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빨치산 출신의 비전향장기수 임방규(78) 선생의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를 매주 금요일에 연재한다. 이 자서전은 한국전쟁 당시 전북유격대 기포병단(일명 외팔이부대) 정치부 중대장이었던 필자가 사형을 선고받고 형 집행을 기다리며 동료, 가족과 나눈 깊은 인간애를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필자는 남쪽에 남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 뒤 빨치산 격전지 현장을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빨치산 역사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 편집자 주

너희를 지도하는 선생이 누구냐?

죽음을 앞두고 지난날의 잘못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고창중학교에 다닐 때다. 민주학생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따라 친구들이 놀러왔다가 함께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취방 문이 열렸다. 누가 몽둥이로 나를 툭툭 쳤다.
“이방규가 누구야?”
“이방규는 없고, 내가 임방규다.”
“네가 맞아? 어서 일어나.”
나는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가자.”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교교한 달이 중천에 떠 있고 삼월 중순이라 밤 공기가 조금은 쌀쌀했다. 고창천 둑길을 따라가면서 한 녀석이 나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을 지도하는 선생이 누구냐?”
“모릅니다.”
“사무실에 가면 너는 죽어 나온다. 선생만 대면 그냥 집으로 돌려보내마.”
“모릅니다.”
무슨 영문인지 전혀 모르는 듯이 멍청하게 대답했다.
“너희 세포 성원이 몇 명이냐? 누구 누구냐? 이름을 대라.”
“모릅니다.”
함께 자던 벗들이 다 맹원이었고, 그들 중엔 학년 책도 있었는데 그들이 우리 내부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가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놈, 쬐깐한 녀석이 보통이 아닌데, 이 자식 두고 봐. 네 놈 입에서 나오나, 안 나오나.”

서북청년단, 학련 학생들

어디서 정보가 새 나간 것인가. 가슴은 두근거리고 도무지 예측이 가지 않았다. 나를 잡아온 것은 서북청년단에서 한 녀석하고 학련(반공 학생단체)에서 세 녀석이었다.
경찰서 앞의 기와집에 악명 높은 서북청년 사무실이 있었다. 뜰 안에 들어서자 한 녀석이 주둥이에다 손가락을 넣고 휙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잡아왔다는 신호였던 모양이다. 미닫이를 열고 여러 녀석들이 나오며 나를 잡아왔다고들 좋아했다. 그 중 한 녀석이 나를 끌고 가서 대청마루 가운데 세워놓고 묻지도 않고 붕대를 감은 주먹으로 가슴과 배, 양 볼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마치 권투장의 샌드백을 치듯 마구잡이로 쳤다. 오면서 회유했던 녀석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 자식, 단단히 손봐줘.”
얼마나 맞았을까. 입 안은 터져서 피가 흐르고 주먹은 힘이 약해졌다. 한 녀석이 오더니 바통을 이어받기라도 한 듯 처음 녀석을 밀어내고는 내 목을 잡았다.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가 하면 다시 바닥에 메어치면서 유도의 갖가지 기법으로 나를 마룻장에 내리쳤다. 그 녀석이 지칠 무렵, 다른 두 녀석이 오더니 한 녀석은 내 어깨를, 또 한 녀석은 엉덩이를 받쳐 들고 높이 올렸다가 동시에 바닥에 놓아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마룻바닥에 그대로 패대기쳐졌다. 이 고문이 세 번 거듭되자, 나는 아이들이 개구리를 잡아서 땅에 치면 바르르 떨다가 뻗어버리듯 바닥에 쭉 뻗어버렸다. 손이고, 발이고 어느 곳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룻바닥에 죽은 사람처럼 뻗어 있는데 녀석들은 다시 나를 질질 끌어다가 나무의자에 앉히고 양팔을 의자 뒤로 묶고는 한 말들이 주전자를 가지고 왔다. 명주 수건을 물에 적셔서 얼굴을 덮고 물을 부었다. 코로, 입으로 물이 쏟아졌다. 숨이 컥컥 막혀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너를 지도한 선생이 누구냐?”

