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상징하면 또 떠오르는 것이 감귤입니다. 이제는 운송수단이 발달해 겨울에 흔히 먹을 수 있지만 예전에는 과거를 본 뒤 장원을 한 자에게 상품으로 줬을 만큼 귀한 과일입니다.

몰래 먹을 수도 없게 껍질을 까는 것만으로도 온 주변이 상큼해지는 감귤을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먹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제주와 남부 해안지대에서 흔히 자랐을 것으로 보이는 제주 감귤나무 특성상 선사시대부터로 추정됩니다. 특히 일본 구마모토현의 오랜 전설에 의하면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삼한(三韓)에서 귤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심게 했다고 해 삼한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기록상 가장 오래된 것은 <탐라지(耽羅誌)>에 실려 있는 것으로, 백제 문주왕 2년(476년) 탐라국에서 공물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제주 지역에서 감귤이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려사 세가(高麗史 世家)에서는 문종 6년 (1052년) 3월에 “탐라에서 세공하는 귤자의 수량을 일백포로 개정 결정한다”고 해 제주 감귤의 진상역사는 오래됐다 할 수 있습니다.

이후 감귤(柑橘)이란 용어는 조선시대 세조원년(1456년)에 제주도 안무사에 내린 유지 <세조실록(世祖實錄) 2권>에 나옵니다. “감귤은 종묘에 제사지내고 빈객을 접대함으로써 그 쓰임이 매우 중요하다”로 시작된 유지에는 감귤의 종류 간 우열, 제주과원의 관리실태와 공납충족을 위한 민폐, 사설과수원에 대한 권장방안, 번식생리와 재식확대, 진상방법의 개선방안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주의 감귤은 왕가에 의해 관리돼 왕가에서 파견한 관리는 감귤나무의 수를 일일이 기록했으며 그 수확물을 모두 거둬 한양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과원과 상납과실을 관장하기 위한 중앙의 전담관서는 고려의 동산색(東山色), 조선의 상림원(上林園, 후에 장원서<掌苑署>로 바뀜) 등인데요, 조선의 상림원은 고려의 동산색을 개선한 것이므로 관영과원의 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있어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653년에 이원진 제주 목사가 쓴 〈탐라지〉에는 임금에게 감귤을 원활히 진상하기 위해 도내에 37개소의 과원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각 과원마다 감자와 유자·산귤·금감·청귤 등 12가지 품종의 재래 감귤을 재배했다고 전합니다. 특히 이 과원들을 ‘금물과원(禁物果園)’이라 칭하고 병사로 하여금 감시토록 해 일반 백성들의 출입을 금하게 했다는 유래까지 실려 있습니다.

감귤의 진상 때문에 제주도 농민들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는데요, 초여름에 피는 감귤 꽃의 수를 세어두었다가 겨울에 그만큼의 감귤을 거두려고 했고, 감귤이 많이 열린 해를 기준으로 해마다 똑같은 양의 감귤을 상납하도록 했습니다. 농사를 짓다보면 궂은 날씨에 열매가 상할 수도 있고 또 병이 들거나 벌레에 먹힐 수도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죄다 상납하게 하니 민가에서는 감귤의 재배를 기피했고 살아있는 나무를 캐버리거나 뿌리에 끓는 물을 부어 나무를 고사시켰습니다.

1669년경 쓰여진 김상헌의 문집 <남사록>에는 “해마다 7, 8월이면 목사는 촌가의 귤나무를 순시하며 낱낱이 장부에 적어두었다가 감귤이 익을 때면 장부에 따라 납품할 양을 조사하고 납품하지 못 할 때는 벌을 주기 마련이었다. 이 때문에 민가에서는 재배를 하지 않으려고 나무를 잘라버렸다”고 전합니다.

또한 제주도에서부터 왕실까지 수송도 문제가 돼 상품가치가 떨어지고 시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숙종실록> 권제23, 7장에는 숙종 17년(1691년) 2월 6일에 “사옹원에서 제주에서 진상한 감귤이 썩었다 하여 봉진관을 추고하고, 가져온 사람을 다스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해로에서 순풍을 기다리느라 시일을 보낸 것이지, 귤이 썩는 것을 삼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여 문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는 내용이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감귤은 제주에서 재배가 되지만 정작 제주 농민들은 하나 맛도 보지 못하고 모두 왕족들과 중앙관리들만 맛볼 수 있었습니다. 감귤이 얼마나 귀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 중의 하나는 ‘황감제(黃柑製)’라는 과거시험입니다.

황감제는 1641년(인조19년)에 처음 시작된 과거로 성균관과 사학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을 대상으로 매년 12월에 제주목사가 감귤, 유자 등을 진상하면 기념으로 봤습니다. 일반 과거처럼 33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 단 1명만을 뽑았고 몇 차례에 걸쳐 시험을 보는 것과 달리 단 1차례에 뽑아 바로 관직을 주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이후 고종 31년(1894년)에는 갑오개혁으로 공물제도가 없어져 더 이상 감귤의 수탈은 사라졌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와 함께 제주의 감귤나무는 버려졌다고 합니다. 가뜩이나 식량이 부족한 시절, 땅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식량이 될 만한 작물을 심어야했고 또 그동안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농민들이 너무 지긋해 감귤나무들을 꼴도 보기 싫다고 캐버렸기 때문입니다.

1900년대에 서귀포 일부지역에 감귤원들이 개원하면서부터 감귤재배가 시작되는데 일반농가에 보급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부터입니다.

일제는 제주에 일본의 감귤을 이식했고 이 시기 오렌지 등 여러 감귤류가 도입되었지만 주요 품종은 지금의 제주 감귤인 온주귤입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는 제주농업이 상당히 피폐해 감귤이 잘 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식산진흥정책의 일환으로 각 농가에 감귤묘목을 배포했으나, 일본산 감귤이 자유롭게 유입돼 감귤 판로가 막히고 기술부족으로 모종을 밭에다 심은 후에도 10~15년이 지나야 결실하기 때문에 일부 농가에서는 감귤식재를 회피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밀감’이라는 명칭을 썼었는데요, ‘밀감’이란 일반적으로 온주밀감(溫州蜜柑)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온주란 말은 중국의 온주 지방을 뜻하는 말로 일본인들은 중국 온주가 원산지인 감귤류의 한 품종을 개량해 온주밀감으로 불렀는데 이것이 일제시대 제주도에 도입되면서 밀감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입니다. 즉, ‘밀감’이라는 말의 유래는 일본 사람들이 중국 온주감귤을 비교적 달고 맛있게 개량하면서 ‘꿀처럼 단 감귤’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합니다.

감귤(柑橘)에서의 감(柑)은 단감 등의 ‘감’과 다른 것으로 단감, 홍시 등을 통칭하는 ‘감’은 순우리말이고 한자로는 홍시 등에 쓰이는 시(枾)라고 합니다. 감귤, 밀감에서의 감(柑)은 달 감(甘)자가 아니고 감자(柑子)나무를 뜻하는 것으로 감자나무란 ‘홍귤’을 가리키는데, 홍귤은 제주도가 원산지로 임금에게 진상했다는 제주산 토종 감귤을 말합니다.

이제는 토종 감귤이 남아있지 않지만 귤이라는 말이 재래감귤을 상징하며 계속 사용돼 오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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