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일 정대협 사무실에서 김동희 사무국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조혜진 통신원]
매주 수요일 12시에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14일에는 1,000회를 맞는다. 수요집회는 일제 강점기 위안부 문제해결을 요구하며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집회이다.

특별히 수요집회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평화적 장기 시위로 ‘기네스북’에 올라간 집회이며, 유일하게 서울 4대문 안에서 합법화 되어 있는 집회이기도 하다.

지난 9일, 이 수요집회를 주최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의 김동희 사무처장을 서울 종로구 연건동에 위치한 정대협 사무실에서 만나 보았다.

다음은 김 사무처장과의 문답이다.

□ 통일뉴스 : 위안부 문제가 세상 밖으로 드러난 것은 언제부터인가.

■ 김동희 사무처장 : 윤정옥 초기 상임대표가 처음 연구를 시작했다. ‘근로정신대 근로령’이 시행된 당시, 이화여전에 재학 중이던 윤정옥 대표는 부모님의 권유로 학교를 자퇴하고 고향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항상 정신대로 끌려간 또래 여성들에 대한 고민들을 계속 해오셨고,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특별히 77년도에 오키나와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하셨던 배봉길 할머니를 만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이렇게 한 연구자의 집념, 엘리트 여성으로서 동시대를 살았던 또래의 여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민과 반성, 참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 그렇다면 정대협이 출범하기 이전에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어왔나.

■ 사실 할머니들이 있기 전부터 위안부 문제 운동은 시작되었지만 피해자들이 나서서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사회가 가부장적이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그렇지만) 당시 위안부 문제를 운동화 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곳이 한국교회여성연합회와 한국여성단체연합인데 이곳들이 정대협이 창립되기 전까지 연합해서 진행을 하다가 정대협을 출범한 것이다.

□ ‘수요시위’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 일본정부가 우리는 위안부를 강제로 연행한 적도 없고, 민간업자가 한 것이고, 정부는 관여한 바가 없다고 주장하던 상황에서, 1992년 1월에 미야자와 총리가 방한하게 되었다. 이 방한을 기점으로 위안부문제에 대해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일본의 전쟁책임을 인정하라고 수요시위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처음 시위를 시작하던 당시, 이 문제들이 해결될 때 까지 계속 수요시위를 하겠다고 한 것이 1,000회까지 오게 된 것이다.

▲ 추위에도 불구하고 지난 7일 열렸던 999번째 수요시위의 모습. [사진 - 통일뉴스 조혜진 통신원]
□ 천 번의 집회를 하기까지 어려운 점도 있었을 것 같은데.

■ 정부를 비롯한 국민들의 무관심. 가장 어려웠던 것 것은 한국인들 스스로의 모습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끄러운 사실을 왜 이야기하느냐”고 하기도 했고, “아직도 해결 안됐어?”라는 무관심과 외면들이 가장 힘들었다. 하지만, 이런 외면이 참여와 연대로 확대되는 과정이 있었고, 오히려 수요시위에 와서 자신들이 희망과 힘을 얻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할머니들도 지금은 이전보다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신다. 초기에는 울분에 차있는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그때보단 편안해 보이신다. 함께하는 것에 힘을 얻고 계시고,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때문에 이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 천 번의 집회동안 인상 깊었던 집회 참가자들은 없었는지.

■ 11월이면 참가하시는 일본인 노동자 할아버지가 있다. 민주노총 노동자대회에 참석하러 다른 노조와 한국에 오시는 분이다. 일정이 수요시위로 시작해서 노동자대회로 끝나신다. 어떤 할머니 한분은 참석하는 것이 쑥스러우셨는지 몰래 오셔서 항상 요구르트나 귤 등을 주고 가신다.

초등학생부터 중학생, 고등학생과 같은 친구들. 할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웃고 울던 학생들도 생각이 난다.

또, 일본 시민단체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직접 주관을 하기도 하는데, 한국말을 못해도 한글을 일본말로 적어서 직접 사회도 보고, 발언도 하고, 노래도 부르는 일본 분들도 있었다.

□ 수요시위를 통해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7가지 사안 중 그동안 진전된 사항이 없었던 것 같다.

■ 50년이 넘도록 정권을 잡은 자민당 시절, 민주당.사민당.공산당 이 세 야당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입법을 하자고 매년 민주당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법안을 상정했다. 하지만 자민당 때문에 한 번도 상정된 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위안부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줘 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 한 번도 이 입법이 제출된 적이 없다.

일본에서 역사교과서에서 위안부문제가 기록되었다가 지금은 위안부 역사가 빠져있다. 오사카에서 진행되는 집회에서 방해를 일삼는 우익활동 단체가 있는데, 이곳에서 우익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여성이 제대로 된 역사를 배웠더라면 그런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싶다.

□ 수요시위 1,000회를 맞이하여 제작되는 '평화비'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 평화비는 ‘폭력에 대한 소리 없는 외침’이다. 기억해주고 연대해주길 바라는 (평화비 옆에 의자가 설치될 예정) 20년 동안의 외침은 할머니들만의 외침이 아니었다. 1,000차까지 오게 된 데에는 ‘연대’가 있었다. 평화비는 이러한 과정을 계속 해나갈 것이라는 약속을 담고 있다.

▲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질 소녀의 모습을 한 평화비의 모형안. [사진 - 통일뉴스 조혜진 통신원]

□ 수요시위 1000회가 되는 날, 평화비는 제막될 수 있는 것인지.

■ 종로구청 법령상에는 허가 대상이 아니다. 평화비는 작품이기 때문에 이 작품에 대해서 허가를 내준다, 못 내준다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종로구청의 최종 입장이다. 그럼에도 허가를 받으려했던 이유는 혹시라도 차후에 영구적으로 보존하는데 보탬이 되고자함이 강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일본의 보수 언론에서 먼저 '한국에서 위안부를 지원하는 단체가 일본대사관 앞에 기념비를 세운다. 그런데 이것은 외교상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외교적인 문제로 부풀린 측면이 있다. 이와 관련한 종로구의 부담이 있는 것 같다. 외교부는 오히려 외교 분쟁으로 인식할 사안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 사실은 일본의 역사왜곡, 위안부 문제 해결 등의 역사 문제에 관심이 없는 대학생들이 많다. 당부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 할머니들이 “내가 이렇게 하는 건 내 명예회복도 있지만, 내 후손들이 더 이상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하기위해 이런 일을 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처럼 대학생들이 등록금 문제와 같은 나의 현실만이 문제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사회적인 문제 하나가 해결됨으로써 여러 가지 문제를 다시금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내 안의 눈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주변도 살펴보고 그 문제 해결로 인해서 다른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

□ 1,000회 이후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는지.

■ 1,001차, 1,002차, 1,003차가 계속 진행될 예정이다. 내년에도 끊임없이 매주 수요일 12시에 수요시위가 진행될 것이고,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에는 지난 2003년도에 시작한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개관식을 할 것이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부 문제도 알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전쟁 중의 여성 폭력문제도 알릴 예정이다. 꿈이 있다면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을 통해서 세계분쟁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 해결의 센터역할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동희 사무처장은 “과거청산이라는 부분이 해결되지 않다보면 다시 우리는 그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면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한 번 촉구했다.

“눈앞의 문제 한 가지가 당장 해결된다고 해서 미래가 밝아지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하지만 스스로 안목을 좀 크게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나만 바라보지 말고, 내 체감온도에서의 문제점만 바라보지 말고, 주변을 좀 돌아보는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정대협 사무실에서 볼 수 있었던 학생들의 응원편지. [사진 - 통일뉴스 조혜진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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