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딸'로 유명한 신숙자 씨의 남편인 오길남 씨가 자신의 월북에 '윤이상 관련설'을 주장하는 데 대해 고 윤이상 작곡가는 친필 편지를 통해 이를 부인했다.
<통일뉴스>가 전문을 입수한 고 윤이상 씨의 자필편지 사본은 총 4쪽 분량으로 제공자에 따르면 1992년 5월 작성됐으며, 오길남 씨 주장에 대한 반박이 주된 내용이다.
고 윤이상 씨는 '오길남 사건과 나'라는 제목의 자신의 편지에서 "1977년 봄에 바드고테스베르그에서 한민련 국제회의 때 나는 처음으로 오길남이란 인물을 먼 발체서 보았다"며 "그 뒤 그의 이름은 들은 바 있어도 가까이 만난 일은 없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1986년 11월 오길남 씨가 탈북했다는 연락을 했으며, 그때 윤이상 씨는 오 씨가 월북한 사실도, 뒤이어 탈북한 내용도 알지 못했다고 했다.
오길남 씨는 자신의 책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에서 1985년 독일 브레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윤이상 씨로부터 학위취득 축하와 함께 북한으로 가 지식을 활용해달라는 내용의 월북 권유 편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1986년 탈북 이후에도 윤이상 씨로 부터 재입북을 강요받았다면서 자신의 월북에 윤이상 씨가 관련되어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윤이상 씨는 오히려 오길남 씨가 탈북 뒤, 자신을 만나 평양에 있는 가족들(부인 신숙자, 딸 오혜원, 규원) 구출에 협조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윤이상 씨는 편지에 따르면 1986년 11월 저녁 전화에서 오길남 씨가 "선생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 가족을 도와주십시오"라며 "저는 그곳에서 살 수가 없어서 사람들을 속이고 우선, 저 혼자 도망해 왔습니다"라며 가족 구명을 요구했다.
이에 윤이상 씨는 "그 후에 내가 이북에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였던지, 나를 교포 중 원로의 한사람으로 믿어서였던지, 여러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수없이 걸려왔으며 그 가족의 구출을 역설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아내와 같이 그의 가족구출에 노력하기를 시작하였다"면서 당시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 연락관을 찾아 오길남 씨 가족의 서독귀환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나 윤이상 씨는 해당 연락관과 만난 1개월 뒤 "본국의 태도는 가능성이 없다. 오길남이 조국의 체면을 매우 손상시켰다"는 답변을 들었다.
오길남 씨의 가족 귀환을 위해 북측과 접촉한 윤이상 씨는 '윤이상 음악회' 참석차 독일 하노버를 방문, 여기서 오길남 씨를 처음 만났다.
윤이상 씨는 "나는 하노바에서 나의 음악회가 있을 때 그 곳에 살고 있는 오길남을 나의 호텔로 불렀다. 이때가 생전처음으로 나와 오길남의 단독 대면이었다"고 적었다.
오길남은 이와 관련 자신의 책에서 하노버 대학에서 열린 연주회에 초청을 받아 12마르크를 주고 입장했다며 이 돈은 일주일간 먹고 쓸 수 있는 돈이라면서 윤이상 씨를 폄훼했다. 또한 윤이상 씨와 만나 가족 구출관련 내용을 듣고자 했으나 1987년 10월에 썼다는 부인 신숙자씨의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윤이상 씨의 편지에는 오길남 씨에게 부인의 편지를 건넸다는 부분은 없다. 오히려 "그의 처지에 동정하고 그를 위로하고 그 동안의 나의 이북과의 교섭경과를 설명하고 나의 호주머니에서 그에게 생활비를 보조로써 돈도 주었다"고 적혀있다.
윤이상 씨가 오길남 씨에게 가족들의 편지를 건넨 것은 1991년 1월 중순이다. 1990년 10월 당시 고령의 나이였던 윤이상 씨는 '민족통일음악제' 참석자 평양을 방문, 오길남 씨 가족의 편지를 받았으며 이후 1991년 1월 오길남 씨에게 전했다.
평양 방문 시기와 편지를 건넨 시기가 차이가 나는 이유는 윤이상 씨의 건강문제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74세였던 윤이상 씨는 건강상 문제로 음악회 참가차 방문한 평양에서 한동안 머물러야 했다.
