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뉴스가 주최하고 평화3000이 후원한 ‘6.15공동선언 11주년 기념 통일뉴스 방북기 공모전’(5.21-6.20)에서 3편의 수상작이 결정됐다. [관련기사 보기]
대상 격인 '민족상'을 받은 박경식 씨의 '개성가는 길'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도라산출입사무소



▲ 철망과 바리케이트로 겹싸인 자유로의 끝 통일대교. [사진제공 - 박경식]
자유로가 끝나는 곳, 임진강을 가로지른 통일대교엔 완전무장한 군인과 쇠꼬챙이를 사정없이 박은 바리케이트가 살벌하다. 다리를 건너면 민간인 통제선 구역이다. 다리 건너 보이는 도로표지판 화살끝은 둘로 갈라져 있다. 바로가면 판문점이고 왼쪽은 도라산 출입사무소(CIQ)다. 새로 칠해 선명한 노란색 화살표가 눈을 찌른다. 여기서부터 어머니 고향땅이다.

장단은 옛날부터 콩으로 유명했다. 두부를 만드는 장단 백태콩은 으뜸으로 꼽힌다. 맛과 영양이 뛰어나서 가격도 더 쳐준다했다. 임진강이 서해로 빠지기 전 여기서 숨을 고르며 완만하기에 땅이 기름지다. 더욱이 물이 잘 빠지는 토질은 콩농사에 적격이다. 하지만 분단은 후세 사람들에게 장단의 콩맛을 잊게 했다. 장단콩을 역사에서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세계에서 콩을 재료로 하여 가장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는 민족은 우리 민족이다. 콩음식의 기원 또한 오래다. 음식문화가 전하는 의미는 콩의 주산지 만주가 우리 민족의 주 활동 무대였음을 뜻한다. 또 콩 두(豆)의 의미는 우두머리, 시원, 시작이며 우리 민족이 천손(天孫)임을 뜻하는 것이라 한다.

고고학은 우리 민족의 콩 재배가 기원전 2000년경에 시작되었다고 밝혀냈다. 청동기 고조선 시대 유물에서 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중국 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더 후대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콩 재배법은 조선이 중국에 전해주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중국 사서(史書)도 기원전 600년경 제(濟)나라가 동이(東夷)에게서 콩을 가져왔다고 기록했다.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남북왕래의 관문인 장단에 사물의 시원을 뜻하는 콩 재배가 왕성한 것이 우연인 것일까. 우연을 자꾸 필연으로 만드는 노력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온전한 민족의식을 갖출 때 비로소 국제무대에서 제대로 행세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의 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무릇 천하의 대세는 나뉘어진 지 오래면 반드시 합치고, 합친 지 오래면 나뉘어지는 법이다)을 다시 새기게 된다.

▲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 출경동 모습. [사진제공 - 박경식]
도라산 출입사무소(CIQ)는 개성공단 건설과정에 급조되어 좁고 번잡하였다. 더구나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몰리기는 처음이라 다들 정신을 못 차린다. 때문에 남과 북, 북과 남이 자유롭게 오갈 때를 대비하여 부지를 고르고 다져 새 건물을 올리려 하고 있었다. 중장비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까닭은 혹 그날을 앞당기려는 노력은 아닐까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수속을 밟기 위해 나누어 준 방북증을 확인하니 번호가 U자로 시작한다. 왜 K나 Kr이 아니고 U자인 것일까? 여권(旅券)은 K나 Kr은 아니지만 지역 및 종류에 따라 S나 다른 철자로 시작한다. 하지만 방북증은 시작번호가 U자로 매겨진다.

알아보니 방북신청을 통일부에 하지만 군사분계선(MDL)통과문제는 유엔사에서 담당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통일부는 국방부에, 국방부는 유엔사에, 유엔사는 북측군부와 협의하는 절차를 거쳐 승인을 한다는 것이다. 승인주체가 남측은 유엔사이기 때문에 방북증 번호가 U로 시작한다는 말이다. 분단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준다. 항상 현상은 본질을 내포하기 마련이라는 철학 원리를 여기도 보여 준다.

