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뉴스가 주최하고 평화3000이 후원한 ‘6.15공동선언 11주년 기념 통일뉴스 방북기 공모전’(5.21-6.20)에서 3편의 수상작이 결정됐다. [관련기사 보기]
대상 격인 '민족상'을 받은 박경식 씨의 '개성가는 길'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숭양서원(崇亮書院)

▲ 포은 정몽주가 살았던 숭양서원으로 가는 길. [자료사진 - 통일뉴스]
숭양서원은 포은 정몽주가 살았던 곳으로, 1573년에 양반자제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는 사립교육기관으로 복구하였다. 서원을 향한 골목길 앞엔 깨지고 부서진 공덕비(功德碑)가 무수하다. 선정을 베풀고 간 관리를 기리기 위해 마을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세웠다는 공덕비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현직에 있는 관리들이 세운 공덕비가 훨씬 더 많다고 한다.

개성을 거쳐 간 관리들은 왜 서원 앞에 공덕비를 세웠을까? 세월은 진심(眞心)과 사심(私心)을 구별하지 않는다. 잘 깎아 세운 것도 흔한 돌로 만든 것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 발길을 잡지 못한다. 오히려 서원으로 올라가는 무심한 돌계단이 햇살에 눈이 부셔 관리들의 욕심이 허망했음을 보여 준다. 계단을 오르면 대문이 활짝 열려있어 문턱만이 과거와 현재를 경계짓는다.

귀솟음이 우아한 건물 안은 마당의 풀 한 포기까지 과거로 왔음을 깨우쳐준다. 포은의 초상화가 걸린 법요를 논하던 마루방은 정면에, 좌우에는 공부방이 길게 늘어서있다. 뒤편의 사당(祠堂)은 돌계단 높이 올라야 한다. 이러한 배치형식은 당시 지방교육기관이던 서원들의 형식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나무들이 낮은 담장을 조용하게 에워싸 고택(古宅)의 품격을 전한다. 혹 포은의 지조(志操)를 상징하는 것일까? 비록 봉건의 시대적 한계가 명확했지만 신념(信念)과 지조를 지키려던 사생취의(捨生取義) 정신이 오늘날에도 그가 살아있는 이유가 아닐까?

선죽교(善竹橋)

▲ 고려 충신 정몽주가 살해당했다는 선죽교. [자료사진 - 통일뉴스]
선죽교는 숭양서원에서 10분도 채 되지 않는 곳에 있었다. 자남산에서 시작되어 흐르는 작은 냇물을 가로질러 놓인 빛바랜 화강암 돌다리가 그것이다. 한석봉이 썼다는 선죽교(善竹橋)는 아무리 보아도 절제와 힘을 느끼게 한다.

길이는 5m, 폭은 3m 남짓하고 검붉은 흔적은 돌난간에 에워 쌓여 있다. 정조 연간인 1780년 정호인이 훼손을 우려하여 돌난간을 둘러 통행을 금지시키고 그 옆에 지금의 통행돌다리를 만들었다. 살해당한 직후 혈죽(血竹)이 솟았다는데 둘러봐도 청죽(靑竹)조차 없어 지은 말이 아닌가 싶다. 바로 옆에는 같이 살해당한 수행원의 추모비가 작은 당(堂)안에 있다.

▲ 한석봉이 썼다는 선죽교(善竹橋). [자료사진 - 통일뉴스]
또 선죽교 앞에는 아주 잘 지어진 사당 하나가 눈길을 끈다. 작은 대문과 정원까지 아담하여 흥미롭다. 당(堂)에는 영조와 고종이 직접 썼다는 거대한 표충비 두 개가 우람한 들보 뒤에 숨어있다. 잘 생긴 거북이 등에 세워진 표충비는 때로 눈물도 흘린다는데, 충효(忠孝)를 지배이데올로기로 했던 조선 왕조에게는 좋은 귀감이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고야 이씨 조선을 거부했던 포은을 위해 이렇게 거대한 송덕비를 세울 리 없지 않았을까 한다. 이율배반적인 봉건왕조의 모습을 선죽교 앞에서 본다.

선죽교와 표충비 해설원은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땀을 흘린다.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단아하게 입고 “고조 조금씩 양보하며 들어주시면 좋갔습네다”며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훔친다. 사진 한 장 같이 찍자는 부탁도 웃음으로 화답하니 선죽교보다 시각의 흔적을 새기려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고려 성균관(成均館)

▲ 고려 성균관. 지금은 고려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선죽교를 돌아 옆길로 버스를 타고 10여분 거리에 고려 성균관이 있다. 공화국 문화재 국보급 제127호다. 성균관은 11세기 초 대명궁이라는 고려 별궁이었다가 1089년에는 최고교육기관 국자감이 되었다. 그리고 1310년에 성균관으로 개칭하였다. 1592년 왜란때 불탄 것을 1602년부터 1610년까지 9년에 걸쳐 복구하였다. 만㎡부지에 200여 칸에 달하는 18동의 건물이 있었다.

