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뉴스가 주최하고 평화3000이 후원한 ‘6.15공동선언 11주년 기념 통일뉴스 방북기 공모전’(5.21-6.20)에서 3편의 수상작이 결정됐다. [관련기사 보기]
대상 격인 '민족상'을 받은 박경식 씨의 '개성가는 길'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박연폭포(朴淵瀑布)


▲ 박연폭포는 장대하여 그 소리까지 시원시원하다. [사진제공 - 박경식]
자남산 언덕길은 주석상 앞에서 좌우로 갈라진다. 좌로 가면 천마산, 우로가면 선죽교와 고려박물관으로 간다. 우리 일행은 차량 다섯 대씩 두 개 조로 나뉘었는데, 우리 조는 오전에 박연폭포를 갔다.

좌로 꺾은 북안동길, 남대문이 고즈넉하다. 남대문은 한국전쟁 때 불탄 것을 5년 뒤에 복구했다고 한다.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짐작할 수 있는 루(樓)가 있으며, 루에는 1346년 주조했다는 연복사 종이 걸려있다. 연복사가 소실된 후에 옮겼는데 조선 5대 명종의 하나로 꼽는다. 성덕대왕 신종이나 상원사종 못지않다는 이야기다. 그 울림이 길고 아름다워 사방 40㎞까지 퍼졌다고 하니 대단했었나 보다. 소리를 들을 수 없어 아쉽지만 어쩌랴!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음을 위안으로 삼는다.

개성 남대문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서울 남대문에 비하면 단촐하다. 서울 남대문은 처마의 어처구니까지 화려한데 비해 개성 남대문은 소박하다. 현판글씨는 한석봉이 썼다고 한다. 한글자 한글자가 짜인 틀을 넘지 않는 절제미가 돋보이고 그 속에서 힘이 꽉 차 역동적이다.

남대문 길 건너에는 점심을 먹게 될 통일관이 퍽이나 장대해서 식당 같지 않았다. 전통을 차용하여 기와를 올린 지붕에 처마가 날렵하고, 높이가 우뚝할 뿐만 아니라 벽면을 화강석으로 마감해 처음에는 박물관인줄 알았다.

개성시내를 벗어나 동북으로 달리면 꼬불꼬불한 산길로 이어진다. 다락밭을 메운 옥수수와 콩을 안고 샛길들을 버스는 곡예를 하면서 간다. 좁은 길을 나뭇가지가 에워싸 이파리 스치는 소리 요란하고 요철이 심해 덜컹하며 재주도 넘어야 한다. 완만한 산등성엔 척박했던 비무장지대(DMZ)를 무색케하는 나무숲이 울창하다. 언덕에서 바라보는 내리막의 짙푸름엔 눈이 절로 아찔해진다.

인적 없는 굽이길을 40여분 달렸을까, 잘 단장된 주차장이 나왔다. 그곳에는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길이 7~8m, 폭 1.5m는 됨직한 화강석 하나가 병풍처럼 서있다. 박연폭포에 대한 설명과 문화사적지를 잘 보존할 데에 대한 교시가 빼곡하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야 하는데 완만한 산길은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다. 현대아산의 현장소장은 일주일전까지는 이 길이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고 했다. 소장이 개성시인민위원회를 닦달해도 “일없다”는 답을 받기 일쑤였다고 한다. 날이 다가와 몸이 달은 소장이 시범관광일자를 연기하자고 했지만 북측은 그럴 필요는 없다고 딱 잘라 말해 아연실색했다 한다.

그리고 어제, 마지막 답사를 왔는데 길이 잘 닦여있어 소장이 “도대체 어떻게 한 거요”하고 물었다 한다. 개성시 인민위원장은 쓸 데 없는 걸 묻는다는 듯 쳐다보며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고 답해 머쓱했다고 전했다.

산길은 만족하게 잘 정리되어 있어 걷는데 포근함이 붙었다.

