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

지난 2008년 가을 평양과 백두산 등을 참관했던 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이 방북기를 본사로 보내왔다. 필자는 뒤늦은 방북기를 쓰게 된 이유를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남북관계 탓에 혹시라도 새 세대들이 통일에 무관심하게 될까 하는 우려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걸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편 : 프롤로그 - 나와 DPRK
2편 : 인천공항과 순안공항
3편 : 평양이야기 (상/하)
4편 : 백두산이야기
5편 : 묘향산과 못 다한 이야기들
6편 : 에필로그

만(萬)가지 경치 아래 감춰진 슬픔

다시 우리가 탄 버스는 평양시가지를 달린다. 오후가 되니 평양시민들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진 느낌이다. '남새상점'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우리네 '채소가게'라는 말이지만 '채소'는 한자말이고, '남새'는 우리말이니 정겨움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문병란 시인의 '대처승의 남새밭'에서라는 시가 있는 것을 보아 남녘에서도 흔히 쓰던 말임에 틀림없다. 북녘에서는 '남새닭알말이, 남새국, 남새말이빵, 남새볶음, 남새비빔국수, 남새지짐 등등 채소가 들어가는 음식마다 남새라는 말을 붙여 부른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고향집 만경대'로 향하고 있다.

예로부터 만경대는 '평양9형승'(形勝)의 하나로 꼽히는 명승지였다. 대동강과 그 지류인 순화강 보통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우뚝 솟아 있는 만경대가 있는 남호 일대의 경관은 그야말로 절경 중에 절경이었다. 만경대에서 보이는 갖가지 절경을 함축해 `화촌10경'으로 불렀는데, `만경상춘(만경대의 봄경치)', `삼포범월(세 섬의 달밤 정경)', `봉포타어(봉포에서의 고기잡이)', `석호풍범(석호의 돛배)', `양산창취(양산의 푸른 기상)', `광촌취연(광촌 마을의 밥 짓는 연기)', `원암절벽(원암의 붉은 절벽)', `동림송객(동림 나루터의 손님배웅)' 등을 일컫는다.

이중 ‘만경상춘’을 첫째가는 경치로 꼽았다. 만경대는 원래 남호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남산'이라 불렀으나, 봉우리 자체가 높은 벼랑으로 돼있고, 정수리가 밀어낸 듯 펑퍼짐한 것이 정교한 누대를 닮았고, 산마루에 올라서면 사방 100리 안팎의 만(萬)가지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해서 만경대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만경대의 아름다운 경관과 달리 지주의 산당지기로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는 김일성 주석의 일가가 사연은 슬프기만 하다. 허름한 초가집도 그렇지만, 초가집에 전시된 ‘찌그러진 독이야기’는 더욱 애처롭다. 가난한 집안에서 알뜰한 살림을 하셨던 김 주석의 할머님이 이 독을 구입하면서 '독이 흉하다고 장맛이 다르겠냐? 앞으로 이 독 옆에 보기 좋은 독을 세워둘 행복한 세상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잖니 다시 나의 할머님 생각이 난다.

가난했던 그 시절의 할머니들이 모두 그러셨겠지만, 우리 할머님도 손자 양말에 난 구멍은 모아 두었던 천 조각으로 색깔을 맞춰가며 기워주시고, 부엌의 구멍 난 냄비들은 은박지로 때워가며 사용하시던 기억이 난다. 자세히 보니 생가에 전시되어 있는 독들이 온전한 것이 없다. 모두 깨어진 곳을 덧대어 보수한 흔적이 역력하다.

▲ 만경대 초가집에 전시된 독.[사진-이창훈]
고색창연한 가을 날씨에 잘 정돈된 잔디밭과 나무들이 우거진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만경대 내를 걷다보니, 지나가던 소도 웃을 강정구 교수의 ‘만경대 방명록 사건’이 떠오른다. 강교수가 2001년 8월 평양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 대축전'에 참가했다가 만경대를 방문하여 방명록에 "만경대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는 글 한 줄 남겼다가 교수직에서도 쫓겨나고 감옥살이까지 했던 일이다.

