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환(통일뉴스 편집국장)

지난 주 한반도 상황 및 통일정세와 관련해 두 가지 의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하나는 북-러 정상회담과 그에 따른 `모스크바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남북 민간 차원에서 8.15 `2001민족통일대축전`을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북미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공백을 북-러관계가 메우고, 남북 당국자간 관계가 소강상태인 것을 민간 차원이 대신하고 있는 형국이다. 일년 전 6.15 남북공동선언과 10.12 `북미공동코뮤니케`를 상기한다면 이는 획기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모든 변화는 미국이 자초한 것이고 또 그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북-러 모스크바선언`은 북한의 `강한` 대미압박 제1탄일 뿐

올해초 미국에 부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을 다시 불량국가로 칭하면서 이를 빌미로 MD정책을 강행하겠다며 강경책을 쓰자, 북한으로서는 미국과의 관계사(史) `10년 쌓은 공든 탑`이 무너진 격이었다. 이에 북한은 북미관계의 단절을 중국 및 러시아와의 전통적인 관계 복원으로 대응하고, 또 남북 당국자간 소강상태를 민간 차원의 교류와 대화로 대신하겠다는 의지와 행동을 보여 왔다. 그 구체적인 두 가지 모습이 최근 물밑에서 떠오른 것이다.

이번 `북-러 모스크바선언`은 북한의 `강한`(hard) 대미압박 제1탄일 뿐이다. `선언` 8개항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2번째의 요격미사일 제한조약 및 북한 미사일의 평화적 성격에 대한 합의와 8번째의 주한미군철수 합의이다. 모두가 미국에 대한 강한 불신의 표출이다. 이로써 북한은 미국에 대해 `선의에는 선의로 강경에는 초강경으로`라는 자신들의 일관된 주장이 빈말이 아님을 보여 준 셈이다.

그간 북한은 부시 정부의 `정리된` 대북정책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전반적으로 미국에 대해 `부드러운`(soft) 압박을 가했을 뿐이다.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복원을 후순위로 미루면서 주로 EU(유럽연합) 및 EU 국가들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정도였고 그 극대화가 지난 5월초 페르손 스웨덴 총리의 방북이었다.

그런데 6월초 부시 정부가 오랜 장고 끝에 꺼낸 대북대화 재개선언에 까다로운 조건이 붙은 것이다. 북한은 즉각 핵투명성에는 전력보상문제로, 미사일 문제에는 반MD로, 그리고 재래식 무기 감축에는 주한미군철수로 대응하고 나선 것이다. 반MD와 주한미군철수 문제가 이번 `북-러 모스크바선언`에서 `국제적으로` 명시된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진정한` 대화를 원해

북한의 `강한` 대미압박 제2탄은 9월 평양방문 예정인 장쩌민 중국 주석과의 회담에서 나올 것이다. 북한은 이번 러시아와의 정상회담에 이어 장쩌민 주석과의 평양회담을 통해 북-중-러 반미연합전선을 치며 `강한` 대미압박을 펼칠 공산이 크다. 미국으로서는 원치 않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맞게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북-중-러 연합전선과 `강한` 대미압박을 통해 얻고자 하는 노림수는 무엇일까? 물론 미국과의 대화다. 좀더 엄밀하게는 미국과의 `진정한` 대화다. 여기에서 `진정한` 대화란 클린턴 전 대통령때 합의한 `북미공동코뮤니케` 이행수준으로 양국관계를 원상복귀 시키는 것이다.

그간 10여년간의 북미관계사에 비추어 볼 때, 역설적으로 이번에도 북미간의 `힘겨루기`는 양국관계 개선과 연이은 남북관계 개선의 극적 돌파구가 될 수 있다. 그 시기는 장쩌민 주석의 평양방문 이전에 미국에 의해 대북 유화 제스처가 나오든지, 아니면 장 주석의 평양방문 이후 북한이 어떤 `결단`을 내릴 공산이 크다.

이제 남한의 민간통일운동은 새롭게 변화될 한반도 정세에 대비해야 한다. 어쨋든 지금은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인 남.북.미 중에서 민간 차원의 남북교류만이 현존하는 유일한 끈이다. 남한 민간통일운동의 역할은 이 유일한 끈을 북한 파트너와의 협조와 양보속에 유지하는 일이다.

민간통일운동의 역할은 남북교류를 유지하는 것

한반도 문제가 정상화되지 않은 조건에서는 민간 차원의 남북교류를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번 8.15행사의 평양개최 합의는 그 과정과 결과에 관계없이 매우 잘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남과 북은 이번 8.15행사의 개최지역과 개최장소를 놓고 이견이 매우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남한은 서울-평양 동시개최를 북한은 평양 단독개최를, 그리고 북한은 `3대헌장 기념탑`에서 남한은 다른 장소에서 행사하기를 각각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한은 북한의 평양개최 요구에 대해 이제까지 남한이 너무 양보만 해 왔고 그리고 `3대헌장 기념탑`에서 행사가 열리면 `북한 행사에 남한이 들러리 서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우려`를 했음직하다. 이에 대해 북한은 당국과 민간 차원이 구별되지 않는 내부의 특수한 상황에서 민간 차원이 서울로 오면 남북간 당국자 대화가 재개되는 것으로 `오해`받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본질적으로 북한 민간은 북한 당국의 분명한 서울행사 `기피`와 남한 민간은 남한 당국의 예상되는 `3대헌장기념탑`에서의 행사 `불허`를 각각 반영하는 면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와 `오해` 그리고 `기피`와 `불허`는 모두가 남북이 합의하고 국제적으로도 지지를 받는 6.15공동선언에 입각해서 보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6.15공동선언에는 통일의 원칙과 통일방안이 합의되어 있다. 민간 차원이든 당국 차원이든 양자가 이 원칙과 방안을 지키려 한다면 개최지역과 장소는 어디가 되든 전혀 문제될 게 없는 것이다.

6.15공동선언에 입각하면 8.15 행사의 개최지역은 어디든 문제될 게 없어

비슷한 경우로 지난해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때 초청받아 방북한 남한의 민간 차원은 아무 탈이 없었다. 또한 올해 금강산에서의 연이은 `남북노동자 5.1절 통일대회`와 `6.15 민족통일 대토론회` 그리고 `남북농민 통일대회` 등은 오히려 6.15공동선언의 정신에 맞게 민족화해 분위기와 민간 차원에서의 통일열기를 확산시켰다. 평양에서 행사를 열번 하든 서울에서 매년 하든, 또 양 지역에서 함께 하든 번갈아 하든 이런 점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지금 모처럼 유지.진행되고 있는, 그리고 현재로선 유일한 끈인 민간 차원의 남북교류가 끊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남한에서 민간 차원의 모든 통일운동세력이 `민족공동행사추진본부`로 하나가 된 의의를 살리는 것이고, 따라서 이번 8.15 `2001민족통일대축전`에 남북이 합의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남한의 민간통일운동이 남북 민간교류와 대화를 유지해야 하는 것은 좁게는 남북관계의 복원과 넓게는 한반도 문제의 정상화를 위한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변화된 한반도 상황과 향후 변화될 한반도 정세에서 특히 남한 민간통일운동의 지혜로운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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