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가 있나 하다못해 춘향전 한 권도 없어-
평생 영화 구경 못 한 사람 수두룩

농촌에는 오락시설이 없다. 기껏해서 장기나 화투가 있지만 그것도 그리 흔하지 않다 몇 백환의 돈을 들이면 쉽게 마련할 수 있는 오락기구도 십 환짜리 한 푼이 몹시 아쉬운 그들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매스컴도 그들을 외면하고 있다. 소설책 한 권 없고 마음의 양식이 될 신간서적 하나 없다. 농촌문화란 황무지에 가까웠다.

공공집회소하나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않은 농촌에 문고니 문화관이니 하는 것도 구경할 수  없었다. 글자를 매개로 하는 성질의 모임이 있다면 몇몇 크리스챤들의 일요예배를 위한 모임뿐이다 농촌에 있어 유일한 매스컴의 전당인 회관은 가혹하게 헐린 초라한 모습으로 스쳐가는 찬바람에 쓸쓸할 뿐이었다.

전북 정읍군 감곡면 방교리의 경우 회관이라고 불리는 이 매스컴의 기능은 3.1부정선거를 전후하여 경찰관이나 세도있는 사람들이 부락민을 강제동원시켜 애국애족의 기발한 궤변을 토한 일이 있을 뿐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는 단 한번도 사람이 모여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달아나고 흙벽이 무너진 채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죠. 신문이 있습니까. 라디오가 있습니까. 하다못해 뭐 춘향전 한권이라도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방에 누가 뭣하러 모이겠습니까" 이 마을의 이장은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문짝이 달아나고 흙벽이 무너졌어도 누가 성의를 내어 고치겠느냐는 것이었다.

신문 구독 상황을 보면 1만7천의 인구를 가진 김제군 봉남면에 겨우 백장 남짓했다.
1백7십여명에 한 장꼴의 신문구독이다. 그것도 면직원 학교교원 그리고 지서나 수리조합 직원들이 구독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실제 흑을 파는 사람들의 신문구독은 4백명에 한 사람 꼴도 못되는 형편이었다.

라디오를 가진 농가는 찾기가 어려웠다. 전기가 안들어가는 캄캄한 농촌에 라디오가 있을 리 없다. 몇몇 대농과 특수층에서 건전지용 라디오를 가졌다는 말은 들었어도 지게를 걸머지는 농사꾼의 집에 라디오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일 년에 단 한번이라도 영화구경을 하였다는 사람은 몇 십 명에 한 사람 꼴이었다. 그것도 미국 공보원에서 순회상영한 기록영화나 선전영화를 구경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위 문화촌의 얘기다. 산촌에 가면 평생을 두고 '활동사진' 구경 한 번 못했다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 문화시설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흙과 땅에 붙은 초가집만의 농촌 [캡쳐-민족일보 1961년 2월 21일자]

이러한 문화의 볼모지에서 그들은 어디에다 오락을 구하고 있을까.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농촌에 소단위별로 '텔레비전'을 골고루 나눠 주고 있는가 하면 그 외 여러 면으로 문화수준이 향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농한기에 활발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도박의 악습을 제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문 한 장 볼 수 없고 영화 한 번 구경할 수 없는 우리농민들에게는 꿈같은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문화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 하나 없는 오늘의 호남지방에는 술과 언쟁 그리고 노름이 한창이었다.

술은 그들의 불안한가슴에 약이 된다는 것이었다. 몇 잔의 막걸리를 들이키고 보면 온갖 근심걱정이 깨끗이 가신다는 것이다. 언쟁은 또한 심심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다툼에 권태로운 그들의 생활에 멋진 오락의 일종이라는 설명이었다. 노름역시 다시없는 생활의 흥미라는 것이다. 몇 백 환의 밑천으로 판을 벌이는 노름은 자극없는 그들의 생활에 흥미를 돋군다는 것이었다.

"장땅을 잡고 판을 쓰는 맛은 우리에게 있어 유일한 맛"이라고 어느 농부는 말하는 것이었다. 이바람에 부작용은 사정없이 일어나 살림살이를 엉겁결에 날려버린 예가 허다하다고 한다.

투전목 죄는 맛에 가산을 탕진한 그들은 양지받이 울타리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초점 잃은 시선을 먼 하늘에 던질 뿐이었다.