수속을 마치고 버스에 오르자 운전기사가 버스 우측에 황색깃발을 달고 있다. DMZ를 통과할 때 비무장임을 알리는 국제적 신호라고 한다. 비무장지대에서 차량의 속도는 제한되고 멈춰서도 안 된다 한다. 사람들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하다.

아홉시 정각. GP완장을 찬 군인들이 선도 차량인 지프(Geep)차에 올라타자 굳게 닫혔던 철책문이 좌우로 열린다. 드디어 출발한다. 버스 안에는 침묵과 함께 딱딱한 긴장이 넘친다. 남북연결도로가 잘 단장되어 있어 긴장감을 더해주었다.

‘달리고 싶다’던 철마가 세월의 빨간 녹에 뒤덮여 있다. 찢어진 화통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려 지난했던 세월을 여실히 드러낸다. 보기 좋게 자란 무성한 나무들을 넝쿨들이 푸르름으로 휘감고 있어 밀림을 연상케 한다. 현대아산 직원들은 군에서 초여름에 정리했는데도 저리 무성하다고 설명했다. 때만 되면 저렇게 넝쿨로 서로를 감싸는 것이 자연의 본성이라면 언제나 서로를 찾는 것은 민족의 본성이 아닐까.

위장막을 뒤집어 쓴 GP건물이 이내 숲속에서 나타나 적막을 깬다. “개성공단으로 우리 마음속 38선은 무너졌다”던 『말』지 김종배 기자의 선언이 무색해진 것일까? 마음의 38선은 무너졌지만 여전한 물리적 철조망이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여준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길이 피로 얼룩진 길임을 위장막에 숨어있는 GP는 증명한다.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며 이 길을 넘었던 김구 선생은 분단론자의 총탄에 쓰러졌다. 또한 분단을 막으려 했던 수많은 선배들도 이 길에서 피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아스팔트 위의 점점한 얼룩이 핏자국으로 보인다. 남과 북을 관통하는 철로위의 햇살마저 붉게 여겨진다.

붉게 여겨지는 햇살은 10여 분만에 나타나는 노란선 때문에 홀연히 사라진다. 까만 아스팔트와는 보색으로 대비되어 더욱 뚜렷한 선은 도로 한복판에 견고하게 누워있다. 역사가 명백하게 기억하는 군사분계선(MDL)이다. 지난 60여 년을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고 인생마저 고통에 몸부림치게 한 고난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 선은 피칠갑을 한 붉은색이 아니고 노랗다. 도로위에 그어진 짧고 노란 선일뿐이다.

저 선을 그악스럽게 움켜쥐고 목매는 자들은 누구인가? 혹, 저 선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잔인함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 내부에 키워져왔던 맹목적 반북의식일지 모른다.

그 선 앞에서 남측 지프는 발길을 돌리고, 선을 넘으면 북측 지프가 안내하기 시작한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풍경은 달라진다. 사천강 다리 못미처부터 나무 없는 붉은 언덕이 나타났다. 엄혹한 화공작전과 겨울 땔감으로 베어버렸기 때문에 황량하다. 더구나 개성지역 토양은 마사토라서 팍팍하고 그 때문에 더욱 삭막하다.

붉은 언덕 한 곳에는 소년병사가 부동자세로 서있는데 눈망울과 눈길이 마주칠 정도로 가까이다. 북측 안내원들이 비무장지대(DMZ) 통문 안에서 버스마다 올라타고 인원을 점검한 후 철책문을 열었다. 도착한 곳은 북측 출입사무소(CIQ). 휑한 벌판에 컨테이너가 몇 개 이어져 있다. 여기도 임시사무소라고 한다. 남측과 똑같은 출입사무소를 건설하고 있다.

