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일『정세현의 정세토크』출간 기념으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과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미국의 한 수필에서 ‘감기는 미국에서 매우 인기 있는 병이다. 푹 쉴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직장인으로서는 매우 반가운 병이다’라고 했더라. 또 ‘약을 쓰면 2주일(two weeks), 약을 안 쓰면 14일(14days)’이라고도 했다. 약을 쓰기보다는 푹 쉬어야 하는 병이라는 것이다. 약을 먹어도 잘 안 떨어지던 감기가 한약을 먹고 좀 쉬었더니 나았다.”

신간 『정세현의 정세토크』(서해문집)를 어떻게 소개할까 고민하다 ‘정세현 토크’를 갖기로 작정하고 만난 자리에서 그는 감기가 심했다며, 특유의 여유로운 넉살로 말문을 열었다.

<프레시안> 황준호 기자와 나눈 ‘정세토크’를 정리해 엮은 이 책 속에는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에 관한 그의 풍부한 경험과 예리한 분석들이 넘쳐난다.

예를 들어, 노무현 정부 시절 쌀 지원이 정례화되는 과정에 쌀포대에 ‘대한민국’을 써넣게 한 과정이나, 미측의 5자회담 제안을 북측이 6자회담으로 수용하게 된 배경 등은 어느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다. 특히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유래하는 불합리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남북을 가리지 않는 날카로운 비판의식은 만만찮은 내공을 뿜어낸다.

그 비결은? 물론 그가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통일부 장관이자 노무현 정부의 첫 통일부 장관으로서 21차 남북장관급회담 중 여덟 번 수석대표를 맡는 등 20여년의 화려한 공직경력에 있겠지만 황준호 기자는 거기에다 학자로서의 ‘연구자적 태도’를 보탰다.

그렇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남북관계가 파탄에 처한 지금에 그가 더욱 돋보이는 이유는 현 정부에 대한 단순한 비판을 넘어 민족의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쏟아내는 격정의 토로 때문일 것이다. 그의 풍부한 경험과 뛰어난 이론이 빛을 더하는 것은 바로 그의 진정성의 크기 때문이 아닐까?

정세에 관한 내용은 책 속에 오롯이 담겨있기 때문에 지난 16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가진 인터뷰는 ‘정세현’을 소재로 진행됐다.

▲ 인터뷰는 정세에 관한 내용 보다는 정세현 전 장관의 생각을 들어보는 자리였다.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통일뉴스 : 책을 보니 원래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더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71년 장충단 대선 유세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도 했다. 왜 지금 정치를 안 하나?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 솔직히 20대까지는 관심이 많이 있었다. 정치학과를 못가고 외교학과를 가게 된 것도 정치에 반대한 아버지 때문이다. 정치학과를 안 간다고 정치를 안 하는 것은 아닌데 아버지가 잘못 알고 계셔서 피해가는 수법이었다. 결혼하면서도 와이프가 정치하는 사람은 절대로 싫다고 해서 안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 근처에 안 간다.

공무원 생활하고 연구 쪽에 관심 갖고 일해 점점 정치에 뛰어들 나이가 지났다. 40대 중반 이전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보는데, 60대 중반을 넘어섰기 때문에 틀렸다.

□ 김영삼 정부에서 통일비서관을 맡았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내면서 세 분의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했는데, 가까이서 본 세 분 대통령은?