20여분 정도 더 들어가야 박연폭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박연폭포에 이르는 길을 걷는 내내 놀라야했다. 산길 양쪽 끝에 놓여있는 개성시민들의 지극한 정성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폭이 2~3m 남짓한 길 좌우 끝에 어린애 주먹만한 조약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열지어 놓았는데, 끝나는 곳까지 이어져 모두들 감탄했다.

기계로는 할 수 없고 오직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한 것이라 감동을 받은 것이다. 남측의 손님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개성의 인민들이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는 참사와 현장소장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었다.

그런데 개성시민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박연폭포까지 빼곡하게 조약돌을 놓으며 무엇을 염원했던 것일까? 그 염원의 일단을 보여 주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험한 길이 아니라서 위험을 표시하려는 건 분명 아니었다. 길가 양옆에 나란하게 늘어놓은 조약돌로 혹 상징하여 전하고 싶은 내용이 있던 것일까?

초라한 외양이지만 어둡지는 않았던 같은 민족의 다른 모습이 떠올랐다. 손을 흔들던 넉넉함도 덧붙여진다. 내내 그들이 보여주고 전하려 했던 것들을 잡아보려 애쓰게 하는 산길이었다.

▲ “여행자여, 우리 해동미의 훌륭함을 알아야 한다.” [사진제공 - 박경식]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위치한 박연폭포는 장대하여 그 소리까지 시원시원하다. 세월의 깊이만큼 패인 고모담은 출렁이는 검푸른 물결로 인해 그 속을 알 수 없다. 쏟아지는 물줄기는 가까이 하기 어려운 위엄을 지녔으며, 바위에 새겨진 연륜들은 절로 머리를 숙이게 한다.

한여름의 푸르름이 공간을 감싸 도는데 황진이 감던 머리카락으로 새겼다는 글씨는 시간을 뛰어넘어 훌쩍 다가온다.

“여행자여, 처산(중국의 명승지)을 높이지 말고 우리 해동미의 훌륭함을 알아야 한다.”

제 나라, 제 고장의 아름다움을 똑바로 알라는 시공을 건너뛴 경구가 어찌 당대에만 한할까. 연못 바위들엔 세월의 이끼가 가득하여 제 민족의 줏대를 깨닫지 못하는 후손들에게 미끌어지는 경고를 하며 감히 범접할 수 없게 한다.

게다가 매섭게 꽂히는 물줄기는 비산하여 물보라로 허공 가득 무지개를 만들어 경이로운 세계를 구성한다. 무지개는 구약성서에서 신이 인간에게 전하는 약속의 징표라고 하지만 이곳에선 국토와 민족, 선인(先人)과 후인(後人)사이에 맺어지는 염원의 약속이다.

고모담을 끼고 동쪽으로 돌아 오르면 쏟아지는 물길 못 미치는 언덕에 작은 정자가 있다. 칠색단장을 새로 한 범사정이다. 화사한 정자에 앉아 서쪽 산턱을 보면 장엄히 눌러앉은 용암바위를 만난다. 거대한 바위가 쏟아질듯 하지만 몇 백 년을 지켜왔다. 세월도 어쩌지 못한 자연의 조화가 사람을 경건하게 만든다.

범사정에서 떨쳐 일어나 폭포위로 오르면 작은 연못 ‘박연(朴淵)’이 있다. 고모담에 비하면 작기만 한데 왜 옛 사람들은 박연폭포라고 했을까? 박연에 얽힌 사연이 더욱 깊은 것일까? 박연을 바라보아도 대답은 없다.

박연에서 내려가는 수직의 물기둥아래에는 물과 바위 사이 공간이 있다. 바닥에는 너른 바위가 있어 옛날부터 이곳에서 술자리가 벌어졌다고 한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것. 더구나 웬 떡인가. 흐르는 물가에서 한복 입은 여성봉사원들이 ‘조깝데기술’을 팔고 있다. 떨어지는 물길을 보며 과거를 되새기는 한 잔의 술이 풍요하다. 혀끝에 감기는 ‘조깝데기술’ 특유의 달착지근함이 옛 사람들의 풍류(風流) 못지않다.

