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비가 내리는 날이다. 또 한 명의 사람이 희생됐다. 범인을 뒤쫓던 형사는, 용의자의 집으로 간다. 다짜고짜 그를 끌어내 주먹을 날린다. 힘없이 맞고 쓰러지는 용의자. 형사는 권총까지 들이댄다. 방아쇠를 당길 기세다. 목격자는 없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만이 그들을 응시할 뿐.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형사는 확신한다. 그가 범인임을. 그래서 방아쇠를 당기려 한다. 법의 테두리가 굵은 빗줄기와 함께 무너지는 순간.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장면이다. 그 형사는 왜 그랬던 것인가... 그건 바로, 절실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건을 풀고자 하는 절실함, 범인을 잡고자 하는 집요함이, 그렇게 표출된 것이다. 그렇다. 절실함이 있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KAL858기 사건에 관한 글을 쓰려는 지금, 이런 물음을 던져본다. 그럼 나에게는, 그런 절실함이 있는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입장에서 말이다.

미 국무부의 비밀문서를 전달받고 이 글을 쓰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지났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였지만, 막상 글을 시작하기까지 참 어려웠다. 그러면서 이 절실함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사건에 관해 '경합하는 진실'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과정에서 불안하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진득하게 다가가는 자세. 24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두 번의 재조사 시도가 있고 나서 사람들은 지쳐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복잡함과 민감함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은, 어쩌면 절실함에 있는지도. 그렇게 절실하게 살아가고 있을 누군가들을 생각하며 숨을 가다듬는다.

미국, 사건 초기 증거에 조심스러운 입장

▲ 미국 국무부가 공개한 KAL558기 사건 관련 문서 중 E58.
곳곳이 지워져 있다. [자료제공 - 신성국 신부]
KAL858기 사건 대책위의 신성국 신부가 전해준 문서들은 2009년에 내려졌던 국무부 결정에 이의신청을 하여 얻은 것들이다. 국무부는 부분공개됐던 19건의 문서 중 2건의 문서를 완전공개하고, 비공개됐던 19건의 문서 중 9건의 문서를 부분공개하였다. 하지만 10건의 문서에 대해서는 여전히 공개가 거부되었고, 이 밖에 민감한 부분들은 여전히 삭제된 상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이유는, 그 내용들이 미국의 국가안보를 해칠 또는 심하게 해칠(damage or serious damage)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공개된 문서들의 주요 내용을 나름대로 살펴볼까 한다.

이번에 새롭게 공개된 문서 중 하나(문서번호 E23)는, 당시 북쪽에 대한 남쪽의 예상되는 대응에 관한 미국의 논의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미국이 남쪽의 대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과정에서 북의 개입에 대해 "설득가능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IN THE ABSENCE OF PERSUASIVE EVIDENCE)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은 1987년 12월 11일 기준으로 증거 부분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또 다른 문서(E34)는 당시 송한호 국토통일원 남북회담 사무국장과의 논의에 관한 것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당시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는 일본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12월 31일)에서, 사건에 북쪽이 개입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북쪽 인민 모두의 의견을 반영한 것은 아니며 일부 과격세력에 의해 저질러졌을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안기부의 김현희 기자회견 전날 작성된 문서(E40)는, 회견일이 1월 15일로 정해진 것과 관련 당시 일본의 <교도통신>이 내용을 미리 보도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한국 정부가 계획했던 것보다 빨리 움직여야 했다는 한국 쪽 설명을 담고 있다. 그리고 최광수 외무장관은 김현희의 고백과 관련, 그녀가 울면서 안기부 여성요원의 가슴을 치며 미안하다는 말로 고백을 시작했다고 전했다(그러나 이미 알려졌듯이, 이는 안기부가 선전효과를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아울러 제임스 릴리 당시 미국 대사는 김현희가 진술을 번복할 가능성은 없는지, 거짓말 탐지기(POLYGRAPH) 시험을 거쳤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한국 쪽은 거짓말 탐지기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정부는 김현희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TELLING THE TRUTH) 확신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최광수 장관은 그 증거 중 하나로 다음 날 안기부가 기자회견 때 제시할 화동사진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릴리 대사는 이 사진은 흐릿하게 보이고 오직 귀모양에 의해(BASED ONLY ON THE DISTINCTIVE SHAPE OF HER EAR) 김현희임을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판단했다(이 역시 김현희와 사진 속 화동의 귀모양이 전혀 다른 것으로 판명됐다).