"북한 당국에 따르면, 만경대는 김일성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며 "혁명의 큰 뜻"을 키운 고향집으로, 그곳에는 그의 아버지 김형직이 일제를 몰아내고 조선의 독립을 이룩하자는 결의를 다지면서 심었다는 나무도 있다. 그러나 그가 1925년 "조국 광복의 길"에 오르기 위해 집을 떠난 뒤에는 거기에 살지 않았고, 1994년 죽어서도 조부모와 부모가 묻혀있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직 금수산기념궁전에 누워있을 뿐이다. 따라서 김일성이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10-20년대 만경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품었다는 "혁명의 큰 뜻"은 그가 1930년대 펼쳤던 항일 빨치산 투쟁에서 나타나듯, `민족 해방`과 `조국 광복`이 아니었겠는가. 그리고 강정구 교수가 쓴 "만경대 정신"이란 `항일 투쟁 정신` 또는 `반제국주의 자주 독립 정신`이 아닐까. - 이재봉교수의 통일뉴스 기고 글(2001.9.4)에서 -

강 교수도 이에 대한 해명을 했다. “만경대 정신은 만경대 혁명학원의 항일유자녀들에 대해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시키는 모습을 보고 우리도 항일운동 유자녀들에게 이와 같이 해야 한다는 뜻에서 적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 당시의 방송이나 일간지들을 살펴보면 모두 한결같이 '이와 같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여론들이 수긍하지 않는 모습이다'라고 보도하면서 더더욱 강 교수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강 교수는 민족통일을 위한 연구와 실천에 평생을 받쳐 온 지식인이다. 더디기만 한 민족통일의 길이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그런 글을 다 썼을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통일이라면 적화통일이니 반공통일이니 하며 방해책동이나 벌이고, 외세를 끓여들어 흡수통일을 운운하는 자들이 한마디로, ‘죄 있는 자’들이 죄 없는 순수한 사회학자인 강 교수에게 돌을 던지는 파렴치한 행동을 취한 것이다.

▲ 썰매바위.[사진-이창훈]
여기도 만수대와 마찬가지로 관람하는 북녘의 동포들이 많다. 그들과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눈다. 남녘에서 온 관람객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반갑게 인사를 나눠준다. 생가 방문에 이어 찾은 곳이 만경대혁명사적관이다. 이곳은 김일성 주석의 일가의 역사를 담은 기념관이다. 관람을 마치고 나와 휴식을 취하는데 안내원 동무가 노래를 한 곡 부른다. 사적관에서 본 ‘사향가’다. 사향가는 김일성 주석이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할 때, 지어 불렀던 노래이다.

▲ 글씨체가 아름답다. 특히 '운'자는 글씨체를 모르는 내가 보아도 글자체가 주는 안정감과 마치 산봉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북에서는 약 20도 정도의 경사각이 있는 김주석의 글씨체(태양서체)를 본받아 경사진 글씨를 쓰는 명필가들이 많다고 한다.[사진-이창훈]
사향가

내 고향을 떠나올 때
나의 어머니
문 앞에서 눈물 흘리며
잘 다녀오라
하시던 말씀
아 귀에 쟁쟁해

우리 집에서 멀지 않게
조금 나가면
작은 시내 돌돌 흐르고
어린 동생들
뛰노는 모양
아 눈에 삼삼해

대동강물 아름다운
만경대의 봄
꿈결에도 잊을 수 없네
그리운 산천
광복의 그날
아 돌아가리라


남북통일의 역사적인 자리 ‘쑥섬’

참 고마웠다. 미울 곳이 하나 없는 금강산에 갔을 때도 그랬다. 수십 년의 고난의 세월을 보냈을 그들인데도 금강송이며, 그냥 마셔도 된다는 깨끗한 계곡물이며, 단단한 화강암임에도 미끈한 몸매를 자랑하는 바위산들이며, '금강산의 명성' 그대로 간직해 준 북녘의 동포들이 고마왔는데, 지금 이곳 쑥섬에도 그 고마움과 미안함이 같이 느껴진다.

