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뉴스가 주최하고 평화3000이 후원한 ‘6.15공동선언 11주년 기념 통일뉴스 방북기 공모전’(5.21-6.20)에서 3편의 수상작이 결정됐다. [관련기사 보기]
대상 격인 '민족상'을 받은 박경식 씨의 '개성가는 길'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공장건설(工場建設)

공장을 건설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현장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고,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제때 공급하거나 받을 수 없는 개성공단 밖에 건설하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겨우 용접공 3년의 경험밖에는 없고 10여년을 이쑤시개 하나 만들어낼 줄 모르는 업종에 몸담았던 내게는 특히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돌아갈 줄은 몰랐다. 공장건설을 담당했던 동료가 설계와 기계발주까지 끝내고는 달아나 버려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다. 새 공장장을 찾고 상주인력을 선정하는 일까지 추가된 것이다.

일은 굴러가야 해서 거창, 포천, 익산, 보령 등지의 석재공장을 쫒아 다니며 묻고 배워야 했다. 모든 일이 그렇듯 간단한 건 없으며 공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돌발 상황에 대처하지 못한다. 그래서 기계작동원리, 제작과정을 충분히 이해해야 했고 건설현장의 작업공장을 눈으로 보고 익혀야 했다.

그런데도 개성공사 현장은 상황파악이 어렵고 대처가 쉽지 않았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하루를 넘기면 다행인 나날이었다.

군사분계선(MDL) 통행규정은 사람은 3일전, 물자는 7일전에 신고해야만 했다. 특히 첫 방북인 사람은 통일교육원에서 매주 목요일에만 있는 방북교육을 이수해야만 방북증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장 건설하는데 필요한 전기, 토목, 철골, 기계설치, 지하수 개발 등의 필수인력들의 방북교육을 사전에 이수시켜야 한다. (지금은 인터넷 교육이 가능하지만) 근 30여명에 대한 방북교육 이수문제는 장난이 아니어서 매주 통일부와 관계회사하고 씨름하기 일쑤다. 또 실컷 이수받고 나면 다른 현장에 나가버리는 경우가 있어서 예비인력까지 확보해야만 했다.

또 공사일정표를 만들고 그 일정에 따라 필요한 물자를 단계적으로 투입하는 계획표를 작성하고 직원들에게 숙지시켜 물자반출과 인력의 입.출경 신청을 하도록 하는 것도 큰 어려움이었다. 공사현장을 눈여겨보고 건설기사들에게 공정문답을 받아 공사일정표를 작성했지만 세상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공사가 진행될 때가 장마철이라서 예정에 차질이 자주 발생했다.

건설자재는 부피가 커서 상당한 물자들을 카고트럭으로 실어 날라야 했는데, 제반 방북필요절차 때문에 현대 택배에 의존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물자 수송계획을 감안하여 차량이 상시 대기하는 것은 아니라서 차량확보도 전쟁이었다.

여기에 잡다한 물자수송을 위해 중고트럭을 구입했는데 이것이 말썽을 부렸다. 부수물자를 싣고 가던 차가 자유로에서 퍼져버린 것이다. 개성 출경 차량도 신고대상이라 반드시 신고차량만 통과할 수 있어 복병을 만난 것이다. 결국 중고트럭을 한 대 더 구입했는데 이도 불안하여 특단의 대책으로 차량번호판을 떼었다 붙였다하는 편법까지 동원하였다.

건설공정은 비로 늘어지고 입.출경 계획에 따라 필요인력은 나와야 하는 상황은 정말 골치 아픈 일이었다. 사람은 한번 나오면 3일 후에 들어갈 수 있으니 작업이 순조로이 진행될 리 만무다. 이런 일들이 다반사였다.

어느 날 밤, 개성에서 전화가 왔다. 건설현장에 나가있던 직원 하나가 술에 취해 여성봉사원들만 있는 봉동관에 가려다가 경비군인들에게 잡혔다는 것이다. 아마 술을 먹다 더 가지러 간다고 객기를 부린 듯 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참사를 찾아 연락을 취하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허물없이 지내던 여성봉사원들이 군인들을 잘 설득하고 우리 참사가 상급부대에 현명하게 대처한 덕분에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 까다로운 출입경 절차도 중요한 난관 중 하나였다. 사진은 남측 도라산출입사무소. [사진제공 - 박경식]
어떤 날은 출경한 직원들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보통 직원들은 출경하면 CIQ(출입경사무소)에 보관했던 휴대폰을 찾아 바로 연락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 날은 CIQ에 나와 있는 국방부 통제실에서 나를 찾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도라산으로 달려갔더니 황당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원래 인원.물자 모두 신고한 입.출경 시간에 움직여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직원들이 계획 시간보다 30분 먼저 출경한 것이었다. 북측 CIQ통제병도 통제하지 못했고 남측도 초과인원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남측 CIQ 국방부 통제실은 발칵 뒤집어졌다. 정전협정위반이기 때문이었다.