컨테이너 사무실에는 군복을 입은 세관원들이 검사를 한다. 남측 CD나 고화질 카메라는 놓고 가야 한다. 다양한 디지털 카메라에 관심을 갖고 이것저것을 묻는다. 최신형이 어떤 것인지를 따져본다. 덕분에 방문객들은 긴장이 풀어져 좌우를 둘러보고 웅성대는 여유를 갖는다. 처음 찾는 방문객들에게 건네는 세관원들의 배려인 것일까?

개성공단(開成工團)

▲ 개성공단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사진제공 - 박경식]
개성시내로 갈 때 거쳐야만 하는 개성공단 백만 평은 말로 듣기보다 실재(實在)를 보아야 알 수 있다. 입구에 위치한 시범단지만 완공된 까닭에 허허벌판인데도 공단입구에서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출구에 경계해 있는 흥륜산 아래에는 포크레인, 불도저, 덤프트럭들 중장비가 분주하다. 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고 다리를 놓고 바위를 깨어 땅을 메우는 역사(役事)아닌 역사(歷史)를 쓰고 있는 중이다.

관심을 가지고 보면 남북의 합심(合心)이 구체적이다. 남북 노동자들이 함께 돌을 깨고 삽질하며 노동으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관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지난 반목과 불신의 50년 역사에서 남북의 민족이 한반도 어느 땅에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노동으로 손발을 맞춰 일한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백만평에 그치지 않고 2단계, 3단계 공단조성에 이어 개성시내에 주거지역을 조성하여 2천만평에 달한다 하니 어찌 이를 다시 쓰는 민족의 역사(歷史)라 하지 않을까.

▲ 남과 북의 노동자들이 함께 건설 중인 개성공단 안의 한 건물. [사진제공 - 박경식]
남측이 만약 파주나 문산에, 단 백만평 아니 십만평이라도 북측에 허용하는 경제특구를 조성하겠다면 어떨까. 아마 군사적 요충지라며 안 된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목청을 높일 것이다. 행여 말이나 할 수 있을까? 그에 비하면 전략적 요충지인 개성을 개방한 북측이 훨씬 대범하다고 할 수 있다.

북측은 개성을 내놓은 까닭에 방어선 병력운용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전방병력을 완전히 철수할 수 없어 일부 병력은 잔류시키고 개성시 후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설정했다 한다. 더구나 개성시내에서 남과 북의 민간인들이 공존하는 까닭에 곤혹스러워한다고 했다. 봉동에 위치한 보급부대의 이전 이야기도 그런 어려움을 드러낸다.

사람이란 원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고 하는 속성이 있다. 하지만 상대가 양보하면 역지사지하기 마련이다. 최소한의 염치조차 없고 제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 사람들만 입장 바꿔 생각할 줄 모른다. 예의로 상징되던 우리 민족에 염치없는 사람들이 어느 사이엔가 너무 많아졌음이 부끄러워진다.

시범공단과 건설현장 노동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버스는 출구를 향해 달렸다. 출구의 검문소를 지나면 봉동이다. 공단에서 시내를 갈 때 거쳐 가는 동네다. 판문점에서 바로 개성시로 갈 수 있지만 그곳은 유엔사 관할이다. 돌아가는 이유 중 하나다.

봉동이 처음부터 개성시로 편입된 것은 아니라 한다. 봉동은 남측의 도라산 전망대에서 보이는 가정동 마을과도 멀지 않다. 오히려 장단쪽에 가까워 과거에는 장단의 일부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을에는 낡은 지붕의 살림집들이 도로를 따라 정렬해있다. 큰 길로 나오는 골목에는 해맑은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들이 가득한 궁금함으로 꽉 차 있다. 담장에는 고개까지 삐죽 내밀어 신기한 듯 바라보는 아낙네들도 보인다.

