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지난 2005년 1월 27일 제주국제자유도시 특별법 제12조 근거해 ‘평화의 섬’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부의 지정과 선언만으로 될 수 없다.

4.3항쟁뿐 아니라 과거 탐라 시기부터 부침과 영욕의 역사에 거친 파도와 싸우면서 척박한 돌무지 땅을 일구고 거센 바람에 맞서 싸운 제주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앞으로도 평화의 땅으로 지키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할 때만이 평화의 섬으로 거듭날 것이다.

올해 4.3항쟁 63주년을 맞아 <통일뉴스> 기자는 취재를 위해 제주를 잘 아는 한 지인(知人)과 함께 곳곳을 탐방했다. 헌신적으로 제주를 알려준 그 지인은 자신의 이름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했다. 제주의 아픈 역사는 아직도 일상 곳곳에 뿌리 깊이 남아있다. / 편집자 주

육지와 단절 짓는 바다

방사탑. 제주사람들은 바다를 통해 겪었던 아픈 역사 때문에 바다를 넘어야 할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육지와 단절의 대상으로 봤다. 사진은 바다의 재앙을 막기 위해 세워진 신흥리 방사탑.

온통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제주사람들에게 바다는, 육지와 단절하는 장애물로 인식된다고 한다. 이는 설문대할망 설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설문대할망은 자신이 갖고 싶어 하는 속옷을 만들어주면 제주사람의 소원대로 육지와 다리를 놓아주기로 한다.

이처럼 바다를 넘어야 할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육지와 단절의 대상으로 보는 이유는 그간 제주사람들이 바다를 통해 겪었던 아픈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농사가 어려워 해마나 큰 기근에 시달리고 해적들의 노략질에 시달려야 했던 제주사람들은 척박한 땅보다는 바다 건너 땅에서 살고 싶었다. 사람들은 기회만 되면 섬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고 이를 알게 된 조정에서는 인조 7년(1629년)부터 제주 주민들에게 출륙금지령을 내려서 육지나들이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같은 출륙금지령은 1834년까지 계속됐다.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은 모두 적

또한 바다를 넘어 온 왜구와 해적들의 침탈에 시달리고 이를 막기 위해 해안부락에서 진을 설치해 성을 쌓고 봉수대를 만들었다. 왜구와 해적 외에도 바다를 건너온 중앙정부 관리들은 백성을 위하기보다는 부정한 행정으로 섬사람들은 많은 고통을 받았다. 제주 사람들에게 바다 건너서 온 사람들은 왜적이나 관리들이나 모두 적이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일본의 침략에 의해 제주는 대리 전쟁터가 될 뻔 했고 해방 후 4.3사건도 제주사람들에게는 외부세력에 의한 고통의 상징일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제주 사람들을 섬 속에 웅크리도록 강요를 하고, 바다를 그저 육지와 단절하는 장애물로만 인식하도록 해왔던 것이다.

이런 육지와의 단절의 감성 때문에 제주 사람들은 아직도 낮선 육지 사람들에게는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다고 한다.

제주은행 로고. 신한은행이 제주은행을 인수했지만 외지은행이라는 거부감 때문에 로고는 그대로 사용하지만 이름은 제주은행으로 쓴다.

지인은 “이제는 제주도에도 각종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들어와 어느 도시와 별 차이가 없다고는 하지만 외지의 프랜차이즈 업체가 들어왔을 때 가장 성공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제주사람들은 제주사람들이 운영하는 프랜차이즈를 이용하려고 해요. 때문에 어떤 업종이든 외지사람이 제주에서 성공을 하면 전국 어디서나 성공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신한은행이 제주은행을 인수했지만 제주은행이라는 명칭을 바꾸지 않고 영업을 하는 것도 이 같은 일환입니다. 단지 로고 등을 통해서만 신한은행이 제주은행을 인수 했구나 알 수 있는 것이죠.”

8살부터 물 긷는 제주여성

빨래터. 물이 부족한 제주는 용천수로 생활을 했다. 사진은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 위치한 공동 빨래터.

역설적이게도 제주도는 바다에 둘러싸여 있지만 늘 물이 부족한 곳이었다. 지천에 널린 화산석은 그대로 물을 흡수해버려 비가 내려도 물이 고이지 않고 육지와 달리 강이나 호수가 없어 전적으로 지하수에 의존해야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제주 여성들은 바람 많고 돌 많은 거친 길을 몇 시간씩 걸어서 물을 날라야 했는데 제주 여성이라면 보통 8살 정도부터 어머니에게 물 긷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이 때 사용한 물동이를 ‘물허벅’이라고 불렀다. 허벅은 불룩한 몸체에 비해 주둥이를 매우 좁게 만들었는데 이는 운반을 할 때 되도록 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어 나르는 육지 여성들과는 달리 제주 여성들은 물허벅은 구덕에 담아 등으로 지고 날랐는데 이처럼 등에 물을 지고 나르는 까닭은 바람과 돌이 많은 고장이어서 자칫하면 돌에 채이고 바람에 쓰러질 것을 대비한 데서 생긴 풍습으로 보고 있다.