(장석진 씀)

(민족일보 1961년 2월 21일자)

 

▲ [캡쳐-민족일보 1961년 2월 21일자]
農村의 印象 ③
農村文化란 全혀 荒蕪地
=「라디오」가 있나 하다못해 春香傳한卷도 없어=
平生 映畵求景 못한사람 수두룩

농촌엔 오락시설이 없다 기껏해서 장기나 화투가 있지만 그것도 그리 흔하지 않다 몇백환의 돈을 들이면 쉽게 마련할수있는 오락기구도 십환짜리 한푼이 몹시 아쉬운 그들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매스콤」도 그들을 외면하고있다. 소설책 한권없고 마음의 양식이 될 신간서적하나없다 농촌문화란 황무지에 가까웠다.

공공집회소하나 제대로마련되어 있지않은 농촌에 문고니 문화관이니하는것도 구경할수 없었다 글자를 매개로 하는 성질의 모임이있다면 몇몇 「크리스찬」들의 일요예배를 위한 모임뿐이다 농촌에 있어 유일한 「매스콤」의 전당(殿堂)인 회관(會館)은 가혹하게 헐린 초라한 모습으로 스쳐가는 찬바람에 쓸쓸할 뿐이었다.

전북정읍군감곡면방교리(全北井邑郡甘谷面芳橋理)의 경우 회관이라고 불리는 이 「매스콤」의 기능은 三·一부정선거를 전후하여 경찰관이나 세도있는 사람들이 부락민을 강제동원시켜 애국애족?의 기발한 궤변을 토한 일이 있을뿐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는 단 한번도 사람이 모여본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문짝이 달아나고 흙벽이 무너진채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수밖에 없죠 신문이 있습니까 라디오가 있습니까 하다못해 뭐 춘향전 한권이라도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방에 누가 뭣하러 모이겠습니까」 이 마을의 이장(里長)은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문짝이 달아나고 흙벽이 무너졌어도 누가 성의를 내어 고치겠느냐는 것이었다.
신문 구독 상황을 보면 一만七천의 인구를가진 김제군봉남면에 겨우 백장남짓했다.
一백七십여명에 한 장꼴의 신문구독이다 그것도 면직원 학교교원 그리고 지서나 수리조합 직원들이 구독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실제 흙을 파는 사람들의 신문구독은 四백명에 한사람꼴도 못되는 형편이었다
라디오를 가진 농가는 찾기가 어려웠다 전기가 안들어가는 캄캄한 농촌에 라디오가 있을리없다 몇몇 대농과 특수층에서 건전지용 라디오를 가졌다는 말은 들었어도 지게를 걸머지는 농사꾼의 집에 라디오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일년에 단 한번이라도 영화구경을 하였다는 사람은 몇十명에 한사람꼴이었다 그것도 미국공보원에서 순회상영한 기록영화나 선전영화를 구경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위 문화촌(文化村)의 얘기다 산촌에 가면 평생을 두고 「활동사진」구경한번 못했다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이러한 문화의 볼모지에서 그들은 어디에다 오락을 구하고 있을까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농촌에 소단위별(小單位別)로 「텔레비젼」을 골고루 노나 주고 있는가 하면 그 외 여러면으로 문화수준이 향상되었을뿐만 아니라 농한기에 활발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도박의 악습을 제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문한장 볼 수 없고 영화한번 구경할수없는 우리농민들에게는 꿈같은 얘기가 아닐수없다. 문화라고 이름할수있는 것 하나없는 오늘의 호남지방에는 술과 언쟁(言爭)그리고 노름이 한창이었다.

술은 그들의 불안한가슴에 약이된다는것이었다 몇잔의 막걸리를 들이키고보면 온갖 근심걱정이 깨끗이 가신다는 것이다. 언쟁은 또한 심심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다툼에 권태로운 그들의 생활에 멋진 오락의 일종이라는 설명이었다. 노름역시 다시없는 생활의 흥미라는것이다 몇백환의 밑천으로 판을 벌이는 노름은 자극없는 그들의 생활에 흥미를 돋군다는 것이었다.

『장땅을 잡고 판을쓰는 맛은 우리에게 있어 유일한 맛』이라고 어느농부는 말하는것이었다 이바람에 부작용은 사정없이 일어나 살림살이를 엉겁결에 날려버린 예가 허다하고한다.

투전목 죄는 맛에 가산을 탕진한 그들은 양지받이 울타리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초점잃은 시선을 먼 하늘에 던질뿐이었다.

(張錫珍記)

(民族日報 1961年 2月 21日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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