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남북 지도자협의회가 끝나자 북한의 행보가 빨라집니다. 지도자협의회가 끝난 지 나흘 뒤인 7월 9일∼10일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가 열려 인민공화국 수립 일정과 방법을 논의하였는데, 회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8월 25일에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대의원 선거 규정과 중앙선거위원회 조직문제를 마무리짓습니다.

통일 입법기구를 내세웠던 만큼 선거는 북한 지역만이 아니라 남한 지역에서도 실시키로 결정했습니다. 7월 12일 북조선 민전과 북로당 중앙위원회는 이런 인민회의의 결의 사항을 거듭 확인합니다. 이때부터 북한과 남한 좌익은 인민대표 선거체제로 들어가게 되지요.

8월 25일 북한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북한 지역의 선거는 212개 선거구에 227명의 입후보자가 등록합니다. 일부 선거구에서 민전 후보에 반발해 복수 후보가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거 방식은 흑백 찬반투표였습니다.

선거 결과, 전체 유권자 452만6,065명 가운데 99.97%인 452만4,942명이 투표해 참가했고, 민전 투표에 대한 찬성률은 98.4%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북한 지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212명이 선출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남한 지역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가 8월 21일∼26일까지 해주에서 개최됩니다. 해주 대회에는 7월 중순부터 비밀 선거를 통해 선출된 1,080명의 남한 인민대표가 참석했으며, 그 가운데서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선출되었습니다.

여기에 참석한 남한 지역의 인민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은 철저하게 지하 비밀선거로 치러졌습니다. 남로당은 이 선거에 남한 전체 유권자의 77.52%인 673만2,407명이 투표했다고 주장했으나 과장된 것이었습니다. 남한 지역의 투표는 대부분 개별 방문과 서명 날인 등의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그마저도 당원들이 간접 날인한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남한의 비밀투표는 남로당이 주도했고, 남로당의 정치 군사간부 양성소인 강동정치학원생들이 행동대원으로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남북한에서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72명을 사회성분별로 보면, 노동자 120명(20.9%), 농민 194명(34.0%), 사무원 152명(26.7%), 문화인 33명(5.8%), 기업가 29명(5.1%), 상인 22명(3.84%), 수공업자 7명(1.24%), 종교인 14명(2.4%), 전 지주 1명(0.02%) 등이었습니다.({북한의 정치와 사회 1}, 한길사, 141쪽)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끝나자 북한은 정부 수립에 들어갑니다. 9월 2일 평양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가 개최되었고, 회의는 10일 인민공화국 수립을 경축하는 연회까지 8일간 계속되었습니다. 회의의 주요 안건은 최고인민회의 의장단 구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채택, 내각 구성, 정부 정강 결정 등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핵심적인 문제는 아무래도 북한 권력구조를 결정하는 최고인민회의 의장단과  내각 구성 문제였습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세력,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 허가이를 중심으로 한 소련계, 김두봉을 중심으로 한 연안 독립동맹 계열, 그리고 국내 공산주의자들과 조선민주당·천도교 청우당 등의 여러 세력이 권력 배분을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인민공화국은 일단 거국정부 형태로 구성되었습니다.

상당한 줄다리기 끝에 배분의 기본 원칙이 정해졌으나, 권력 지분 가운데 대부분은 북로당과 남로당이 차지하게 됩니다. 내각 부문은 북로당 쪽에서 다수를 점하는 대신, 최고인민회의 의장단과 상임위원회는 남로당과 남한 출신들에게 대폭 할애하기로 한 것입니다.

최고인민회의는 의장 허헌(남로당), 부의장 김달현(천도교 청우당)·이영(남로당)이 선출되었으며, 상임위원회는 위원장 김두봉(연안계), 부위원장 홍남표(남로당)·홍기주(북로당), 서기장 강량욱(조선민주당)이 선출됩니다. 상임위원은 17명 가운데 12명이 범남로당계로서 사실상 최고인민회의는 남로당이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집행기관으로 권력의 핵심이었던 내각의 요직은 북로당이 차지하게 됩니다. 수상에는 일찍부터 김일성이 결정되었고, 부수상은 박헌영·홍명희·김책으로 정해졌습니다. 내각의 70% 정도를 남북노동당이 차지했는데, 힘있는 부서는 북로당이 잡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거국 내각의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내각은 김일성과 북로당이 장악한 형세였던 것입니다.

<북한 정권 초대 내각 명단>
수상: 김일성(북로당)/ 부수상: 박헌영(남로당)·홍명희(민주독립당)·김책(북로당)/ 국가계획위원장: 정준택(북로당)/ 민족보위상: 최용건(민주당)/ 국가검열상: 김원봉(인민공화당)/ 내무상: 박일우(북로당)/ 외무상: 박헌영(겸임)/ 산업상: 김책(겸임)/ 농업상: 박문규(남로당)/ 상업상: 장시우(북로당)/ 교통상: 주영하(북로당)/ 재정상: 최창익(북로당)/ 교육상: 백남운(근로인민당)/ 체신상: 김정주(청우당)/ 사법상: 이승엽(남로당)/ 문화선전상: 허정숙(북로당)/ 노동상: 허성택(남로당)/ 보건상: 이병남(남로당)/ 도시경영상: 이용(신한민족당)/ 무임소상: 이극로(건양회)/ 최고재판소장: 김익선/ 최고검찰소장: 장해우

북한 정권의 권력 구조를 좀 더 세분해보면 권력의 큰 축은 김일성의 빨치산 세력, 박헌영의 남로당, 김두봉의 독립동맹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고, 그 가운데 김일성이 권력의 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권력의 중요한 한 부분을 담당했던 허가이의 소련계는 내각에서 부상 등으로 일부가 참여했지만, 그보다는 당과 군대에서 요직을 차지해 김일성을 등에 업고 실권을 행사했습니다.

권력 구조가 마무리되면서 제1차 최고인민회의도 막을 내리고 북한 정권도 정식으로 출범함에 따라 남과 북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사실상의 두 개의 정부`가 존재하게 됩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사실상의 두 개의 정부`가 출현함으로써 해방 후 우리 민족의 제일차적 과제였던 건국 문제는 일단락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 천년 동안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로 존재해왔던 한민족이 분단된 상태로 국가를 세움으로써 통일이라는 과제가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통일 문제를 두고 남과 북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벌어질 것은 불을 보듯 분명했던 것입니다. 전쟁이라는 민족적 재앙을 예비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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