학련 위원장, 김철하

세 주전자를 부어도 내가 이름을 대지 않자, 이번에는 김철하(고향은 군산이고 목사 아들이며 이름난 악당이었다. 당시 학련 위원장)한테 넘겼다. 철하는 몽둥이를 들고 의자에 앉아 나를 바닥에 꿇어앉혀 놓고 심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쪽 구석 어둑한 곳에 진영초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감이 조금 잡혔다. 또 한편에 진영도(영초 사촌형, 아버지가 전선에 나왔고 가정환경이 좋았다)와 상급반 학생이 매를 맞고 있었다. 진영초는 내가 보증을 서서 학생동맹에 가입시켰는데 아직 세포에 배치시키지 않은 상태였다. 개별학습 중이었다. 따라서 영초는 나 이외에 아무도 모른다.
“영초를 네가 가입시켰나?”
“예.”
“네 소속 세포성원이 몇 명이며 누구누구야?”
“모릅니다.”
“네가 영초를 가입시켰다면서 세포원을 몰라?”
“모릅니다.”
영초는 아무리 고문을 해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불 수가 없음을 알고 나는 모른다고만 했다.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 민주학생동맹에 가입했냐?”
“가입했습니다.”
“누가 가입시켰냐?”
“김시봉이가 가입시켰습니다.”
“시봉이 이 자식.”
시봉이 말이 나오자마자 몽둥이가 날아왔다. 얼른 손으로 머리를 덮었다. 내 손등은 금새 밤알만큼 부어올랐고 머리에도 혹이 생겼다.
“이 자식, 안 되겠다.”
그들은 기둥에 나를 꽁꽁 묶어놓고 몽둥이 끝을 목대줄에 대고 기둥에 힘껏 밀어붙였다. 숨이 막혀서 죽을 것만 같았다.
김시봉 동무는 이미 지하로 들어간 뒤였다. 전날에 철하가 시봉이한테 죽을 뻔 한 사건이 있었다. 시봉이 수배되어 피해 다닐 때였다. 고창천 상류 냇가에서 철하가 시봉이를 발견하고 추격했다. 거의 잡힐 뻔 한 순간, 시봉이가 홱 돌아서며 품에서 단도를 꺼냈다. 운동선수인 철하가 몸을 날려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래서 시봉이 이름이 나오자 내게 화풀이를 한 것이었다.

고창을 탈출하다

다음에 서북청년 간부인 듯한 나이 들어 보이는 자가 일문일답으로 조서를 작성했다. 그는 먼저 이름, 나이, 고향을 물었다.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
문득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어서 턱없이 많은 논밭 평수를 댔다. 그러자 펜을 든 채 나를 바라보더니,
“학생동맹에 가입할 학생이 아닌데?”
하며 말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적는 것을 그만두고 물었다.
“어떻게 해서 학생동맹에 가입하게 되었나?”
“시봉이하고 친했는데 아주 좋은 모임이라고 해서 시봉이 말만 믿고 가입했습니다.”
“가입한 사람들을 아나?”
“모릅니다.”
“왜 몰라?”
“내가 좀 알려달라고 했더니 차차 알게 된다고 하데요.”
영초가 학습기간이라고 나와 같은 대답을 했기 때문에 그는 앞서서 영초 취조를 했던 터라 내 말에 얼마간 수긍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는 영초와 내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초가 나를 업고 갔다. 날이 희미하게 밝아오는데 눈앞이 온통 별이었다. 목이 부어서 침마저 삼킬 수가 없어서 영초 등에 침을 질질 흘렸다. 영초에게 어떻게 잡혀왔느냐고 간신히 물었다. 한 방을 쓰는 하숙생을 잡으러 왔다가 저놈도 수상하니까 데리고 가자고 해서 덤으로 끌려왔다가 매에 못 이겨 나를 불었다며 몇 번이나 사과했다.
그로부터 닷새 뒤, 나는 고창을 탈출했다. 위로부터 조직이 노출돼 다시 잡히게 되면 그때는 살아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지하에 묻혀서라도 싸웠어야 했지만, 나는 조직의 결정도 없이 고창을 떠났다. 뒤에 들었는데 조재민, 이대규 등 벗들은 입산해 끝까지 싸웠다고 한다.