더구나 현대아산의 현장소장이 함께 있다. 박소장은 개성공단과 함께한 살아있는 역사다. 여성봉사원들이 반색 하며 반긴다. 원님 덕에 나발을 불어본다. 소장이 부탁하니 도토리묵을 무치고 명태를 찢어서 개성고추장을 담뿍 묻혀 내어준다. 양이 적으니 다른 이들은 언감생심. 그래도 많은 눈은 호랭이보다 무섭다. 묵 한 접시, 술 한 대접을 탁발승 동냥하듯 냉큼 마시고는 발길을 부여잡는 아쉬움을 떨치고 관음사(觀音寺)로 향했다.

관음사(觀音寺)

▲ 1636년에 복원한 관음사는 못을 전혀 쓰지 않고 목재만을 사용한 건물로 알려져 있다. [사진제공 - 박경식]
성거산과 천마산 사이 계곡길은 바위로 이어진다. 천마산은 고려시대에는 방어용으로 기능하여 성벽을 둘렀었다고 한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세(勢)가 험해 전략적 요충지로 보인다. 성곽에 쓰였던 바위들이 흔적으로 남아 흩어져 있다. 또 물과 산을 좋아했던 선비들이 자주 찾았던 듯 바위들엔 허망한 이름도 새겨져 있다. 아마 시간을 거스르려했던 인간의 욕심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8월말 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산중의 무성함 때문에 걸을 만 하다. 흐르는 물소리와 허공의 기암절벽이 시원함을 더해 나이든 양반들도 곧잘 걷고 있다. 바위틈을 헤치며 물은 아래로 흐르고, 나무사이 구름은 하늘에서 흐른다. 종당에는 모두 아래로 향할 텐데, 인간은 잦아지지 않는 욕심 탓에 발길을 자꾸 산위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돌 틈을 밟아가며 30여분을 오르면 970년에 세웠다는 관음사가 나온다. 현재 건물은 1636년에 복원한 것으로 못을 전혀 쓰지 않고 목재만을 사용한 건물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과 승방, 그리고 천연굴인 관음전으로 이루어진 작은 사찰이다. 주지 스님은 붉은 가사를 두른 단심(丹心)으로 절을 지키고 있다. 절 마당엔 세월의 풍설(風雪)에 형체가 깎여 모습이 온전치 못한 돌탑이 사뭇 고요하다. 여지없이 득도(得道)한 고승이다.

▲ '보물유적'인 관음사 칠층탑 앞에서 포즈를 취함 필자. [사진제공 - 박경식]
대웅전 왼쪽에 관음전이 있는데 자연 동굴 속에 관음상을 모셔 놓았다. 깜깜한 동굴을 촛불과 함께 밝히는 보살은 푸근한 미소로 사람을 맞는다. 사람들은 신기한 듯 그저 카메라를 눌러댄다. 나는 문화재 팻말이 박힌 풍화된 돌탑에 관심이 더 간다. 누렇게 바랜 돌탑은 보살에 떠밀려 관심을 덜 받지만 산꼭대기 햇빛을 온몸에 새기며 또 다른 신념을 지키는 듯하기 때문이다.

험한 산꼭대기에 절을 세운 까닭이야 으레 그렇겠지만 이 높은 곳에 굳이 돌탑을 세운 이유는 짐작하지 못한다. 간절한 수직의 염원은 더 많은 인간의 정성으로 받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대부분의 탑들은 산꼭대기보다는 세상 속을 향했던 것이 아닌가한다. 조선의 탑은 탐욕을 섞어 하늘 끝에 도전하는 서구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의 염원을 한곳에 집중하는 수직의 마음기둥일 뿐. 저 돌탑은 어떤 심원(心願)인 것일까? 민족의 비나리를 얹어놓고 내려오는 길 주지스님의 합장한 손끝도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통일관(統一館)

