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일 4.9통일평화재단에서 '헌쇠' 박중기 4.9평화통일재단 이사와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우리는 한마음으로 한뜻으로 역사를 올바로 복원하고 평화로운 통일세상을 위한 일들을 함께 해나갈 것입니다.”

지난 4월 9일 한국불교역사기념관에서 열린 ‘4·9통일열사 36주기 추모제’는 여느 해와 달리 유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단결의 분위기가 높았다. ‘4·9통일열사’는 1975년 4월 9일 사형 선고 18시간 만에 사법 살인을 당한 8명의 ‘인혁당 재건위’ 열사들을 가리킨다.

특히 이날 추모제에서는 이수병 열사의 부인 이정숙 여사가 직접 진혼무 <신칼대신무>를 춰 추모객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그간 (재)4·9통일평화재단을 중심으로 서울지역 추모제와 (사)4·9인혁열사계승사업회를 중심으로 대구지역 추모제가 각각 열렸지만 처음으로 한자리에서 추모제를 가진 것이다.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가진 4.9통일열사 추모제

▲ 4월 9일 한국불교역사기념관에서 열린 ‘4·9통일열사 36주기 추모제’는 서울과 대구의 유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단결의 분위기가 높았다.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이날 남다른 감회에 젖은 박중기(77) 선생은 “가족들에게도 그간 매우 송구스럽고 미안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도 풀렸고, 고인들에게 아주 죄스러워서 한없이 마음속에 짐이 됐었는데 이번에 어느 정도 해소됐다”고 안도했다. 그러면서도“지금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을 맡고 있는 안주리 국장이 대구를 오고가면서 여러 가지 애를 쓰고 화합을 하는데 노력을 많이 했다”고 공을 후배에게 돌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4·9통일평화재단 이사인 박중기 선생은 평생을 인혁당과 떼려야 뗄 수 없는‘운명’을 지닌 채 살아왔다.

“그 사람은 죽을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가 1년 전에 잡혀가는 바람에 그 사람이 나 대신으로 죽었어. 그래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게 ‘나 때문에 죽은 사람이다’ 싶은 생각이 들어 나한테는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지.”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인혁당 재건위 사건)’ 열사 8위 중 한 명인 김용원 선생과 한 집에 살고 있었던 그는 다른 사건에 연루돼 먼저 6개월간 철창신세를 져야 했던 탓에 요행히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고, 김용원 선생은 엮여 들어가 희생당했으니 그 마음의 짐을 어찌할 수 없었을 터.

“나는 장사하고 자기는 학교에 있는데, ‘내가 이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쉽게 설명해줄 테니까 하루 저녁 같이 모여 이야기합시다’고 했는데, 그걸 결국 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잡혀 들어가고, 내가 나오는데 자기는 잡혀 들어가 영원히 못봤다. 상대성 원리도 듣지 못하고….”

리더로 알려진 도예종 선생과의 인연도 각별하다.
“(형무소)형을 같이 살았어. 실질적 지도자이고 뛰어난 공작자야. 대개 기록에 나온 이상은 잘 몰라.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면 키는 5척 단구에 아주 자그마한 양반인데, 한자리에 앉아서 조직을 할 때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이 아주 비상한 사람이야.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결론을 내려버리는 사람이고. 그처럼 당차고 장악력이 뛰어난 분인데, 1차 인혁당 재판이 끝나고 난 뒤 그 분만 3년을 살고 우리는 1년을 살았어. 형무소 들어가서도 혁신계라고 생각들이 다 같은 게 아니니까, 여러 사람한테 영향을 미치지 않아도 이수병 선생이라든가 몇 사람한테는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알고 있어.”