■ 나는 주로 그분들의 대북관, 통일정책에 관련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처지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북관이 좀 강경했다고 할까, 북한 붕괴론을 확신하고 있었던 분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남북관계를 서두르지 않아도 우리가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온다는 붕괴론에 근거한 상황접근을 믿고 있었다. 대북정책이 특별히 없었고 별로 일도 없었다. 94년 6월 미국의 대북 폭격계획이 구체적으로 추진되면서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이 이뤄지고 그걸 계기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급반전 상황이 우리에게 도래하면서 정상회담을 준비했지만 기본적으로 김영삼 대통령 대북관은 남북간 화해협력을 통해서 상황을 관리한다거나 또는 안보리스크를 줄여나간다는 생각은 적게 한 대통령이다. 김일성 주석 사망 후에는 붕괴론에 대해 더욱더 강한 신념을 가졌다. 통일부나 통일비서관도 그렇고 ‘통일’자 붙인 연구소도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그에 반해 김대중 대통령은 실용적 대북관을 가지고 있었다. 보기에 따라선 친북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일종의 모함에 가까운 표현이고, 북한이 좋아서가 아니라 북한을 방치하는 경우 우리가 받게 되는 불이익이 크기 때문에 관리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60년대 말 미.소간 화해무드, 미.중간 화해무드가 서서히 조성될 때 이미 대통령 후보가 되기 전부터 남북교류론을 이야기 했었다. 그게 71년 대선시 장충단 연설로 완성되는 셈인데, 그 논리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된다, 흐름을 타고 손해는 보지 말아야 한다. 남북관계를 어떤 식으로라도 관리해서 긴장을 완화시키고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대통령이 돼서 정책 추진 권한이 주어진 거다.

노무현 대통령도 김대중 대통령이 창당한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그분 자신이 기본적으로 진보 정치인이기 때문에 화해협력을 마다할 리 없었고, 햇볕정책을 계승.발전시킨다는 취임사도 했지만 같은 대북 화해협력정책론자라 할지라도 김대중 대통령보다는 내면화, 신념화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왔다갔다 했다. 북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남북관계 가 단절되고, 정상회담도 안 됐다가 막판에 서두르고...

김영삼 대통령은 강경한 대북관을 가졌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유연한 대북관을 가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신념화됐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신념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일종의 관념적이었다고 할까 그런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 2002년 1월부터 2004년 6월까지 29대, 30대 통일부 장관을 연임하면서 남북 장관급회담 수석대표를 맡았는데, 북측 상대는 누구였고 인간적 막역함은 없었나?

■ 21회 장관급회담에서 8번 대표를 맡아 역대 통일부 장관 중 장관급회담을 제일 많이 했다. 북쪽 김령성 단장하고 7번, 권호웅 단장하고 한 번했다.

그러나 막역함이 있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남북간 협상은 한.미간 협상과는 다르다. 한.미간에는 개인적으로 인간적으로 친구가 될 수 있지만 남북 간에는 인간적으로 친구가 될 수 없는 게 비극이다. 친하면 그 사람도 나도 다치게 돼 있다. 송민순 6자회담 수석대표는 미국의 힐 차관보와의 폴란드 대사 시절 개인적 인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덕을 많이 봤다는데, 남북관계에서 그런 것은 없다.

95년부터 전금철(전금진)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고문과 쌀.비료 회담을 두어 번 했고, 장관급 회담 여덟 차례에 이어 민간인 자격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을 위한 협상을 아태위원회 리종혁 부위원장과 두 번 했다.

그 중 역시 가장 오래 회담했던 김령성 단장에 대한 인간적 관심이 제일 높을 수밖에 없다. 2004년 2월 서울에서 열렸던 13차 장관급회담을 하고 돌아간 뒤에 5월 평양에서 열린 14차 장관급회담 때 단장이 권호웅으로 바뀌었다.

‘회담대표 교체전술’이란 게 있다. 이전 협상에서의 합의를 지킬 수 없을 때, 지키기 싫을 때 피해가는 것도 하나의 협상전술이다. 13차 회담에서 김령성 단장이 약속하고 돌아간 장성급회담 개최를 피해가려고 권호웅 단장으로 교체하지 않았나 싶다.

그 뒤에 여러 추측들이 많이 나왔다. 잘못됐다는 소문도 있고, 실제로 일선에 있다가 물러가면 한미한 자리로 갈 수 있다. 마음이 좀 아프더라. 통일부 퇴직한 뒤에도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을 하면서 평양에 몇 번 갔는데, 물어봐도 잘 이야기 안 해주더라. 저쪽 문화가 그렇다.

