을 수 없다. 봄축전이라는 말 자체가 태양절이고 태양절은 기쁜 날이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슬픔을 끌고 가는 것은 태양절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슬픔은 100일로 끝내고 3월말에서 4월초까지는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될 것이다. 남북 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때까지는 우리가 조용히 기다려 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본다. 우리도 내부적으로 4.11 총선이 있기도 하고.

강성대국의 정의에 대해서 도무지 어떤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의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내가 보는 강성대국이라는 것은 물론 경제적으로 먹을 것도 풍부해지고 삶의 질도 높아지고 경제적으로 강해지고, 군사도 더 강해지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강성대국의 기본골격은 역시 군사강국이 된다는 것이다.

‘군사적으로 강해질 때 일본이나 중국, 미국이나 남쪽도 도움도 더 주고 교류도 더 잘하고, 약해지면 무시해서 아마 여러 가지 위험부담이 더 커질 것이다. 그러니까 군사적으로 더 강해져야 되겠다’하는 것이 강성대국의 또 하나의 목표가 아니겠는가 본다.

그러면 공화국이 군사적으로 강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기를 갖는 것이다. 총대에서 모든 권력이 나온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공화국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무엇인가. 미사일도 아니고 아마 핵일 것이다. 따라서 아마 금년에는 핵을 갖는데 모든 역량을 다 발휘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로서는 거기까지 가기 전에 빨리 대화를 하고 6자회담도 해서 핵보유를 완전히 선언함으로써 군사적 강성대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강한 나라가 돼서 강성대국이 되게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진정한 핵강국이 되기 전에 우리는 경제강국이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실제로는 북한이 경수로 완공을 4월 15일에 맞춰서 하려 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경수로는 핵무기는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핵 능력을 시위할 수 있고 경제발전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 경수로 전문가들에게 물어봤는데 경수로가 간단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려고 해도 핵심부품 같은 것이 없어서 못할 것이라 말한다.

그렇지만 예를 들면 이미 갖다놓은 것도 좀 있고 하니까 그것을 완성시키려고 마음먹으면, 또 ‘우리 식’대로 뭔가 해놓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4월 15일까지 경수로를 완성해서 내놓은 다는 것은 어렵지 않겠나 생각한다. 그리고 아직도 핵협상이 안 끝났으니까 지금으로서는 그럴 필요도 없다.

따라서 금년 4월부터는 핵문제가 미국과도 잘 이야기가 돼야하고 또 핵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남북문제가 빨리 풀려야 한다. 핵을 손아귀에 넣고 핵을 보유했다고 완전하게 선언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말하기 어렵다.

아직도 저쪽이 6자회담을 하자고 하지 않나. 6자회담에 응하겠다는 것은 이쪽에서 충족시켜주는 것만 있다면 핵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핵회담을 전혀 안하겠다고 하면 완전히 끝난 것이다. 핵회담을 하자고 말할 때 아직도 희망이 있다.

‘남 다른 발상, 남 먼저 행동’

▲ 고 김일성 주석과 문선명 총재의 만남으로 시작된 북한과의 인연을 사업가로서 이어가고 있다는 박상권 대표.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 최근에 고 김일성 주석과 문선명 총재의 만남 20주년이 됐고, 그것을 계기로 북에 밀가루를 지원하고 문형진 세계회장이 방북하기도 했다. 지난 20년을 평가하거나 의미를 부여한다면?

■ 20년 동안에 공화국은 우리들에게 한번도 국가로서 배신한 적이 없고, 처음에 김일성 주석께서 약속해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베풀어줬다. 우리도 문 총재께서 가서 약속한 것을 하나도 어기지 않았다. 그 이상 여러 가지 하려고 노력했다. 양쪽이 다 그때 두 분이 합의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정말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약속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들이 굉장히 많았지만 그런 노력을 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갔지만 오늘까지 온 것이다. 내가 좀 그런 점에서 끈질긴 데가 있다.

여기 사무실 입구에 있듯이 내 좌우명이 ‘남과 달리 살자’다. 그래서 ‘남 다른 발상, 남 먼저 행동’ 이것이 우리 사훈이다. ‘남 다른 발상, 남 먼저 행동’은 어디서 왔느냐. 남과 달리 살자는 데서 왔다. 남과 달리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이다.

통일, 말로만 통일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행동에 옮기자. ‘먼저 행동’, 행동에 옮기자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내가 맨 먼저 하는 일들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골프대회도 맨 먼저 하고 권투대회도 맨 먼저 하고, 백두산관광도 제일 먼저 하고, 평양관광도 제일 먼저 하고, 그리고 북쪽을 왔다갔다 하는 시스템도 제일 먼저 우리가 개발하고 심지어 이번에 조문 가는 것도 우리가 맨 먼저 들어갔다. 그것도 우리 사훈과 같이 ‘남 먼저 행동’의 일환이다.

그래서 내가 북쪽에다 그랬다. “내가 먼저 조문가게 해 달라. 내가 먼저 가야 다른 사람도 갈 것 아니냐. 일단 DMZ를 열어라. 한 사람이 DMZ를 열고 뚫고 들어가야 다른 사람도 올 것 아니냐. 안 그러면 지금 비행기 타고 가야 된다. 이희호 여사나 현정은 회장이 오게 하려 해도 이게 열려야 한다. 나에게 맨 먼저 열어달라.”

그래서 북쪽이 열었다. 열었는데 남쪽이 안 열었다. 그래서 또 남쪽을 설득했다.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다 설득해 뚫었다. 왜 그랬던가. 북쪽도 열심히 다니면서 인간관계를 가졌지만 남쪽에서도 항상 어느 누구에게도 섭섭하지 않게 했다. 그것이 사실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북에 가서도 빨갱이가 안 되고, 여기 와서도 빨갱이라고 욕하는 사람도 안돼서, 이중간첩이 안되는 게 쉽지 않다. 진심으로 통일을 위해서, 남북의 화합을 위해서 노력하는 마음을 갖고 행동하지 않으면 어디선가 걸린다. 나는 정말 그 점은 진심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한다. 북쪽 가서도 항상 북쪽이 잘못 가는 것에 대해서는 지적하고 남쪽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잘하는 것은 칭찬해주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것이다.

사업도 그렇게 해서 된 것이다. 우리는 뭐 사업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다. 사업들이 다 이익을 낸다. 벌써 세 번째 송금을 했다. 그런 회사가 어디 있겠느냐. 2008년부터 우리가 이익이 나서 3년째 이익이 났고 금년에도 이익이 날 것이다. 실제로 자유롭게 다른 나라에 가서 사업해서도 이익 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북쪽 가서 이익을 내서 온다. 그건 진짜 하늘에 별따기다. 그리고 보통강 호텔도 이익이 난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사업을 해도 이익을 낼 자신이 있다.

□ 현 정부에서 정상회담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남북관계 개선의 기미는 있다고 보나?

■ 글쎄, 그게 양쪽이 다 원해야 되는 것이다. 작년 서거 이전까지는 양쪽 분위기가 잘 해보려고 노력했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제 새로운 체제가 된 북쪽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원할지 어떨지 잘 모르겠다. 조금 더 다녀봐야겠다. 이번에 또 갔다오면 조금 감이 잡히지 않을까 싶다. 2월 14일 갔다 18일 온다. 16일이 광명성절이라서 한번 가보려 한다.

(수정,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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