보초 없이 자다

이런 잘못은 입산 후에도 있었다. 1951년 3월, 선이 떨어진 채 여덟 명이 임실 성수산에 있을 때였다. 사업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장수군 유격대와 함께 골짜기에서 밥을 해먹고 안전지대에 들어간 것이 새벽 세 시쯤 되었다. 성수산 상봉에서 삼백여 미터 떨어진 자연 동굴에서 자기로 했다. 그런데, 보초문제가 나오자 동무들이 보초 없이 서너 시간만 자자고 했다. 지서까지는 이십 리가 넘고 그들이 뒤를 밟았다면 우리가 밥을 해먹을 때 기습했을 것이니, 피곤하니 그냥 자자고 했다. 보초를 세우고 자야 한다는 유격대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나의 주장도 완강했다. 그러자 박근주 동무가 굴 앞 바위 밑에서 자겠다는 새로운 의견을 내놓았다. 만일의 경우 토벌대가 온다고 해도 앞에 바위를 지나기 때문에 동굴 안에 있는 동무들은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동의했다. 박동무와 조동무가 바위 밑에 가서 자고, 나머지 동무들은 추운 때라 동굴 안에 불을 피워놓고 쪼그리고 잤다.

넝쿨을 잡고 절벽을 타다

오래지 않아 귀창을 뚫는 듯한 총소리가 들렸다. 동굴 천정에서 돌조각과 총알이 우수수 떨어졌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것이다. 동무들은 동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안쪽에 있었던 나는 연발총을 들었다. 두세 동무는 엉겁결에 총을 놓고 굴 밖으로 나갔다가 손을 내밀며
“내 총 내 총.”
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총을 내주고, 날 새기 전이라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으로 적의 위치를 파악한 뒤 잽싸게 굴 밖으로 나가서 위쪽 바위에 등을 붙였다. 동무들이 아래로 빠지고 토벌대 또한 아래쪽으로 몰려가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때 사람이 벽에 붙으면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주위를 살피며 살금살금 올라갔다. 바위가 길게 이어진 중간에 낮은 부분이 있어서 그곳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날이 막 밝아서 십여 미터 전방을 볼 수 있게 되자, 아래쪽 바위 끝에 있던 경찰 두 명이 소리쳤다.
“저기 간다! 저기 간다!”
칠팔 미터 거리였지만 총성을 내면 내 위치가 노출되어 포위망을 빠져나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 살짝 바위를 안고 돌았다. 그런데 더 갈 수가 없었다. 절벽이었다. 되돌아가자니 이미 날이 밝아서 적 앞에 노출될 것이다.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그 때 바위틈에 난 소나무 위로 칭칭 감겨 있는 칡넝쿨과 댕댕이 넝쿨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소나무 밑에 가서 두 종류의 넝쿨을 힘껏 잡아당겼다. 더 이상 풀리지 않고 팽팽하게 되었을 때 따발총을 거꾸로 메고 굵은 넝쿨을 쥐고는 벼랑 아래로 몸을 던졌다. 잡아당긴 힘보다 체중이 주는 무게가 컸던지 소나무에 감긴 넝쿨이 주르륵 풀리면서 떨어지다가 멎는 바람에 그만 벼랑에 부딪혔다. 따발 탄창이 허리를 쳤다. 숨이 막힐 듯 아팠다. 가까스로 너덜겅에 닿았으나 주저앉은 채 꼼짝할 수가 없었다. 탄창이 찌그러져서 작동이 안 되고, 놈들의 수색대가 오면 잡힐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몸값을 해야지.’
배낭 속에 예비탄창을 꺼내서 소리 안 나게 바꿔 끼우고 주위를 살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총성이 들렸다. 허리를 주무르며 몸을 움직였다. 차츰 몸 놀리기가 나아져서 억새풀을 제치며 기어 나갔다. 허리에 손을 짚고 통증은 있었지만 살살 걸어서 작은 능선을 넘었다. 북쪽은 눈이 쌓여 있고 이삼 미터 폭의 빙판이 낭떠러지 저 아래 골짜기로 이어져 있었다. 숨을 멈추고 왼발로 턱진 빙판 복판을 살짝 딛고는 뛰어넘었다. 뒤돌아보니 아찔했다. 조금만 삐딱했으면 굴러 떨어졌으리라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평상시라면 도저히 넘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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