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


“죄를 미워하는 거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 무슨 교회 설교 제목같은? 아니다. 이 말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가 지난 3월 16일 수요일,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제961차 수요시위에서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16일 수요시위를 지진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침묵시위로 진행했다. 그 집회를 취재하던 약 50여명의 기자들 중에 한 기자가 할머니께 질문을 던졌다.

“할머니, 일본이 안 미우세요?”
할머니는 “우리가 죄를 미워하는 거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할머니의 이 말은 일본에 자연재해가 일어나 많은 생명들이 속수무책으로 죽고, 실종되고, 피해를 입은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한 큰 교회 목사가 “일본 지진은 하나님의 경고”라고 했던 발언과 대조를 이루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으로 퍼져나갔다.

전쟁에서, ‘짐승같은 취급’의 수렁 속에서 일본군의 성노예라는 끔찍한 아픔을 겪었던 피해자, 그런 전쟁이 끝난 지 6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무 해결도 받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사죄하라!”, “배상하라!”고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 그녀다. 그런 그녀에게, 그녀의 생각의 중심에 ‘사람’,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 것이다.

지난 3월 11일, 일본 동북부지역에 큰 재해가 들이닥쳤다. 지진과 쓰나미는 일순간에 일본 동북부지역 마을들을 휩쓸어 버렸고,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일본시민들 뿐만 아니라 재일동포들, 외국인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도 피해는 엄청나서 삶의 기반을 모두 무너뜨려버렸다.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바로 옆 나라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뉴스 화면들이 마치 가상의 영화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그렇게 넋 나간 채 뉴스화면을 보고 있던 새도 잠시, 무섭게도 그 순간 필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그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염려가 아니었다. ‘아... 이제 과거사 청산운동은 어떻게 해야 하나, 재해를 당해 나라 전체가 초상집이 되었는데, 어떻게 국회의원들을 로비하고, 일본정부를 향해 과거의 잘못을 따지고 나아가 배상하라고 싸우지?’ 하는 염려였다.

과거청산운동도, 평화통일운동도, 인권운동도 결국은 그 중심에 ‘사람’을 두고 해야 할 텐데, 그렇게 사람보다 ‘일’이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필자에게 길원옥 할머니의 지극히 평범한 그 말은 모든 혼란을 정리시켜 주고도 남았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들어가면 지금 한창 일본의 재해를 두고 두 갈래로 나뉘어 토론이 진행 중이다. 희생자를 위한 모금을 하자는 쪽과 모금을 반대한다는 쪽이 서로 열심히 토론을 하면서 서명을 하고 있다. 그 토론의 중심에 ‘일본’이 있다. 과거에 범죄를 저질렀던 일본, 여전히 과거의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하고 있는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들을 학살했던 전범국 일본, 여성들을 일본군 성노예로 인권을 유린했던 일본이 있다. 맞다. 이것은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일본이다.

그런 한편, 지진피해를 돕자는 사람들의 토론 속에도 ‘일본’이 있다. “일본에게 희망을!”, “일본에 위로와 사랑을!” 이웃나라 일본이 피해를 입었으니 그 일본에 힘과 희망을 주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지금 일본의 재해를 보면서 일본의 지진피해를 돕자고 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모두 일본이 아닌 길원옥 할머니가 관심갖고 있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해 보자고 말하고 싶다.

군국주의 일본, 전쟁범죄국 일본, 경제대국 일본이 아닌 지금 피해를 입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그 사람들 속에는 재일조선인도 있고, 재일한국인도 있고, 외국인 노동자들도 있고, 또 우리와 함께 열심히 평화와 인권을 위해 연대하며 운동하고 있는 시민운동가들도 있다. 또 그 ‘사람’들에는 일제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끌려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고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도 있고, 징용, 징병 피해자도 있다. 그리고 그도 저도 아니지만,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며 그렇게 보통사람으로 살고 있는 일본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이 지금 엄청나게 많이 죽었고, 살아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표현하는 삶에 처해 있는 것이다.

할머니들도 종종 “에구, 저 일본 물에 가라 앉아 버렸으면 좋겠어”, “지진이나 나버려라”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동안 일본에서 우익들이 망언을 할 때마다, 역사왜곡을 할 때마다 피해자들은 달리 분노를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할머니들의 그런 발언은 분노의 표출방식이었던 것이다.

때로는 19년 동안 매주 수요일, 수요시위를 했지만 늘 일본대사관 문은 닫혀있었고, 수십 번 일본정부에 편지를 보내도, 요청서를 보내도 답변 한번 없는 일본정부를 보면서 드는 절망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런 할머니들의 입에서, 마음에서 “수요시위를 추모시위로 진행하자”고 하고, “희생자들을 위해 우리도 모금을 하자”는 제안이 나온다. 아마도 어느 누구보다도 지금 일본에서 피해를 입은 일본인, 재일한국.조선,외국인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그 아픔의 깊이, 두께, 높이를 피해자들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일본에게 올바른 과거사청산 요구 운동은 어떻게 할 것인가? “빠른 복구!, 빠른 사죄!” 이 말 역시 961차 수요시위 소식을 보도한 한 일간지에 실린 길원옥 할머니의 인터뷰 내용이다.

특히 올해는 일본 중학교 교과서를 채택하는 해다. 지금 교과서 검정을 실시중인 일본 문부과학성이 3월 말에 검정결과를 공표할 것이며 8월 중에 전국 500여 채택지구에서 내년도부터 사용될 교과서를 결정할 것이다. 이미 예견하고 있다시피 이들 교과서 중에는 침략전쟁과 불법적인 식민지 역사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내용들과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에 대한 기술은 삭제된 지 이미 오래다.

역사에 대한 잘못된 교육과 기억은 또다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현재와 미래를 다시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사람의 생명이 희생당하고,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역사를 되풀이하게 된다. 즉, 일본정부의 역사에 대한 책임, 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은 그 어떤 일로도 묻혀질 수도, 보류될 수도, 미뤄질 수도 없는 것이다.

일본 대지진 피해가 빨리 복구될 수 있도록 지원함과 동시에 일본이 과거의 전쟁범죄에 대해 명확히 책임질 수 있도록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는 것은 한 시도 지체할 수 없다.

빨리 일본의 대지진 참사가 복구되고, 일본대지진 희생자들에게 ‘사람’ 중심에서 온정을 베풀었던 피해자들의 넓고 큰 마음을 일본정부가 조금이라도 본받아 과거 역사에 대한 책무를 빨리 청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윤미향(정대협 상임대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초창기 시절인 1992년부터 간사로 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부터 2001년까지 한국여성재단 활동 등에 참여한 4년을 제외한 나머지 15년이 넘는 시간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투신해 왔다. 현재는 정대협 상임대표로써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남북연대와 한일·국제연대, 피해자지원활동 등을 이끌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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