호종단이 수맥 잘라 물 부족

▲ 지장천 표지석.

이 처럼 제주에 물이 부족한 이유에 대해서는 호종단(고종달)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예종 때(서기 1110년 경) 중국 송나라왕은 지리서를 보다가 고려국의 지세와 산세가 특이한 형국인 것을 감지했다. 고려는 배 형태이고 제주도는 배의 닻에 해당하므로 닻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 여겨 풍수에 능한 호종단에게 제주에 가서 혈을 끊어 인재가 태어날 것을 막도록 지시했다.

특히 제주도에 신묘한 기운이 흐르는 열세 군데의 샘이 있어 뛰어난 인재가 태어난다는 소문에 송나라 조정에서는 압승지술이 능한 호종단에게 탐라에 가서 제주도의 십삼혈을 모두 막으라고 파견을 했다고 한다.

제주도에 온 호종단은 제주의 수맥을 자르고 다녔고 이에 제주에는 물이 부족한 것이라고 한다. 지인은 “제주는 여러 외침이 많았는데 풍수지리적인 침입까지 받은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주도 서귀포시 서홍동 위치한 ‘지장샘’은 이런 호종단을 피해 살아남은 샘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호종단을 피한 지혜로운 샘 ‘지장샘’

지장샘. 지장샘은 호종단을 지혜롭게 피했다는 설화를 갖고 있다. 가장 안쪽이 식수로 사용하는 맑은 물이고 바깥쪽으로 나올수록 생활용수로 사용한다.

호종단이 여러 곳의 지맥과 수맥을 단절하며 지금의 남원읍 의귀리를 거쳐 홍로마을(서홍동)을 찾아 왔다고 한다. 이에 앞서 홍로마을의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데 백발의 노인이 위급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지금 내가 쫓기고 있는 상태이므로 감춰주시고 누가 찾아와 묻거든 모른다고 해달라”는 부탁을 해 농부는 그 백발노인을 숨겨줬다.

곧이어 호종단이 큰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이곳에 나타나 밭가는 농부에게 “이 근처에 꼬부랑 나무 밑에 헹기물이 있다는데 모르느냐”고 물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농부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이때에 데리고 온 개가 영리하게도 쇠질매 부근을 맴돌며 수맥을 찾는 것을 보고 숨겨둔 노인이 발각될 위급함을 느낀 농부가 “강아지놈이 감추어둔 점심을 훔쳐 먹으려 한다”고 하며 쫓아버렸다. 호종단은 부근의 꼬부랑 나무 밑 헹기물을 찾으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분한 마음에 가지고 있던 술서가 틀렸다며 찢어버리고 돌아갔다.

호종단이 돌아간 후 농부가 숨겨준 백발노인은 찾아보니 간곳이 없고 그 자리에는 한 그릇의 헹기물이 남아 있었다. 이 물을 그 자리에 부었더니 계속해서 맑은 물이 솟아나 샘이 됐다고 한다. 샘은 지혜롭게 이를 피했다 해 ‘지장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호종단은 돌아가는 길에 지금의 한경 차귀도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어려움을 겪다가 때마침 한라산 산신이 큰 매새로 변하여 호종단이 타고 있는 배를 가라앉혀 호종단은 죽음을 당했다. 이러한 이유로 돌아가는 길을 차단했다고 해 ‘차귀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전설의 백발노인은 사실은 지장샘의 수신으로 보고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장샘물만큼만 살라”

제주의 논. 제주도 서귀포시 서홍동에는 지장샘물을 활용해 논농사를 하고 있다. 논에서는 미나리가 자라고 있다.

한편 호종단이 지장샘 수맥단절에 실패해 돌아가면서 홍로마을 동쪽으로는 샘물이 나는 곳이 드물고 서쪽으로는 수맥단절을 단념했으므로 오늘날도 많은 샘물이 남아있다고 한다. 홍로마을은 지장샘물로 해서 농사짓기에 좋은 풍요로운 고장이 됐다.

