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모스크바 3상회의

이러한 어수선한 연말에 모스크바에서 미ㆍ영ㆍ소 세 나라의 외상이 모여 전후 문제를 처리하는 협정을 맺고 12월 28일 세 나라의 수도에서 발표했다. 거기에서 조선은 향후 5년간 미ㆍ영ㆍ소ㆍ중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로 인해 나라 안은 발칵 뒤집힐 지경으로 들끓었다. 미국이 이미 얼마 전부터 내비쳤던 신탁통치가 4개국의 공동이라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조선민중은 신탁통치라는 말에 흥분하고 말았다.
조선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겠는가. 모든 정당ㆍ사회단체들과 개별적 인사들은 신탁통치라는 말에 불문곡절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미국은 날이 갈수록 남조선 점령에서 제국주의적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발표되기에 앞서 미국은 10월 20일에 미국의 전후처리 3부조정위원회가 점령군 사령관의 정책수립에 대한 일반정책이라면서 신탁통치를 들고 나왔다. 거기에서 미ㆍ소 양군에 의한 조선의 지역적 군사점령을 가능한 빠른 시일에 신탁통치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 이튿날 국무부 극동담당관 빈센트는 거기에 대해 담화를 발표했다.
“조선은 오랫동안 일본에 부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즉시 자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기간 동안 조선인이 그들 나라의 독립정부를 떠맡을 준비가 갖출 수 있도록 신탁통치할 것을 주장한다. 그 기간은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그러나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는 데에 동의한다.”
는 것이다.
조선의 민족지도자들은 이에 대해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맹렬히 비난하고 반대했다. 그러자 미국은 군정장관의 입을 빌려 신탁통치는 군정당국의 의사가 아니라 빈센트 개인의 의사라고 일단 얼버무렸다. 그러면서 하지와 아놀드는 이승만, 송진우, 김성수 등 친일지주 출신의 정치인과 친미 정치인들을 불러 밀담을 했고 그들 중 몇 사람은 군정청 부장, 국장 등 요직으로 발탁하여 일제의 식민지체제를 미제의 식민지체제로 바꾸어놓는 작업에 열중했다.
11월에 들어서자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 선생이 귀국한다는 말이 돌고 정세가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자 민중으로부터 반역자로 비난받고 있던 민족 반역적 친일지주들과 친미분자들은 이 기회를 포착했다. 그들은 군정에 들붙어서 미제국주주의의 식민지 재편 책동에 협력하고 「인민공화국」을 반대하여 대신 「임시정부」를 받들며 미제의 모략적 신탁통치 소동에 영합함으로써 어제까지의 반역자가 갑자기 애국자로 변신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의 인사들의 귀국을 마치 해외의 혁명정부가 환국하는 것처럼 유달리 설쳐대고 당장 나라가 신탁통치로 들어가고 마는 것처럼 날뛰고 있었다. 물론 반만년의 자주적 역사를 지녀온 우리들의 어느 누가 남의 나라로부터 신탁통치를 받고 사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미제의 이러한 이른바 신탁통치의 모략적 소동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 국제정치적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그 하나는 앞으로 있을 전후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미ㆍ소ㆍ영 3국 외상회담에서 미국이 조선에서 물러나지 않을 구실을 마련하기 위한 국제정치적 전술이었다.
얄타회담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을 항복받고 무장해제한다는 협정이 조선을 북위 38도선을 그어 실시했고 10월말에 이르자 미군도 소련군도 그 임무를 끝마치고 있었다. 이제는 두 나라의 군대가 어떤 명분을 가지고 조선에서 물러갈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미제는 이왕에 손에 들어온 남조선을 그대로 놓기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점령군이 계속 주둔할 구실로 내놓은 것이 조선은 자치 능력이 아직 미숙하다고 조선민중을 모욕하고 상당한 오랜 기간의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는 국제적 여론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미군이 남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조선민중이 남조선에 자결적으로 수립한 「조선인민공화국」을 파괴하기 위한 모략적 전술인 것이다.
8.15 해방을 맞이하자 조선민중은 「건준」이라는 자치정부를 조직했고 이 정부 아래에서 「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미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이 그들의 조선 식민지 정책에서 가장 큰 방해물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들 군정정부의 기반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조선민중을 반대하고 그들에게 반역자로 지탄받고 있는 친일지주와 전쟁 전에는 친미적이었으나 일제에 부역하여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반역자로 지탄받는 기독교 목사들과 그들을 추종하고 있는 신자들에게서 식민지 체제의 기초를 찾게 된 것이다. 그들의 우두머리로 미국에서 식객 노릇을 하던 이승만을 불러들였다. 이들은 조선민중에게 외면당할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이들을 하루아침에 애국자로 둔갑시킬 수 있는 기회로 신탁통치를 내어놓았던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조선인민공화국」을 파괴할 대중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모략적 전술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미제의 모략적 신탁통치라는 문제를 맞게 된 조선민중은 그 모욕적 정책에 대해 하나같이 발끈했다. 묘하게도 이 문제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도 애국적 진보적 인사들도 이 미제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고 나섰던 셈이다.
일단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발표되자 이를 미국의 모략적 신탁통치 문제로 들뜬 조선 사람들은 흥분하고 말았다. 그것은 묘하게도 결정 전문을 보도하기에 앞서 신탁통치 결정이라는 것만 우선 발표되었는데도 흥분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그 신탁통치가 미제가 3부조정위원회가 내어놓은 신탁통치와 같은 줄 알고 그 모욕감으로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고 흥분이 좀 갈아 앉고 이성을 찾게 되자 협정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고서 그 신탁통치라는 내용이 아리송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라는 협정은, 1945년 4월에 나치 독일이 망하고 난 다음 열린 베를린 근방의 포츠담에서 미ㆍ영ㆍ소의 정상회담의 결과 앞으로 전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외상회의를 열기로 했고, 일제가 망한 후에 두 번째의 그 외상회의를 모스크바에서 열어 전후처리에 대해 폭넓게 채결한 것이다.