같은 날 국무부가 작성한 문서(E39)는, 안기부의 공식수사 발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요약한 것이다. 이는 언론의 예상질문과 이에 대한 답변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질문 중 하나는 이 사건이 "북쪽을 모략하기 위한 남쪽의 공작"이라는 북의 주장에 관한 것이다. 국무부는 첫째 남쪽이 단지 북쪽을 모략하기 위해 수많은 자국민을 냉정하게 살해하고(COLDLY MURDER SO MANY OF ITS CITIZENS) 비행기를 폭파시켰다는 생각은 하기 어렵고, 둘째 용의자들의 체포와 그들의 자살시도가 면밀하게 계획되었다는 것인데 이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라는 내용의 답변을 준비했다. 이를 포함한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당시 조지 슐츠 미 국무장관의 의견은 모두 삭제되어 있다. 이 부분은 2009년에 공개됐던 문서(E41)에는 없던 내용이다(그냥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이라며 짧게 처리되어 있다). 다시 말해, 국무부의 최종 검토과정에서 빠지게 되었는데 이번에 문서가 추가로 공개되면서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1988년 1월 6일에 작성된 문서(E30)는 당시 스티븐 솔라즈 미국 공화당 의원의 방문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따르면 청와대 관계자는(당시 대통령 비서실의 김용갑 또는 김윤환으로 추정됨) 1월 5일 면담에서 한국은 사건에 북이 개입했다는 확실한 증거를(CLEAR EVIDENCE) 갖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공식발표가 2-3일 안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제임스 릴리 미국 대사는, 그 시기와 형태가 아무래도 당시 북이 제기한 남북대화 제안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적고 있다. 아울러 이 발표가 서울올림픽 참가신청 마감일인 1월 17일 이후로 연기될 수도 있다는 보도를 듣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1988년 1월 19일 문서(E46)는 제임스 릴리 대사와 최광수 외무장관과의 면담에 관한 것이다. 그 내용 중 하나는, 최광수 장관이 언론에 한국 정부가 미국과 일본에 북쪽에 대한 여러 가지 처벌 조치를(VARIOUS PUNITIVE MEASURES) 취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알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미국 쪽의 구체적인 답변내용은 모두 삭제되어 있다. 1988년 1월 20일에 작성된 문서(E47)는, 당시 신두병 외무부 미주국장과의 대화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는 1월 23일로 예정된 대북 규탄 결의대회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서울 여의도광장에 백만 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 외에 구체적인 내용은 삭제되어 있다.

2009년에 삭제되었다가 공개된 부분 중 하나(E17)는, 당시 <연합통신> 및 (중국) 현지언론이 전한 한국 외교관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김현희는 중국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곧, 김현희가 중국어와 영어를 말할 수 있고 외모가 중국 조선족(KOREAN-CHINESE)과 비슷하다는 내용이다. 1990년 4월 13일 문서(E69)에도 삭제되었다가 공개된 부분이 있다. 이에 따르면,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었던 미국 관계자들의 방문에서 당시 브레머 대사는 한국 정부에 김현희가 재판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미국 쪽의 입장을 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뒷부분은 다시 삭제된 채로 남아있어 당시 재판과 관련해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여전히 공개할 수 없는 내용들

개인적으로 이번에 공개된 문서들을 읽으며 약간 실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문서들을 살펴보기 전, 과연 얼마나 민감한 내용이길래 처음에 공개가 거부되었을까라며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내용을 살펴보니 민감하거나 특별한 내용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의견이다). 삭제되었다가 공개된 부분들은 단순히 정보의 출처를 밝히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국방부(E66)와 경찰(E67)이다. 다만 이의신청에도 불구하고 공개되지 않은 내용들, 특히 10건의 비공개 문서가 있다고 하니 그 내용들은 좀더 특별하고 민감할지 모른다. 여전히 공개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는 사건. KAL858기는 복잡함과 민감함이라는 두 날개로 비행을 계속 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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