2차 인혁당 사건으로 그와 함께 활동했던 도예종, 여정남, 김용원, 이수병, 하재완, 서도원, 송상진, 우홍선 등 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이 믿기 어려운 비극에서 그만 홀로 천행으로 살아남았다. 그의 심경은 아무도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이고, 더구나 유족들의 비참한 생활고는 살아남은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열사 유족들 뒷바라지에 헌신한 36년 세월

▲ 생과 사가 엇갈린 동지들의 유가족들을 위해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박중기 이사.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방황을 많이 했지. 3년 동안은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도 않고 일을 해도 잘 안 되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정신을 차려보니 가족들 주변이 다 가난한 사람들에다 초등학교 다니는 애들만 바글바글했지. ‘이거 이래가지고는 안되겠구나’싶어 나는 장사를 시작했는데…. 부인들이 무척 고생이 많았어. 김용원 선생 부인은 초등학교 다니는 애들 밖에 없었어. 그래서 살 길이 없으니까 국민학생들 일일공부 배달을 했는데, 그러다가 새로 이사온 집에 배달을 하고 나오는데 개가 뒷 발목을 물었어. 학습지로 몇 푼 얻어 오다 개한테 물렸으니 그런 낭패가 어디 있겠나. 애들이 아파도 약을 못 사준다는 소리도 들었어. 나는 그 집 근처에 갈 수도 없었지. 그래서 중간에 사람을 넣어 간접으로 소식 듣고 전달해준 것 밖에 없었는데….

(열사들을) 죽인 후니까 나한테는 두 사람이 항상 감시하고 따라다녔어. 장사를 하는데도 작업장에 따라와 같이 있었고. 그것도 한 1년, 2년 지나면 정 붙는다고 사람을 바꿔. 우리한테는 참 철저하게 했지, 그놈들이. 그러니 내 삶이라는 게 대강 짐작이 가겠지.”

결혼 전에 박중기 선생을 직장 상사로 모신 적이 있고, 박중기 선생의 ‘중신’으로 남편 이수병 열사와 결혼한 이정숙 여사는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셨다”며 “돈을 많이 버실 때도 가족은 안 챙기시고 주위 어려운 분들을 많이 챙기셔서 사모님이나 아이들한테 서운하단 말을 많이 듣고 살아오신 굉장히 존경하는 분”이라고 말했다.

“그 전에 집에 가면 너무너무 검소해서 방에 가구도 없어요. 비키니 옷장만 안방에 덩그러니 하나 있고…. 돈이 없어서가 아니죠. 끝내는 남을 위해 집도 없이 쫓겨나서 고생하시고. 추모연대도 그분이 빠지면 텅 빈 듯했어요. (열사 추모제에) 누군 가고 누군 안가고 할 수 없다시며 자기 몸은 괴롭고 몸살이 나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셨어요. 여럿이 있을 때 본인은 웃지도 않으면서 농담도 잘하시고, 만나면 편안하고 행복을 느끼는 분이에요.”

이수병 선생과 이정숙 여사와의 인연에 대해 박중기 선생은 다음과 같이 감회 어린 회고담을 들려주었다.

“2차(인혁당) 전에 처녀 때, 내가 1차에 나와서 김금수 선생, 김달수 선생과 셋이서 제재소를 했어. 아무도 직장을 안 주니까 자영업이라도 하자고 제재소를 했는데 거기 경리사원이었어. 내가 중신을 섰다기 보다는 저희가 좋아서 결혼한거지. 이수병 선생한테는 남자나 여자나 걸리면 못 빠져나가는 묘한 매력이 있었어.

그리고 형무소라고 하는 데를 가면 합방을 하더라도 여러 해를 같이 공동으로 살게 되면 그 사람 잠자리에서 시작해서 밥 먹는 모양까지 보고 있어야 해. 그러면 그 사람의 자그만한 습성부터 시작해서 성격까지 다 알게 돼 싸우게 되는 경우가 많아. 직접 싸우지 않아도 어줍잖은 것으로 말도 안하고…. 이것이 형무소야. 그런데 이수병 선생은 형무소 8년을 살면서 어른이나 애나 친구나 간에 ‘이수병은 이거는 좋은데 저거는 나쁘더라’ 이런 소리가 아무도 없었어. 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했지. 그참 묘한 사람이야. 그리고 매사가 모범이고. 경희대 2년을 다니면서 늘 장학생으로 지냈어.”

팔을 걷어붙이고 유가족들의 뒷바라지에 나선 그는 고철수집 사업을 해서 큰 기업에 납품을 하는 등 한보철강 도산 이전까지는 제법 괜찮은 사업체를 운영하며 ‘헌쇠’라는 호를 얻기도 했다.