윤이상 씨는 "그때 나는 병으로 24시간 의사와 간호원의 호위아래 산소호흡기를 끼고 하루 세 차례 링겔주사를 맞으면서도 잠간잠간 행사에 나타나곤 했다"며 "이런 정신없는 사이에도 오길남의 가족의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허사였다. 부득이 사진, 카세트 녹음을 간신히 구하여 가지고 왔다. 나의 백림(베를린) 돌아온 날자는 병 때문에 비행여행이 허락되지 않아 퍽 늘어졌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1991년 독일로 돌아온 윤이상 씨는 오길남 씨를 만나 편지와 녹음 테이프를 건넸다. 오길남 씨도 책에서 1991년 1월 21일 편지와 녹음 테이프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편지를 받은 당시 오길남 씨는 가족의 편지와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윤이상 씨는 "퍽 명쾌한 태도로 우리집에 들어온 그에게, 그에 주는 선물을 받은 그는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아내의 간절하고 확실한 소리, 두 딸 아이의 애절한 목소리를 듣고도 태연하였다"고 당시를 묘사했다.
그리고 "옆에서 눈물을 흘리는 나의 아내의 태도에도 감각이 없었다. 그리고 가족사진을 보고 "왜 아이들이 못났는가"하면서 히히적 그렸다"며 "횡설수설하면서 가족에 대한 애절한 감정을 표시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그 자리에서 통곡할 줄 알았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오길남 씨가 "이제 가족 찾는 것을 단념하였다"고 말했으며 이에 윤이상 씨는 호통을 치고 내쫓아, 당시 만남이 오길남 씨와의 마지막이었음을 명시했다.
오길남 씨도 자신의 책에서 당시 상황을 그렸다.
그의 책에 따르면 오길남 씨는 사진을 보자 "참 못생겼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윤이상 씨가 밝힌 '가족 찾는 것을 단념하겠다'는 발언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윤이상 씨가 "당신은 도와줄 만한 가치가 없소. 당신에게 실망했소. 나가시오"라는 말을 했다는 부분은 나왔다. 그러나 이 또한 윤이상 씨의 편지내용과 달리 이 자리에서 재입북을 권유받았다고 주장했다.
윤이상 씨는 편지 말미에 "이상의 글은 나의 속임없는 진실의 전부이며, 남한 정보기관이 나에게 책임을 돌린 사항들, 즉, 1. 오가 이북갈 것을 적극 권했다. 2. 오가 이북을 탈출한 뒤 다시 돌아갈 것을 강요했다. 3. 오는 미국의 고정간첩이며 경거망동하면 가족을 몰살시키겠다고 하였다. 따위는 전적으로 정치조작"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나는 분단된 민족의 비극으로 인하여 한국으로부터 나 자신이 모략과 악랄한 선전에 시달려 오고 있는 사람이기에 내 능력이 다하는데까지 부당하게 곤경에 빠져있는 사람을 많이 도아왔다"며 "앞으로도 나는 정의를 위하여,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내 힘이 필요할 때에는 힘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이상 씨의 편지 내용에 비춰 오길남 씨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길남 씨는 1992년 5월 입국과 함께 거듭 자신의 월북에 '윤이상 관련설'을 유포하고 있다. 그러나 윤이상 씨는 오길남 씨를 알지 못하는 사이였으며 오히려 오길남 씨가 먼저 윤이상 씨를 접촉했던 것으로 윤이상 씨는 밝혔다.
오길남 씨의 주장이 유포되는 가운데 국제윤이상협회(사무총장 발터 볼프강 슈파러)는 베를린 한인회 앞으로 서한을 보내 "비방을 직접 계속 퍼뜨리거나 예의 허위사실 유포를 용인한다면 이 모욕에 대해 소송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제윤이상협회 임원진인 홀거 그로셥은 의견서에서 "오길남의 거짓 주장에는 윤이상을 북한 간첩이라고 비방 중상하여 덕을 보려는 정치세력이 배후로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기 힘들다"며 "자신을 도와주려고까지 한 윤이상에 대해 그렇게 악소문을 퍼뜨리고 20여년 동안 조용하다가 아내와 딸을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2012년 선거를 겨냥한 듯한 정치 캠페인을 벌이는 것은 개인의 단독기획만으로 힘든 일"이라면서 배후설을 제기했다.
앞서 지난달 윤이상 씨의 부인인 이수자 씨와 딸 윤정 씨는 오길남 씨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으며 지난 11일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 조사를 받았다.
고 윤이상 씨의 편지가 공개된 가운데, 오길남 씨의 주장이 얼마나 힘을 받을 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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