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경우가 많다. 가진 게 별로 없더라도 막판까지 자신을 지켜주는 건 자존심이다. 자존심마저 잃는다면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북한은 자존심이 강한 나라다. 북한은 항일무장투쟁 세력으로서 일제시대를 거치고 이어 냉전시대를 지나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자존심을 지켜왔다고 자랑한다. 특히 미국과의 60여년 갈등과 대결 구도 속에서도 한 치의 양보 없이 자주성을 옹호해왔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런 북한에게 자존심을 건드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 된다.

◆ 9일 오후 남북 군사실무회담에서 북측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과 북은 한편으로 고위급 회담 의제와 참석자의 지위 등에 대해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한 시도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오후 회담에서 북측은 천안함 사건에 대해 “철저하게 우리와 무관한 사건이다. 미국의 조종 하에 남측의 대북 대결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한 특대형 모략극”이라고 주장했으며, 연평도 사건에 대해서는 “남측이 연평도를 도발의 근원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일단 북측이 판을 깬 것이다.

◆ 왜 그랬을까? 게다가 이번 군사회담은 북측의 계속된 대남 대화공세로 인해 어렵게 마련된 자리이지 않은가? 그러기에 더욱 어리둥절하다. 사단(事端)은 이렇다. 고위급 회담 의제와 관련해 남측은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 두 가지만을 고집한데 반해 북측은 이 두 가지 의제에다 ‘군사적 긴장해소 방안문제’도 함께 다루자고 했다. 사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어느 대북 전문가의 지적대로 남측의 두 가지 의제 고집은 “판사와 죄수 신분으로 회담하자는 것인데 북한이 받아들이겠느냐”는 것이다. 남측이 북측의 자존심을 계속 건드렸다는 것이다.

◆ 더 의미심장한 게 있다. 북측이 9일 오전회의 서두에서 8일 1차 실무회담에 대한 남측 언론보도에 ‘불쾌하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즉, 북측이 “남측 대표단이 1차 실무회담의 내용을 기자들에게 설명한 것에 대해 기자들이 그렇게 보도하면 대화하는데 좋지 않다는 식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북측은 8일 1차 실무회담을 끝내고 귀가한 뒤 남측의 언론보도를 모니터링했을 것이다. 이때 대부분의 남측 언론들이 북측 대표단의 회의 연장 요청 등을 두고 ‘저자세’, ‘마음이 급하다’는 식으로 보도한 것을 봤다면 자존심이 센 북측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 모두가 알다시피 북측은 올해 초부터 남측에 대해 과할 정도로 대화공세를 펴 왔다. 북측은 남측에 조건 없는 남북대화 개최를 제안하면서도 그 이유로 “현 남측당국이 임기 5년을 대화 없이 헛되이 흘려보내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명분을 들었다. 결코 북측이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대화를 구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존심 강한 북측과 대화를 하자면 많은 걸 감수해야 한다. 상투적이지만 상대의 위신을 세워주는 게 자신의 품위를 높이는 게 된다. 남측이 진정으로 남북대화를 원한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간 북측에 대해 할 일은 명확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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