지장샘은 천지, 서홍뿐만 아니라 서귀포 일대 사람들은 모두 이용할 만큼 물이 풍부하지만 솟아나는 양이 뚜렷이 보이지 않아 항상 물의 양이 그대로인양 조용히 흐르고 있다. 그래서 제주도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마라 지장샘물만큼만 살라”는 속담이 전해진다고 한다. 척박한 환경에서 그저 욕심내지 말고 자연에 순응해서 살라는 의미라고 한다.

전설의 샘이다보니 기와집으로 씌운 비문도 만들고 관리를 하는데 마을사람들은 해마다 정초에 지장샘에 제까지 지낸다고 한다. 제주에서 샘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장샘 덕분에 이 마을에는 논까지 있다. 샘의 맨 위는 식수로 쓰고 흐르는 물 아래쪽에서는 할머니들이 모여 빨래를 하고 있었다. 논이며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할머니며 모두 제주에서 보기 힘든 것들이다.

지장샘 빨래터 할머니. 지장샘에서 할머니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바다에 싸였지만 소금이 부족한 곳

제주도가 바다에 둘러싸여 물이 부족했다면, 다시 한 번 역설적이게도 이곳은 바다에 둘러싸여있는데도 소금이 부족했다. 제주도는 화산섬이기에 간석염전을 앉히기에 아주 어려운데다가 지하수가 해안에서 솟아나와 바닷물의 염도가 다른 해안에 비해 높지 않아 그나마도 쉽지 않은 섬이라고 한다.

조선왕조 연산군 4년(1498)에 제주목사 강거는 제주도의 해변에서 간석염전이 가능한 곳을 찾는 등 제주도 관리들의 주도하에 간석염전의 개척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 양이 미비했다. 때문에 제주도 사람들은 바다에서 물을 떠다가 암석위에서 어렵게 소금을 만들어 제주도 염전은 암석염전이었으며 그 부족분은 육지로부터 수입 충당했다.

때문에 제주도에서 염전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제주시 애월읍 구엄리에는 예전에 선조들이 염전으로 사용하던 돌염전이 전해지고 있다.

천일염 제조하던 구엄리 돌염전

돌염전.제주시 애월읍 구엄리에는 예전에 선조들이 염전으로 사용하던 돌염전이 전해지고 있다. 사진의 주황색 틀에 바닷물을 붓고 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었다.

소금밭의 길이는 해안 따라 300m 정도이고 폭은 50m로서 총 4845m(1500여평)의 평평한 천연돌염전을 소금빌레라고도 부르는데 암반 위에 바닷물을 뿌려놓으면 햇빛에 말라 천일염을 제조할 수 있었다.

여기서 생산된 돌소금은 넓적하고 굵을 뿐 아니라 맛과 색깔이 뛰어나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암반위에 칸을 둘러놓았는데 칸 12개를 보통 한사람이 소유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1954년까지 이 염전을 거래했다는 문서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삼별초가 애월읍 고성리 항파두리에 주둔할 당시 토성을 쌓으면서 주민들을 동원했다는 문헌에 의해 고려 원종 12년에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마을 이름은 ‘엄장포’ 또는 ‘엄장이’라고 하였다. 조선 명종 14년(1559년)에 강려금을 제조하는 방법을 가르쳐 소금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생업의 터전이 되었다.

한국수산지는 이 마을에 887평의 소금밭이 있고 1년에 28800근의 소금이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교통의 발달과 생활양식의 변화 등으로 이곳은 1950년대 이후에는 소금밭으로의 기능은 잃었다.

배무숭이 소금물밭

배무숭이 소금밭. 배무숭이 바닷가는 1940년대까지도 천연소금의 원료인 소금물을 만들었던 곳으로, 조성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애월진성에 소금을 납품하였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을 정도로 그 역사가 깊다.

이곳 외에도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에는 배무숭이 소금물밭이 있었다.

배무숭이 바닷가는 1940년대까지도 천연소금의 원료인 소금물을 만들었던 곳이다. 조성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애월진성에 소금을 납품하였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을 정도로 그 역사가 깊다고 한다. 사리 때에만 밀물이 들어오는 이곳은 중심에 바닷물이 들어오는 물길과 바닷물을 가두어 놓는 물통이 있고 그 좌우에 소금밭이 15개쯤 있다.

소금밭은 구들돌을 놓듯이 평평하게 다져놓고 그 위에 모래를 깔았다. 모래에 바닷물을 여러 차례 부어 말리기를 며칠 동안 반복하면 모래에 소금꽃이 핀다. 이것을 움푹하고 널찍한 돌 위에 얹어놓아 짠물을 빼낸다. 허벅으로 짠물을 받아 집으로 가져가 가마솥에서 졸이면 소금이 만들어졌고 짠물을 그대로 간장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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