거기에서 조선문제를 협정한 내용이 있었는데 이것을 고의인지는 몰라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5개년 신탁통치라는 말만 우선 일찍이 보도했다. 그래서 조선민중은 미국이 앞서 말한 신탁통치안에 대해 맹렬한 반대를 해온 데다가 이 협정의 신탁통치라는 말이 그 신탁통치인줄 알고 그냥 들끓고 말았던 것이다.
신탁통치란 「국제연합」 헌장 73조에 규정되어 있어서 어떤 지역의 인민이 완전한 자치를 할 수 없는 경우 한 나라 또는 여러 나라 또 「국제연합」 자체가 시정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연합」에서는 「신탁통치이사회」가 설치되어 있어서 시정보고의 심의와 지역 인민으로부터 들어오는 청원의 수리 그리고 정기적인 현지 시찰을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모스크바협정에서 결의한 신탁통치는 이 「국제연합」 헌장에 있는 신탁통치와는 다르다. 모스크바협정은 원래 전승국으로서의 미ㆍ영ㆍ소가 전후처리를 위하여 마련한 결정이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북위 38도선으로 갈라놓고 두 나라의 군대가 주둔한 것이다. 소련군은 일본군과 전투로써 이북을 점령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을지는 모르지만(주5) 그래도 그들은 북조선에 일본이 항복한 후에 들어왔기에 또한 주둔군일 뿐이고, 미군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시점에 필리핀에서 일본군과 죽탕을 치고 있었고 최전선이 오키나와였으며 훨씬 뒤에 조선의 남부에 들어온 그야말로 주둔군인 것이다. 이들은 일본군의 무장해제가 이루어진 후에는 우리 조선 민중에게 자결권을 맡기고 당연히 철수해야 할 것이다. 모스크바협정은 이런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들의 군대를 철수하는 명분이었던 것이다.
조선에는 시정권의 권위를 가진 정부가 없기 때문에 미ㆍ소 두 나라의 주둔군이 이러한 임시정부를 만들어놓고 두 나라의 군대를 철수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정부로 하여금 완전한 자주정부가 이루어질 때까지 이 임시정부가 그가 맡은 임무를 잘 할 수 있도록 원조를 해 주어야할 것이다. 이것이 모스크바협정이 가지고 있는 정신이고 명분인 것이다.
이러한 협정의 정신은 협정에 나타난 남조선 미군 사령부와 북조선 소련군 사령부의 대표로 이루는 미ㆍ소 공동위원회의 설치와 그 위원회의 목적에 잘 명시되어 있다.
미ㆍ소 공동위원회의 목적은, 첫째 조선에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방책을 작성하고, 이 제안을 작성할 때 조선의 민주주의 제 정당과 제 사회단체와 반드시 협의하도록 명시되어 있고, 둘째 공동위원회는 조선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조선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 협정안을 작성하여 미ㆍ영ㆍ소ㆍ중 4개국 정부의 공동심의를 받는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셋째로 공동위원회는 남북 조선에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를 심의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공동위원회를 조직하여 소집한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말은 신탁통치라고 하지만 국제연합 헌장 73조에 있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사실 협정문의 내용으로 보아도 영어로 trusteeship으로 되어 신탁통치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러시아 협정문에서는 나타난 말은 의미가 후견 또는 후원이라는 말로 해석된다고 한다.
아무튼 미국정부가 앞서 내비치었던 신탁통치, 그것도 적어도 20년간이라는 것으로 생각된 조선민중들은 한 소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으나, 차츰 이성을 회복하자 협정문의 내용을 보고서 당시의 국내외의 정세로는 이 길밖에 미ㆍ소 두 나라의 주둔군을 철수시킬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없다고 받아들였으며, 조국의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길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민중의 민주주의정부가 수립될 때 자기들이 받을 반역적 범죄의 처단으로 전전긍긍한 친일파ㆍ민족반역자들과 이들을 기반으로 하는 친미사대주의자들은 모스크바협정대로라면 그들이 발붙일 수 없는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좌익정부가 수립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5년간 신탁통치라는 조항을 내세워 협정을 거부하고 나섰다. 게다가 미국은 즉시 독립을 제안했지만 소련이 이를 거부했다고 모략까지 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발끈한 소련은 협정과정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을 깨면서까지 협정과정을 밝히면서, 미국이 10년의 신탁통치를 해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연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들은 임시정부에 대해 후견을 하되 그 기간은 짧을수록 좋다고 했으며 그 기간은 5년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고 폭로했다.
이리하여 남조선의 정치는 이 신탁통치 문제를 계기로 이른바 좌익과 우익이라는 양분논리가 생겨나고 남북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분열은 몇 년 후에 동족상잔이라는 전쟁을 겪게 되었고 반세기가 훨씬 넘는 민족분단이라는 비참한 비극을 마주하고 살게 되었다.
밝아오는 46년의 새해는 이른바 찬탁ㆍ반탁이라는 건널 수 없는 골을 파놓고 혈투가 전개되는 해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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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5) 엄밀히 따진다면 이북에 있는 일본군을 직접적인 전투로써 무찌른 부대는 소련군 극동군에서 운영하던 조・중・소가 국제연합군의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로서, 이 부대의 점령이라고 할 수 있지, 일본이 항복하고 들어온 소련군은 역시 주둔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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