골치 아픈 사항은 이 건이 MDL관할에서 벌어졌다는 데 있다. 유엔사 소관이라 국방부 차원에서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일은 벌어졌고 해결방도는 없어 암담했다. 그런데 보낸 북측도 받은 남측도 문제이므로 아마 북측도 당황했을 것 같았다.

성능이 탁월한 무전기를 갖고 있었던 우리는 긴급히 개성공사현장에 연락을 취했다. 현장직원을 통해 북측 참사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해결을 부탁했는데 과연 유엔사를 배제하고 해결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 문제로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아마도 6.15의 ‘우리 민족끼리’ 정신에 입각하여 방도를 모색한 사례는 아니었을까?

연길에서의 상봉(相逢)

공장을 완공하고 시운전에 들어갔던 10월초, 중국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공장완공 직전에 다른 곳에서 배치된 개선총회사 성기철 전 사장이었다. 민경련 연길연락소에 있는데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날짜를 잡고 보니 연길직항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북경을 거쳐 가기로 하고 북경의 지인에게 연길행 티켓을 부탁했다.

연길공항에는 지인의 배려가 있어 사람이 나와 있었다. 가냘픈 몸매에 싹싹한 스물여섯의 최선 씨였다. 연길시 후생지원 공무원인데 우리의 사회복지담당과 같은 직업이다. 연길 조선족으로 생각이 굳건하고 강단이 있어 북경에서 만났던 돈을 중시하는 일부 조선족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북경에서 여러 면에서 내게 도움을 주었던 서정애 씨와는 친구라고 했다. 하긴 서정애도 버금가게 견실하고 씩씩하여 믿음이 가는 사람이다.

최선의 안내로 백산(白山)호텔에 여장을 풀고 성 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더니 백산호텔이라고 한다. 민경련 연길시 연락사무소는 백산호텔에 위치해 있던 것이다. 아래 위층을 사이에 두고 전화를 걸어대는 일이 마치 분단된 남과 북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서 쓴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일이 많다고 하므로 저녁을 같이 하기로 했다.

여유시간에 연길시내를 돌아보았다. 연길에는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는 까닭에 화이(華夷)보다는 조선의 풍취를 제법 풍긴다. 한글 구호도 거리에 많고 한글 간판도 제법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 연길시 조선족 자치위원회가 지방정부 역할을 한다. 최선은 청년위원회 소속이라 길안내를 자임하였다. 일찍 찾아온 가을 날씨로 하늘은 맑고 께끗했다. 백두산 가는 길목이기에 건설붐이 한참인 듯 어수선하다.

저녁을 같이 한 향산식당은 북측이 직영하는 식당이다. 예전에는 그 수가 많았는데 철수하여서 이제 몇 곳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자리를 함께한 연락소장은 안면이 있다. 직전에 개성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에 있던 김용학 부소장이었다. 성 사장은 연길연락소가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남측에 알려지기를 바라고, 김 소장도 어려움이 있다며 도와주기를 부탁했다. 연락사무소의 주요 취급품목을 나열하며 들쭉액과 털게가 좋다고 거래를 추천한다. 마침 연길행에 동참한 사업가들이 반색을 하며 관심을 표명했다.

이역(異域)땅 만주에서 만나는 동족과의 정리는 거리에 비례한다. 식탁에 술이 오른 것은 당연지사, 향산식당에서 제일 예쁘다는 김미란 봉사원이 황구렁이 술을 권한다. 나는 침어낙안(侵魚落雁), 폐월수화(閉月垂花)라는 표현이 무협지에서만 나오는 과장으로 알았다. 한데 길림성 연길에서 식당의 전기불빛마저 제빛을 잃는 미인을 보았다. 그 탓에 보기만 해도 손사래를 치던 황구렁이술을 마셨다.

향산식당은 해물요리를 잘한다는데 이 날은 살아있는 전복이 으뜸이었다. 황구렁이 술은 어찌나 독한지 마실 때는 한입에 탁 털어 넣어야 하고, 입안에 냄새가 오래 남아 마신후 자기 전에는 반드시 양치질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빨이 다 삭아버린다고 겁을 준다. 넘길 때 속을 뒤집어놓기 때문에 두주불사하는 술꾼들도 석 잔을 넘기기 어렵다. 그날은 맨 정신이 아니었는지 무려 두 잔이나 마셨다. 동행했던 하나는 몸에 좋다는 말에 연거푸 마시더니 그날 새벽에 부대껴서 반은 죽다 살아났다.

