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남자

내 주변에는 여성이 많다. 원래 바람둥이거나 여성을 특별히 선호해서는 아니다. 이상하게 그렇게 되어 버렸다. 학창시절 미술학원에 나가면서부터 이런 현상이 시작됐다. 미술학원에는 언제나 남자보다 여자가 많았다. 미대를 들어가서도 마찬가지로 여성이 많았고, 사회에서 학생이나 일반인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곳에도 언제나 여성이 주류였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어디에도 여성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곳은 없다.

우리나라는 가부장적인 남성중심의 사회이다. 사람의 절반을 무시하는 남성중심의 사회는 후진사회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일차적인 피해자는 물론 여성이지만, 여성 못지 않게 피해를 보는 게 바로 남성이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돈 많고 권력 있는 일부 기득권자일 뿐이다.

사람 안에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함께 존재한다.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것은 착취구조로서의 사회적 제도와 문화 때문이다. `남자다워야 한다, 여자다워야 한다`는 말은 사기를 치는 것이다. 남자답지 못한 것은 여성스러움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람이 미숙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답지 않다는 것은 남성스러움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미숙한 것이다. 남자답거나 여자답다는 것은 사람답다는 말이다.

예술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은 언제나 중성이자 양성이다. 다시 말해 남성도 되고 여성도 된다는 것이다. 예술작품 속에는 여성적인 요소와 남성적인 요소가 미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원리는 간단하다. 예술은 인류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진리는 남성에게도 진리로 통한다.

또한 형식면에서도 강함과 부드러움, 직선과 곡선, 따뜻함과 차가움 따위는 한 작품에 구현된다.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작품이 감동을 준다는 뜻이다. 이는 문학이나 미술, 음악 따위의 명작을 찬찬히 분석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더 쉽게는 폭력이 난무하는 남성적인 영화에 여성과 로맨스가 등장하고, 세계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은 거의가 중성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여성을 다룬 영화나 소설도 마찬가지여서 세상을 이겨 가는 여성의 모습은 여느 남성 못지 않은 힘을 느낀다. 일방적인 남성성이나 여성성만 강조한 하이틴 로맨스소설, 순정만화, 대중가요, 폭력영화, 남성중심의 포르노 영화, 여성의 몸이나 남성의 몸만 그린 미술작품, 꽃만 그린 그림 따위는 높은 기량으로 표현해도 졸작이 될 가능성이 많다.

불의에는 강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인자한 사람, 바느질을 하면서도 민주주의와 통일을 고민하는 사람, 기저귀를 빨면서 세상을 경영하고자 하는 사람, 힘든 노동을 하고 자투리 시간에 시(詩)를 읽는 사람은 여성도 남성도 아니다. 본래 그대로 사람의 모습이다. 

북한의 낙선작

▶리철호/철도원/조선화/95*154/1996

이번에는 북한화가 리철호가 그린 <철도원>이란 조선화 작품을 소개한다. 이 작품은 <6.15공동선언 1주년 기념 북한미술 특별전>에 출품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일상생활 속에서 당성, 인민성, 계급성을 구현한다는 의미로 일명 <생활주제화>로 불리기도 한다. 다른 작품과 함께 이 작품은 국내에 처음 전시된 주제화란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철도 노동자가 눈보라가 휘날리는 악천후 속에서 철로를 점검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배경은 철도다리처럼 보이고, 전등을 켠 것으로 보아 지독한 악천후거나 야간일 수도 있는데 명쾌하진 않다. 작가는 철도 노동자가 악천후 속에서 철로 점검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인민을 위한 것이고 당을 위한 것이다라고 속삭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의도가 제대로 관철되는 지는 의문이다. 알다시피 이 작품은 북한의 미술전람회에서 낙선한 그림이다. 그렇다면 낙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흔히 북한의 미술을 `낙관성에 기초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완전한 사회주의를 이루기 위해 생활하고 투쟁하는 모습을 인민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리되, 이러한 투쟁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낙관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낙관성은 근거 없는 낙관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증이 있는 낙관이어야 한다.

<철도원>은 나름대로 인민성, 계급성, 당성을 드러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철도노동자를 소재로 한 점, 악천후에서 노동자가 사명을 다하고 있는 점 따위가 그것이다. 얼핏 보면 기술적으로도 별 무리가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철도원>은 구체적인 낙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악천후 속에서 원래 하던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시간을 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또한 철로를 점검하는 노동자의 표정도 애매하다. 만약 남한의 작가가 그렸다면 `악천후 속에서도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철도노동자의 비참한 노동현장`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을 정도이다. 색채 면에서도 칙칙한 회색을 주로 사용해 조선화 특유의 화사한 느낌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정리를 하면, <철도원>은 노동자, 악천후, 사명 따위의 좋은 소재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이상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소재주의`에 빠져 있는 셈이다. 진달래나 철조망을 그린다고 민중미술이나 통일미술이 아니듯 말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이번 작품이 미묘한 정서와 닿아 친근함을 줄 수도 있다. 주변에서 늘상 보아오던 모습이고 우리에게 회색조의 색감은 고급으로 통하니 말이다.

하지만 북한의 입장은 분명 다를 것이다. 화사하고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린다고 해서 북한의 미술을 쉽게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는 종종 사물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능력을 사실주의라고 착각하거나 수령이나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이 사회주의적이다라고 오해한다.  심지어는 제법 배웠다는 평론가도 이런 식이다. 하지만 내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정도의 내용은 북한의 미술계도 알고 있다고 봐야한다. 그래야 이상한 우월감에 빠지지 않는다.

북한미술전람회에서 낙선한 <철도원>이란 작품을 통해 북한의 미술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이 작품의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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