“이돈명 변호사님이 내가 고철장사 한다 했더니 헌쇠라는 호를 지어줬어. ‘아, 이 사람아. 그러면 자네가 고철장사니까 고철로 하소’, ‘네, 그러겠습니다’ 했더니, 그 이튿날 새벽같이 또 다시 전화가 와서 ‘고철은 너무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면 헌쇠 아닌가. 헌쇠라면 어떨까?’ 이러시더만. 그래 ‘더 좋습니다’ 했지.

양질의 쇠를 얻으려면 선철만 가지고는 안 돼. 고철이 꼭 반 이상 섞여야 좋은 쇠를 얻을 수 있어. 고철은 일반적으로 버리는 것이지만 쇠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 그래서 ‘헌쇠’ 그 호를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어.”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 내내 몸을 낮추고 먼발치에서 유족들을 도우며 살아온 그가 처음으로 통일운동에 공개적으로 나선 것은 2002년 추모연대 의장을 맡으면서부터이다. “시간이 흐르니까 가족도 만나고, 아무래도 친구도 만나게 되고, 외부사람도 좀 접하게 되고 그랬다”는 것.

박정희 정권이 만든 ‘작품’일 뿐 ‘인혁당’은 없다

▲ ‘4·9통일열사 36주기 추모제’에서 진혼부 <신칼대신무>를 춘 이수병 열사의 부인 이정숙 여사.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그는 “‘인혁당’이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고 나니까 지금까지 인혁당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인혁당은 없다”며 박정희 정권이 만든‘작품’에 불과하다고 일축하고 “소위 인혁당이라고 해서 무슨 반체제의 대명사처럼 돼 있었는데, 그것이 딱 에누리 없는 10년 후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다시 둔갑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2005년 국정원과거사위에서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고문조작 사실이 인정됐고, 서울지방법원이 재심을 결정했으며, 2007년 서울지방법원 재심 무죄판결에 이어 2008년 사형수 8인에 대한 국가배상판결로 이어졌다.

추모연대 의장과 4·9통일평화재단 이사 등으로 일하면서 특히 과거사 정리 관련 위원회들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여온 그는 “범죄를 저질렀던 책임 있는 권력자들이 화해하고 그들의 쓰라린 가슴을 쓸어줄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그래야 민족이 단결될 수 있고 국민은 편안한 마음으로 진보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지, 그냥 있는 돈 몇 푼 줘서 무슨 시혜하듯이 하면 화합이 되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고 일침을 가했다.

4·9통일평화재단은 이번 추모제를 계기로 60년대 혁신계 활동에 관한 구술 채록사업 등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는“고인에 대한 평전이라도 하나씩 만들어 둬야 되지 않겠느냐는 논의부터 시작됐는데, 평전을 만드는데 소설을 쓰듯이 할 수는 없고 시대배경이나 사건들의 근거를 가져야 그 평전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구술사업부터 출발하게 됐다”며 또 다른 숙제를 앞두고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 이 기사는 기사교류협약에 의해 월간 <민족21> 2011년 5월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 통일뉴스 :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선생님과 인혁당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설명해달라.

■ 박중기 이사 : ‘인혁당’이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고 나니까 지금까지 인혁당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인혁당은 없다. 64년 한일회담 반대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있었고, 사회나 학원에서 대대적인 한일회담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는 군사정권이 확실히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상당히 불안한 시기였다. 그래서 시위를 쉽게 진압할 수 없으니까 6월 3일 계엄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책임자를 구속해야겠는데 책임자가 없었다. 어떤 지휘부가 있다든가 야당이 주도한 것도 아니고 국민 스스로 정서적으로 한 거다. 그것을 어떻게 학생들과 우리들이 관계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체포된 것이 64년 ‘인혁당 사건’으로 발표됐다. 소위 인혁당이라고 해서 무슨 반체제의 대명사처럼 돼 있었는데, 그 것이 딱 에누리 없는 10년 후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다시 둔갑된 것이다. 그것이 대개 인혁당의 내력이다. 나는 1차 때 탄압을 받았다.

□ 2차 인혁당 사건 때 8명이 사형당했다. 선생은 요행으로 빠진 것으로 안다.