다섯 대의 버스는 규모가 작은 것이 아니었다. 꼬리를 물고 다니는 통에 개성 인근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벌판에서 축구하던 아이들이 동작을 멈추고 바라보는 까만 눈이 반짝인다. 집과 집이 담장 없이 이어져 마당은 공동으로 쓸 수 있는 곳은 아마 협동농장인 듯했다. 궁색한 산골에서 괜찮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소년궁전이라고 현대아산 관계자가 일러준다. 꼭두새벽에 나와 산속을 헤맨 탓인지, 길가 막 알을 밴 옥수수마저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도착한 곳은 개성시 남문동 통일관. 건물의 장대함에 박물관인 줄 알았던 곳이다. 맵시있게 한복을 입은 봉사원들이 반겨준다. 널찍한 안은 500명이 한번에 식사가 가능하다고 한다. 식탁에는 1인당 7첩 반찬이 놋그릇에 담겨있다. 이 놋그릇에 일일이 반찬을 담은 것도 정성이 아니었을까. 약밥에 조랭이떡, 김치, 장조림과 나물이 깔끔하다.

치마꼬리를 말아 쥔 지배인이 밥과 국을 든 봉사원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따뜻한 쇠고기미역국에 한 그릇의 밥을 상에 올리며 휘몰아친다. 밥알을 본지 오래라서 모두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운다. 음식 칭찬은 배를 채운 후에야 하니 어지간이들 허기가 졌었나 보다. 얼굴이 뜨뜻해진다.

통일관 정문에서 우측을 올려다보면 개성시 소년궁전이 제일 눈에 띤다. 이 건물을 보면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현대의 현장관리소장은 어느 곳을 가더라도 어려운 형편에도 소년궁전을 우선하는 북측 사람들에게 놀랐다고 했다. 하긴 천마산 가던 산골마을도 소년들이 놀던 곳은 달랐다. 어린이를 우선하는 마음은 앞날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아닐까? 개성 소년궁전에서 “래일을 위한 오늘을 살아가는”사람들을 보았다.

점심시간이라 거리에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사거리에 흰 옷을 입은 교통안전원도 등장했다. 분주하게 오가던 사람들도 식당앞 방문객들에게 손을 흔든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떼를 지어 손을 흔드는 진풍경이 정겹지 않다면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다. 북측 사람들의 진심이 남측의 방문객들에게 전달된 것이 아닐까? 손을 흔들어주며 참사의 안내를 따라 개성백화점을 지나 숭양서원으로 향했다.

개성에서 소학교를 다녔다는 어떤 실향민은 개성시내를 활보하는 것이 꿈만 같다고 한다. 민속려관 근처에서 살았다면서 자남산 달맞이 이야기, 남대문 근처에서 숨바꼭질하던 이야기를 하며 시종 과거를 헤맨다. 더구나 시범관광단에서 근 60년 만에 소학교 동창을 만나 행여 놓칠까봐 주름진 손을 꼭 잡고 다녔다.

숭양서원 가는 길목의 집 문패들은 내 눈길을 놓아주지 않는다. 개성 남문로 △△전투장 노력영웅, 남문로 ○○탁아소 □□영웅 집이다. 문패가 주소와 이름만 밝히는 것으로 생각했던 내 관념은 고루했었다. 자기 잇속을 차려 사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의 필요에 헌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재를 알릴 수도 있음을 알았다.

동네의 알림판도 그 쓰임새가 달랐다. 상품판매광고나 공공기관의 공지사항을 알리는 것이 아니다. 동네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관심사에 자원하는 사람들 알림판이다. 어떤 유치원 선생이 방학동안 원생들 수영모임을 주관한다며 참여를 독려하고, 어떤 교사는 자기 반의 어린이가 선행을 했다고 본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알린다.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있다. 촌스러운 안내판에 진정이 담긴 문구들이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말이 구호만이 아니었음을 알게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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