대동강 쑥섬(봉래도)에는 1948년 4월 19일부터 23일 4박 5일간, 남한의 41개 정당·사회단체와 북조선의 15개 정당·사회단체에서 선출된 695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했던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의 그 감격스러운 현장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었다. 김구, 김규식 선생들의 숨소리조차 느껴지는 곳이다. 게다가 지금 이곳에 김규식 선생의 증손자 김희상 씨도 같이 했으니, 그 60여 년 전의 남북 정치의 주객들의 환담장면이 눈앞에 선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타고 대동강을 건너온 '조각배'가 전시되어 있고, 화통스럽게 웃통을 벗어젖히고 돗자리에 앉아 남북통일을 통 크게 이야기 할 때, 사용하던 '돗자리'는 상하지 말라고 유리보호막으로 쳐놓은 북녘동포들의 손길까지. 그렇게 진지한 통일 이야기를 하다가 짧은 방북기간이지만 굳이 시간을 내어 김일성 주석과 김구 선생이 장기를 두었다-수십 년을 못 만나던 친구도 장기 한 판에 성내는 그런 가까운 사이가 우리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는 원두막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아! 그 역사적인 순간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는 같은 민족이 사는 한반도에 각기 다른 두개의 정부가 들어 설 수밖에 없는 민족사적 위기 상황에서 '우리 민족끼리', '사상과 정견을 뛰어 넘어', '전쟁 없이 평화적으로' 등등 현재도 진행형이 민족통일의 정신을 최초로 보여준 남북회담이었다. '4월 남북연석회의'가 평양에 이어 서울에서 개최되고 남북화해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면, 우리 민족은 전쟁의 포화소리를 듣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방북했던 2008년은 60주년이 되는 해이었다. 그해 4월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는 각기 다른 곳에서 '4월 남북연석회의' 60주년을 기념하였다. 그리고 공히 '연석회의의 정신에 공감하고 이를 계승하는 것이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이며, 이의 이행을 위해 뭉치고 실천해나가자'고 밝혔다. 김구 선생이 목숨을 내놓고 갔던 길이다. 김구 선생을 살해한 살인범은 죽었으나, 선생이 목숨보다 더 중히 여겼던 '민족통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 돗자리[사진-이창훈]
우리는 따가운 가을 햇살을 피해 큰 능수버드나무가 만들어 놓은 그늘 밑 풀밭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안내원 동무'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앗! 이런' 홍수 때문에 곳곳이 파여 있는 흔적이 보였다. 잘 보존하던 버드나무의 가지가 부러지기도 했단다.

한심한 학생 한 명이 또다시 주위를 배회한다. 선생의 말씀을 듣는 척하며 딴 짓이다. 혹시나 그곳에서 네잎클로버라도 발견하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땅을 쳐다보고 있었다. 뒤에 있던 구로시민센터 김성국 대표가 툭 친다. '어이 말씀하시는데 졸지 마시라요' '헉!'

강의도 끝나고 개인별 기념촬영도 거의 다 끝나고 그곳을 떠나려는데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 민족 구성원 모두가 통일을 바라고 있는데 유독 남쪽에서만 통일을 반대하고 질질 끌고 딴죽 걸고... 통일되면 제 재산이 다 없어지기나 할 것처럼 민족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아아... 민족통일의 영령들이시여!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오천년 아니 수만 년의 유구한 한민족의 역사에서 이처럼 어리석은 시절이 있었습니까? 외세의 침략에 너나할 것 없이 온 백성들이 나서 싸웠는데, 가까이는 일제 강점기 시대만 해도 전 가산을 팔아 나라를 구할 이역만리 땅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수많은 독립애족애국 열사들이 있던 기억들이 아직 생생한데, 지금 이 땅에는 자신의 아비가 살았고 자신의 자손들이 살아갈 이 민족의 목숨을 귀히 여길 줄 모르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런 생각에 발걸음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그렇게 어그적 어그적 차량 가까이 왔는데, 차에서 기다리던 '안내원 동무'들이 갑자기 큰소리로 이야기한다.

“아까 안경 나사못을 잃어 버렸던 분이 누구입니까?”

'앗! 이런...' 쑥섬에 도착하여 나의 여행 준비물인 검은 테 선글라스의 귀걸이쪽 나사 하나가 빠져 이리 저리 찾던 나의 모습을 보고, 쑥섬 관람시간 내내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어코 나사못을 찾아 내 앞에 건네준다. 감격이다. 자본주의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여행안내원들의 친절이다. 그 순간 또 감격에 겨워하는데, 다음 코스가... “힘드셨죠. 다음 코스는 ‘평양단고기’ 맛을 보러갑니다.” 관광객 일동! “와~ 어서 갑세다래~”

달고 단 '단고기'의 맛을 보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평양거리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벌써 불을 밝혀놓은 건물들이 여럿 보인다. 방북 첫날의 일정이 마무리 되고 있었다. 유홍준의 '우리문화유산 답사기'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아는 만큼 보인다'

나는 대학시절 '북바운'(북한바로알기운동)을 주도했었다. 1989년의 '세계청년학생축전' 당시 관련자료를 모아 자료집을 발간하기도 하였고, 북과 관련된 서적을 수십 권 탐독하였다. 부족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들 앞에 서면 북녘 땅에 대해 이야기할 정도는 된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방북 첫날을 보내고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보지 않으면, 아는 것도 무용지물이다'

이젠 평양거리에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양각도 호텔로 이동하는 버스 안,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다. 대낮에 보여주던 여행객의 밝은 표정과 소란함 대신 고요함이 찾아든다.