연길의 10월초는 완연한 가을이다. 더구나 밤에는 쌀쌀해서 긴팔을 입어야만 했다. 지구온난화가 이곳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듯 했다. 이곳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들은 덥다 하지만 초행길인 우리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연길시가 갖는 지리적 의미는 남다르다. 여기서 나진.선봉지구가 멀지 않아 중국에서는 전략적 요충지다. 조선족에 있어서는 최대의 자치도시라 남다른 관심을 끈다. 그래서 이곳에서 거래되는 북한 물품이 상당하다. 내게는 상업적 유통도시 보다 조선민족 애환이 깃들어 있는 일제하 항일투쟁의 근거지였단 말이 더 관심이 갔다.

연길을 떠나 돌아오는 길. 짧은 일정이 아쉬운 듯 고개는 백두산을 향한 채 잘 돌려지지 않았다.

운영후기(運營後記)

▲ 개성공단 인근에 석재공장을 건설하는 과정은 '산 너머 산'이었다. [사진제공 - 박경식]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동업을 하느니 차라리 마누라를 주는 것이 낫단 말이 있다. 이윤획득을 최선의 가치로 삼는 사회시스템에서 그만큼 공동경영은 상호 충돌되는 가치임을 뜻한다.

사회원리가 서로 다른 남과 북의 합영은 과연 어떨까? 합영의 선례는 있지만 성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경제 작동원리의 상이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성공단 역시 서로를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단계에는 미치지 못하고 노동력을 차용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아마 높은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상과 제도를 존중하는 민족의식의 성장과 함께 해야만 발전할 것이다. 개성공단이 앞으로 더 확대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민족적 자각의식과 뗄 수 없는 관계일지 모른다.

공동경영의 원칙과 기준을 세우는 일 또한 공장건설처럼 어려운 과정이었다. 원자재 공급부터 가격결정, 제품의 품질까지 서로가 달리 생각하고 있었음을 일찍 알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격만 결정되면 원자재 공급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체 부문 외에 조달하는 공급문제는 당초 계획된 생산물 외의 것으로(계획경제 밖의 생산물), 노동자의 생산의욕을 조직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던 것이다.

또 봉사직, 사무직 등 직종별 노동자의 배치도 전체적 조망 속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합영회사라는 특수성 때문에 북측 당국이 숙달된 인력을 배치하려는 사려 깊음이 작용했다. 그래서 이미 배치된 인력들을 재조정하면서 보내는 복잡한 과정을 밟아 나갔기에 시간이 제법 걸렸다.

11월 중순에서야 사무직 성원으로 김책공대와 김일성대학, 평양외국어대학 출신의 성원이 배치되었고, 현장노동자들 역시 공훈작가의 제자와 숙련노동자, 비숙련노동자를 조화시켜 단계적으로 30여명이 배치되었다. 노동인력이 전체의 전망 속에서 배치되는 계획경제의 한 단면을 일별하고 사고체계와 기준의 상이성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배치가 이루어지는 동안 급여기준과 복지조건을 협의하고 숙소와 복지시설을 보완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물론 이사회 구성이나 운영원칙 등에 대한 협의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생산활동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원 확보 문제는 쉽지가 않았다. 북측의 발전원은 화력과 수력이 중심이다. 그나마 부족한 전력인데, 갈수기인 겨울에는 생산전력이 급감한다. 뿐만 아니라 생산된 전력의 주파수나 전류가 남측하고 달라 설비를 전기조건에 맞추어야 한다.

북측 전기에 맞추려면 생산설비를 호환되게 바꾸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생산성이 평균 20%정도 떨어진다. 왜냐하면 석재가공 기계의 핵심인 모터의 회전속도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모터의 회전속도가 낮아지면 고속회전으로 석재를 절단하는 기계 날의 마모와 절단속도가 떨어진다.