그들을 바라보며 가는 길에 불쑥 봉동역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남측 도라산역과 개성역 사이에 위치한 간이역이다. 봉동이란 이름이 친근하여 익숙한 느낌이다. 길가 작은 상점에서 채소를 파는지, <남새상점> 간판도 낯설지 않다. 색감은 유치한데 반갑고, 글씨체가 옆으로 누워서 달리려는 듯 보인다. 건물을 끼고도는 담벼락은 기름을 판다고 하는데 주유소 표시다. 건물과 건물사이 광장에도 제법 사람들이 모여 있다.

광장 뒤 벽에 새겨진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구호는 이 사회를 관통하는 낙관과 의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마침 잎이 넓은 가로수가 그늘을 지게 하는데 키가 높아서 시원해 보인다. 험한 길을 웃으며 가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봉동 고갯길을 넘으면 좌우로 펼쳐진 나지막한 구릉을 따라 마을들이 모여 있다. 덕평동이다. 넉넉한 배추는 밭에서 벼는 논에서 푸르게 물결친다. 남측 손님들을 맞기 위해 봉동과 덕평동, 개성시민들이 환경미화에 큰 정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안내 참사는 정성을 다하는 것은 손님을 맞는 주인의 예의라고 덧붙인다. 예의는 예의로 받아들여야 정성에 대한 결례가 아닐 것이다. 예의를 정치적 수사로 이해하는 경우를 보아왔기에 괜한 자격지심이 들었다.

개성시 진입로엔 개성-평양간 고속도로가 높은 교각위에 직선으로 뻗어간다. 교각아래 도로엔 화살표가 누워있어 시선을 붙든다. 남으로 판문점, 북으로 평양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길가의 표지마저 의미를 두려하니 이곳은 처음 밟아보는 한반도의 또 다른 조국 땅이 분명하다.

버스는 좌회전하여 시내로 들어섰다. 왼쪽에는 냇물이 흐르는데 맑기 그지없다. 개울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도 있다.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라 사람들이 신기해도 하고 어처구니없어도 한다. 개성은 평양, 남포에 이은 북측 제3의 도시라고 한다. 5층의 아파트나 단층살림집도 있고 공공기관인 듯 대형건물도 제법 있는데 도시외관에도 불구하고 개울에서 빨래하는 모습은 뜻밖이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는 저발전이라 규정하겠지만 자연을 해치고 인간을 파편화해 자본의 공세에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발전과 성장은 아니지 싶다.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H.N 호지 여사는 『오래된 미래』에서 과거가 우리의 미래를 보여준다고 했다. 과거를 고집하는 경향은 있지만 답습만 말하지 않는 그녀는 ‘사회통합’이 ‘지속가능한 발전’의 대원칙임을 강조했고 ‘부자나라’보다 중시해야 할 가치가 있음을 주장했다. 과연 공동체적 삶과 차이를 존중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궁금하다.

개성시민들이 손을 흔들어준다. 환대하는 진심이 읽혀진다. 정면에 임산부가 누운 형상이라는 송악산(松嶽山)이 웅장하다. 그 아래 자남산(子男山)이 있고 자남산 언덕길엔 주석상이 시내를 바라보고 서있다. 주도로는 시원시원하고 좌우 인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어 활기가 있다. 천연색사진관 간판이나 거리모습이 과거의 시공으로 이끌고 온 것 같다.

시간을 거슬러 온 기분이지만 외래어로 덮인 서울 거리와 뚜렷하게 구별되어 눈길을 끈다. 서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함과 자기를 잃어버린 망각의 거리라면 여기는 무어라 할 수 있을까? 한 건물에 눈에 익은 영화그림 간판이 걸려있다. 익숙한 것을 보니 틀림없는 영화관이다. 영화는 누가 보러오는 것일까? 주의 깊게 바라보니 대부분 단체관람이다. 직장, 학교, 지역 단위로 관람하며 영화평까지 한다고 한다. 혹 모두를 탁월한 영화평론가로 만들려는 것은 아닌가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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