평양에서의 첫날 밤

▲ 양각도 골프장 전경.[사진-이창훈]
여행객에게 처음 보는 경치나 경관도 큰 즐거움이지만, 그곳에서 밤의 향연(?)은 더욱 기다려지는 법이다. 낮에 첫 인사를 나눈 구로시민센터 김성국 대표가 나를 잡아끈다. 사실 다른 여행지를 택했다면 나는 야시장을 가장 먼저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낯설은 남녘의 이방인들에게 그것까지는 허락되지 않았다. 양각도 호텔에는 세 번 쳐서 넣는 파3, 9홀 짜리 골프장이 있다. 골프채, 골프화, 공 등을 다 빌려주는데 2~30유로이니, 우리 돈으로 5만 원 정도면 이용할 수 있는 저렴한 가격이라고 한다. 물론 야밤에 골프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간 곳은 다름 아닌 골프장에 딸린 '청량음료매대'이다.

김 대표가 어디서 이야기를 들었나 보다. 이곳에서는 청량음료만 파는 것이 아니라 맥주도 판다고 한다. 매대 안으로 들어서며 자리를 잡자, 접대원 동무들이 주문서를 들고 온다. 다른 손님은 없었다. 청량음료매대답게 사방이 확 트여 있었고, 양각도를 감싸며 흐르는 대동강의 풍치가 보였다. '대동강맥주'를 주문하니, 대동강맥주가 떨어지고 '하이네킨맥주' 밖에 없다고 한다. 가난한 객들에게는 0.5유로하는 대동강맥주가 최고인데, 하는 수 없이 2.5유로짜리 300ml 하이네킨맥주를 마실 수밖에... 남녘에서 온 여행객을 반갑게 맞이한 접대원 동무가 술과 안주를 갖다 주면서 묻는다.

"오늘 오셨습니까?"

20대 초반의 앳된 얼굴을 가진 접대원 동무가 북녘 땅 특유의 쎈 억양으로 물어오니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어디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 양각도 호텔방안에 걸려 있던 달력이다. 달력의 모델들은 북녘 TV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이다.[사진-이창훈]
이제야 정겨움이 느껴진다. 순안공항에 처음 도착해서 딱딱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하던 공항직원들부터 차량안내원 동무들, 매일 같이 같은 말투와 같은 내용으로 열심으로 설명하던 만경대와 쑥섬의 해설가 동무들, 그리고 차량 안에서 쳐다만 볼 수밖에 없었던 평양시민들... 손님이 없었던 탓에 그 접대원 동무들도 심심했나 보다. 먼 곳에서 온 여행객들에게 이것저것을 묻는다. 우리들의 이구동성의 답변을 듣던 중 한마디 한다.

"백두산도 가십니까?", "야~ 좋것다, 와~ 부러워라."

북녘 땅에 살면서도 아직 백두산을 못가본 모양이다. 북녘의 동포들이 백두산을 가려면 '실적'이 좋아야 한단다. 직장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백두산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다. 탁자위에 맥주병이 늘어난다. 아랫배가 묵직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오니 대동강 찬바람이 술기운에 붉어진 뺨에 와 닿는다. 강 건너 평양시내의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조도는 약해 보였지만 아파트 칸칸이 불이 들어와 있다. 북의 열악한 전기사정을 보여준다.

저녁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다른 팀이 궁금해졌다. 서울에서처럼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할 수 있다면 이곳으로 오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도리가 없다. 아마도 우리 일행은 호텔 꼭대기인 48층 회전식당에서 회포를 풀고 있을 것이다. 접대원 동무들에게는 백두산을 다녀와서 다시 찾겠노라고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전식당을 찾아 가니 지인들이 여럿 자리를 하고 있었다. 주동욱 선배와 통일뉴스 기자들 그리고 우사 김규식연구회 관계자 분들이 둘러 앉아 뭔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니 어디 갔다 왔냐고 물으며, 좋은 구경을 놓쳤다고 타박이다. 회전식당이 회전을 멈췄다는 것이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평양시내 야경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우리의 1차 이야기를 듣고 다시 타박이다. 그 좋은 곳에 자기들끼리만 다녀왔다고...

그리고도 한 차수를 더 채웠다. 김 대표가 끝까지 남았다. 3차는 호텔 2층에 있는 식당이다. 여기 들어서니 북새통이다. 남에서 온 동포들도 가득하고 현지의 북녘 동포들도 가득하다. 누가 북에 살고 누가 남에서 왔는지 구분이 안 간다. 다들 한 민족인 듯하다. 자정이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아마도 내일 백두산이 아니었으면, 내 스스로 내 주제를 살피건대 아마도 끝장을 보았을 것이다. 밤새 '통일-주정뱅이'가 되어 남과 북으로부터 눈총을 받았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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