결국 발전기를 가동하기로 했는데 경유나 가스의 반출은 동의를 받아야 할 대상기관이 많아지는 문제가 있었다. 공장 내에 유류저장시설을 별도로 설치하고 남측이 통제하며 사용량에 대한 일일보고를 조건으로 하여 겨우 통일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하나를 해결하니 또 다른 어려움이 따랐다. SK와 연간사용량을 정하여 가격을 낮추고 유조트레일러로 개성까지 공급받기로 하였는데 통일부가 발목을 잡고 나온 것이다. 통일부는 설비와 발전기 제원의 제출을 요구하고 월별, 주별, 일별 사용계획서와 함께 일일 사용량 보고를 의무화하고 초기 두 달은 일주일 단위로만 승인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일주일 분이면 트레일러의 1/3에도 되지 않는 양이니 SK가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SK를 설득하고 발전기 3대와 20여대 차량의 시간당 사용연료량과 생산된 전력량을 계산해 내야 했다. 문제는 생산설비에 사용되는 전력이 발전기의 운영방식 즉 병렬식이냐, 직렬식이냐에 따라 사용연료량이 다르고 생산설비의 가동률과 연동하여 소모량이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가동률을 40%대에서 90%대까지 유형별로 세분하여 계산하니 연료사용계획서가 거의 책 한 권에 육박했다. 그제서야 통일부 담당자도 미안했는지 국정원, 국방부와 협의해야 하는 자기 입장도 이해해 달라며 호소하였다.

남북경협의 어려운 점은 직접적으로 생산과 관련한 문제를 검토하는 것도 버거운데, 생산외적인 행정서류를 작성하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간소화를 위해 제도적 개선을 한다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다. 이는 근본적으로 대북적대정책의 근간인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두고 에둘러 해결하려하는데서 나타나는 문제다.

한편 노동자의 임금조건, 지급방법(북측은 국가가 담당하는 부문이 많아서 개별지급이 아닌 일괄지급형태를 띤다), 복지조건에 관해 개선, 아리랑과 우리가 합의했지만 통일부는 개성공단 조건에 맞출 것을 요구했다. 우리로서는 사업전반에 걸쳐 통일부의 협조가 필요하므로 재협의해야 했다.

산 너머 산, 물 건너 물이라더니 그 다음에는 상품판매대금이나 초기 운영비에 대한 자본금 출자를 현금으로 할 수 없었다. 남북간 금융거래에 관한 협의가 중단된 탓에 금융기관을 통한 거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자본금 출자는 금융거래 증명서가 있어야 세법에 저촉되지 않는데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판매된 상품대금 또한 일단 입금을 한 후에 분배해야 하는데 입금할 수 없으니 딱한 노릇이었다. 우리은행 개성지점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개성공단 밖의 회사에는 도움을 주기 어렵다는 답변만을 받았다. 결국 우리는 독자적인 해결방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보다 앞서 합영회사 경험을 가진 평화자동차로부터 배우기로 했다.

알고 보니 우리는 개성으로 다니니 안전하지만 평화자동차는 수 만 달러를 소지하고 심양을 거쳐야만 하는 까닭에 불안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한마디로 현금을 들고 다니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자본금 출자에 대한 금융거래 증명서는 해당은행의 도움을 받고 우리도 상대적으로 안전한 개성으로 현금을 들고 다니는 수밖에는 없었다.

물론 어려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남측과 북측의 노동자들이 빠르게 현장에 적응하는 것은 큰 힘이 되었다. 상주하는 남측 기술 인력도 부분적으로 불만은 있었지만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기술이전에 노력하고 북측 노동자들도 큰 마찰없이 작업에 임했다. 현장노동자들의 관리나 작업통제는 북측 노동자들의 대표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초기 장비적응훈련이나 노동숙련정도에 대한 파악이 어려워 애를 먹었지만 넘지 못할 장애는 아니었다.

남측에서 보낸 젊은 노동자 하나는 한 달이 채 안되었는데 식당에서 천연덕스럽게 “이모 밥 줘요, 진주 동무 김치 더 줘”하고 외쳐 깜짝 놀라게 했다. 그 때문에 민족의 동질성은 생활에서 결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어와 문화가 같은 ‘우리 민족끼리’라서 낯설고 서먹서먹했던 사람들이 빠르게 하나가 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날이 차가와지던 12월의 어느 날. 이사회 운영원칙과 기준을 협의하고 장비와 시설운영기준 및 책임자를 결정하는 일에 정신없는데 아리랑 박 사장이 큰 호의를 보여주었다. 점심이 끝난 뒤 봉동관의 큰 홀에 나만을 위한 공연을 마련했다. 악기를 잘 다루는 임수향 봉사원과, 노래를 잘 부르는 김성희, 신리향 봉사원이 근 한 시간가량 역할을 해주었다. 아리랑 사장의 호의와 김성희 봉사원이 감정 넣어 불러주던 “심장에 남는 사람”이 가슴에 오래 새겨져 있다.

“ 인생의 길에 상봉과 이별, 그 얼마나 많으랴
헤어진대도 헤어진대도, 심장속에 남는 이 있네
아! 아! 그런 사람, 나는 못 잊어!

오랜 세월을 함께 하여도, 기억속에 없는 이 있고
잠깐 만나도 잠깐 만나도, 심장속에 남는 이 있네
아! 아! 그런 사람 나는 못잊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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