■ 요행은 요행이다. 그 전에 73년 10월에 소위 내란음모죄로 구속이 됐다. 6개월 동안 재판받고 74년 4월 19일인가 집행유예가 돼 나왔다. 가까이 있던 이수병이나 도예종 선생이 다시 들어갔다는 소식을 밖에 나와서 들었다. 그들이 사건을 만들어 기소할 때 내가 6개월간 공백이 있으니까 시간적으로 맞지 않아 나는 무사했는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당했던 거다. 상상을 안 했다. 무슨 보안법 형이라도 크게 받을 사람들이라고는 생각을 안했다.

□ 여덟 분 형이 집행되고 선생만 홀로 남아 마음의 부채가 컸을 것 같다.

■ 부채가 많다. 이수병, 김용원 이런 사람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동고동락했던 후배들인데, 한 6개월 동안에 모두 완전히 사람의 길이 바뀌고 죽음과 삶의 길이 바뀌었다.

□ 2008년 재단과 사단법인이 생겼는데 각각 설립돼 2011년 올해 처음으로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두 번 열리던 추모제가 한번으로 모아지게 됐다. 이 의미나 과정을 설명해달라.

■ 대구에는 지역적으로도 그렇고, 거기에 새로운 후배들이 성장하니까 그쪽에는 그쪽대로 하고 싶은 생각들이 있었을 것이다. 대구에서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를 별도로 설립했고 초기에는 약간 뭐 말썽은 있었지만 서로 잘하자는 뜻에서 말썽이었으니까 나는 별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대구나 서울에서 대개 일의 가닥을 잡고 이번에는 서울에서 합동으로 하기로 한 것이 아주 보람있는 일이 됐다. 고인이 된 가족들에게도 그간에 매우 송구스럽고 미안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도 풀렸고, 고인들에게 아주 죄스러워서 한없이 마음속에 짐이 됐었는데 이번에 어느 정도 해소됐다.

□ 김용원 선생과 운명이 뒤바뀌었다고 했는데.

■ 내가 군에 가기 전에는 김용원 선생하고 같이 살았다. 김용원 선생은 머리가 비상해 대학입학 자격시험에서 전국 톱을 하고 서울대 물리학과에 합격했는데 원채 가난하니까 대학교 와서는 공부를 못했다.

동양공고 시간강사를 하다 서울 교육위원회에서 공채를 하는데 1등으로 합격해 고등학교 은사 하점생 용산고등학교 교장 추천으로 경기여고로 갔다. 그래서 생활도 안정됐고, 그때부터 이 친구가 무제한 독서를 해대는데, 뭐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 몇 년 하다가 결국 그 사람은 죽을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가 1년 전에 잡혀가는 바람에 그 사람이 나 대신으로 죽었다. 그래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게 ‘나 때문에 죽은 사람이다’ 싶은 생각이 들어 나한테는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다.

참 훌륭한 인격자였다. 그 사람이 나는 장사 하고 자기는 학교에 있는데, “내가 이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쉽게 설명해줄 테니까 하루 저녁 같이 모여 이야기 합시다.” 그걸 결국 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잡혀 들어가고, 내가 나오는데 자기는 잡혀 들어가 영원히 못 봤다. 상대성 원리도 듣지도 못하고.

□ 도예종 선생이 리더로 알려져 있다. 가까이 교우할 시간이 있었나?

■ 많이 있었다. 형도 같이 살았고, 실질적 지도자고 뛰어난 공작자다. 대개 기록에 나온 이상은 모른다.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면 키는 5척 단구다. 아주 조그마한 양반인데, 한 자리에 앉아서 조직을 할 때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이 아주 비상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처럼 당차고 장악력이 뛰어난 분인데. 1차 인혁 끝나고 난 뒤 그분만 3년을 살고 우리는 1년을 살았다. 형무소 들어가서도 혁신계라고 생각들이 다 같은 게 아니니까, 여러 사람한테 영향을 미치지 않아도 이수병 선생이라든가 몇 사람한테는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알고 있다.