성균관이 배출한 첫 박사는 정몽주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리학의 첫 대가였을까? 성리학이 당시의 시대적 요구를 담지했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성리학 자체가 사대주의를 내포했던 것인지, 아니면 후에 만들어낸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내포하지 않았다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싹이 틀 수 없을 거라 추측하지만 성균관에서 그것을 찾기는 요원하다.

맞배지붕의 세 칸 대문을 지나면 학생들의 공부방인 동제와 서제가 있고 강의실인 명륜당이 나온다. 명륜당 북쪽에는 선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이 이어진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성균관과 그 배치와 형식이 다르지 않다. 하다못해 명륜당 앞 은행나무가 자라는 위치마저 비슷하다. 다르다면 은행나무의 수령이 다를 뿐. 유교적 형식이 이러한 배치를 고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박물관에 전시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확대경을 통해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돼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북측은 이 성균관 내부를 개조해서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명륜당과 대성전, 동.서제 네 관에 11세기 초 고려 금속활자와 청자, 왕건릉 모형과 출토된 유물 등을 진열해 놓았다. 남측에서 보기 힘든 고려시대의 다양한 청자들이 그 빛을 뿜어내고 있어 쉽지 않은 기회라 여겨졌다. 하지만 워낙 많은 인원들이 무리지어 다니고 금속활자 앞에는 줄지어 선 까닭에 이날은 제대로 감상하기 어려웠다.

다행히도 그해 12월 중소기업인 30여명과 함께 다시 방문하여 고색창연한 과거와 반가운 해후를 할 수 있었다. 해가 바뀌는 길목이라 소회가 남달랐고, 고려 초기의 진취성이 조선의 분위기와는 확연히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삭풍(朔風)이 불지 않는 행운이 겹쳐서 야외에 모아놓은 고려시대 석탑들을 느긋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개성 인근에 흩어져 관리하기 힘든 석탑들을 한 곳에 모아 놓아 시대적 흐름에 따른 변화를 알 수 있도록 했다. 마침 리옥란 해설원은 송도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15년이 넘게 근무해온 터라 설명에 깊이가 있다.

▲ 헌화사 7층탑. [자료사진 - 통일뉴스]
불일사 5층탑, 탑동 3층탑 등 고려 초기 석탑들은 소박하면서 균형미가 돋보이고 중기의 헌화사 7층탑을 거치며 후기 석탑들은 갓머리나 몸돌 조각들이 화려해지는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 준다.

문외한인 내게도 잘 보여 리옥란 해설원에게 물었더니 깜짝 반색을 한다. “초기 고려의 건강성이 민중생활과 유리되면서 나타나는 지배계급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 설명하며 “눈썰미가 있는데 혹시 역사를 전공했냐”고 되묻는다.

남자아이 둘을 키운다는데 씩씩하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아니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보다 그 일을 통해 강성대국에 일조를 한다는 자부심이 더 높다고 여겨졌다.

흥국사탑 앞에서는 그녀의 해박한 고려사를 재미있게 들었다. 흥국사탑은 연꽃대좌형 기단위에 1층 몸돌과 세 개의 지붕만이 남아 있는데 1021년 귀주대첩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석탑을 이곳으로 옮길 때 석탑에 관한 내용이 받침돌에 기록되어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 보니 기단이 묵중하여 튼튼한 것이 흔들리지 않는 민족의 자주성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고려 석탑을 끝으로 박물관을 나오는데 리옥란 해설원이 사진을 박지 않느냐고 한다. 아마 박물관 관람객들의 요청이 행사처럼 익숙한 까닭인 듯 했다. 정문 앞에서 참사와 셋이서 사진을 찍으며 개성을 편히 오가는 날을 손꼽았는데 부질없었던 것일까?

1차 시범관광은 고려 성균관을 되돌아 개성공단 시범단지 입주업체 방문이 마지막 행선지였다. 출경시간 30분전 출입국사무소(CIQ)에 도착해야 하므로 서둘러야 한다. 오전과 오후 일정을 다르게 움직였던 일행이 개성공단에서 합류하였다.

개성공단 본관광의 파행은 이 날 징조를 보였는데 평양에서 시범관광단을 맞으러 온 총국장과 내각참사 일행이 일정 내내 현회장과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른 일행과 어울려 다녔다.

교류협력사업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들은 이상기류를 파악하고 있었다. 본관광이 쉽지 않겠다 예견하고 우리는 왕건릉, 공민왕릉, 만월대 등을 아쉬움 속에 미루어 두었다. 계산 빠른 사람들은 개성관광은 1박2일이 적당한데 2년 후에나 시작될 것 같다고 나름대로 전망했다. 그동안 숙박시설을 짓겠다는 구상까지 밝힌다.

돌아오는 길, 우리 일행의 차 안은 불길한 예감을 너무 일찍 감지한 탓에 내내 정적만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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