1차 이후에 자기가 보스니까, 시선이 자기한테 자꾸 쏠리니까 조심했다. 나와서 대구에 있는 어느 건설회사 회장을 했다. 나를 좋아했으니까, 지금 사는 사람이랑 약혼식 주례를 해줬다. 전혀 술을 안 하시고 담배도 잘 안 핀다.

□ 인혁당 관계자들은 대체로 대구지역이 많았던 것 같다.

■ 대구는 4.19이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민자통이라고 하는 건데, 그때로서는 진보진영 혁신계열의 통일전선체처럼 돼 있었다. 그래서 거기의 출신들은 모두 신뢰했다. 그때 민족민주청년동맹을 했는데, 민자통의 가맹단체가 되고, 대구하고 광주, 대전, 전주, 부산, 원주 이게 합해져 있었다. 대구의 구체적 조직과 만나게 된 동기가 민자통을 통해서였다. 그래서 돌아가신 도예종 선생, 서도원 선생을 알게 됐다.

□ 공소장에 보면 일본을 통해 북과 연계됐다. 한 분이 북한에 올라갔다고 돼 있는데. 그것 때문에 논란이 많았지 않나.

■ 그건 완전히 다 밝혀졌다. 김상환이란 분이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였는데 그가 (북한에) 올라갔다. 올라간 걸 나는 모르고 그 지인들은 아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건 미 CIA(중앙정보부)에서 올려 보낸 것이라는 게 나중에 밝혀져서 안기부 자체에서 말 못하게 덮었으니까. 그건 더 논의되지 않고.

일본에서 자금이 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일본을 간 것은 사실이다. 김배균이라는 친구가 여기서 숨을 곳이 없으니까 밀항해 일본 자기 형한테 갔다. 일본도 가보니까 소위 밀항한 사람에 대해서는 도대체 오무라 형무소로 보내게 되면 잡힐 위험이 있으니까 그냥 이북으로 빠져가 적당히 숨었는데, 이북에 있어보니까 거기에 자기 몫이 없다싶으니까 다시 내려온 것이다. 제일 가까운 분에게 잠자고 피신할 수 있는 곳을 안내해달라는 것인데, 안내를 못해줬다. 그래서 그 사람 잡혀가 사형당했고, 잡아가 따져보니까 우리하고 관계가 없었다. 우리한테 그런 건덕지를 가지고 빌미를 갖다 붙인 것이다.

□ 이번에 이수병 선생 부인 이정숙 여사가 진혼무를 췄는데 잘 아시나?

■ 알다 뿐인가. 2차 (인혁당 사건) 전에 처녀 때, 내가 1차에 나와서 김금수 선생, 김달수 선생과 셋이서 제재소를 했다. 아무도 직장을 안 주니까 자영업이라도 하자고, 제재소를 했는데 거기 경리사원이었다. 내가 중신을 섰다기 보다는 저희가 좋아서 결혼했다. 이수병 선생한테는 남자나 여자나 걸리면 못 빠져나가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리고 형무소라고 하는 데를 가면 합방을 하더라도 여러 해를 같이 공동으로 살게 되면 그 사람 잠자리에서 시작해서 밥먹는 모양까지 보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의 조그마한 습성부터 시작해서 성격까지 다 알게 돼 싸우게 된다. 직접 싸우지 않아도 어줍잖은 것으로 말도 안하고, 이것이 형무소다. 그런데 이수병 선생은 형무소 8년을 살면서 어른이나 애나 친구나 간에 “이수병은 이거는 좋은데 저거는 나쁘더라” 이런 소리가 아무도 없었다. 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참 묘한 사람이다. 그리고 매사가 모범이다.

나도 그 사람하고 아는 거야 고등학교부터 알았지만. 군대에서 제대 해 나와서 1년반 같이 살았다. 그런데 그때는 전기불은 11시가 되면 가져가고 12시까지 하려면 촛불이나 호롱불이라도 있어야 할 때다. 그게 60년대까지도 그랬다. 특수한 곳이 아니면 불이 없었다. 우리 방에서는 12시 전에는 잠을 자면 안 되고 5시까지 엎드려 있으면 안 된다는 방침을 정해놓고 살았으니까. 그렇게 자기를 혹독하게 관리하는 거다. 경희대 2년을 다니면서 경희대 장학생으로 지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