그러다 우연히 그런 얘기를 화통하게 하는 사람을 만나 물어봤더니 잘 있다고, “차타고 다니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쇼”하더라. 우리와 달리 북쪽에서 차타고 다니면 어느 정도 되는 것이다.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막후조정을 한다든지. 마음이 놓이고 잘 됐다 싶어서 걱정을 놓고 있는데, 최근에 권호웅 단장이 최승철 부부장이 잘못되면서 같이 잘못됐다는 이야기가 들리니까... 사실관계를 확인 못하고 있다.

전금철 6.15북측위원회 부위원장도 2007년 10.4 정상회담 때 가서 보름 전에 세상 떴다는 이야기를 안경호 6.15북측위원회 위원장한테 들었다. 마음이 안 좋더라. 자기가 상대한 사람이 세상 떴다, 안 됐다면 마음이 안 좋고 차타고 다닌다면 괜찮고. 그 정도에서 그쳐야지 그 사람도 다치고 나도 좋을 것 없다. 그것이 비극이다.

□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을 역임했고,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과 한반도평화포럼 회원으로도 활동하는 등 민간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민간 통일운동의 역할이나 입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일선에서 남북관계를 헤쳐온 그에겐 남다른 자긍심과 진한 아쉬움이 배어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이론적으로는 당국간의 관계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경색될 때 민간이 빈자리를 메워주고 관계개선을 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실적으로 민화협 이전에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같은 각종 대북지원단체들이 95년부터 활동했는데, 그런 단체와는 활동영역을 조금 달리하면서 보수와 진보, 중도를 아우르는 통일운동 협의체로서 민화협이 98년 9월초에 생겼다.

정부간의 관계가 뜸했을 때 민화협에 확실히 그런 소위 대체제 역할이라고 할까 대체수단 역할을 했던 측면이 있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정책 자체가 대북 포용, 화해협력 지향적일 때는 당국간 관계가 단절돼도 민간 교류와 왕래가 이어지면서 당국대화가 복원될 수 있거나 활성화될 수 있도록 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어려워지더라. 정부의 정책 기조 자체가 바뀌어 버리니까. 민화협도 교류.방문을 제도적으로 금지해버리니까 할 게 없다.

2005년 2월부터 2009년 3월까지 4년 1개월 정도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을 연임했는데, 통일부 장관, 통일연구원 원장, 민화협 대표상임의장 다 연임했다. 전임자 잔여임기 채우기도 하면서. 4년 1개월 하는 동안, 3년 정도는 민화협이 그런대로 당국간 관계가 조금 서먹해도 당국관계를 살려내는데 쏘시개 역할을 했다. 2007년 수해났을 때 대북지원을 시작하고 정부가 시멘트와 철근을 주고 가닥이 잡혀 정상회담까지 갔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정부가 접촉을 불허해버리니까 아무것도 할 게 없더라. 민간단체가 대북정책이 유연하면 역할이 있는데 강경하면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더라.

한반도 평화포럼도 마찬가지다. 원래 한반도평화포럼과 북쪽 민족통일연구원하고 세미나를 하자는 이야기는 재작년부터 있었고, 작년에도 꾸준히 추진하다가 기회가 적절치 못하다고 미루고, 김 대통령 아파서 미루고... 한반도평화포럼과 김대중평화센터가 같이 6.15 10주년을 맞아 평양 가는 것도 정부에서 사실상 그런 일은 안 해줬으면 좋겠다는 의사가 전달돼 왔다. 전임 장차관이 몇 명인데, 그런 것도 가지 못하는데 민간단체 역할의 한계가 있다.

□ 현 정부에 이렇게 꾸준히 이렇게 오랫동안 대북정책 변화를 촉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귀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어떻게 보나?

■ 전혀 우리 얘기가 무시만 당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한반도평화포럼은 3자결합인데 햇볕정책을 입안.추진한 관료 출신, 10년간 화해협력 평화번영 정책을 지지하고 정책대안을 제시한 학자들, 시민운동가들이다. 머리띠 두르고 투사들이 모인 데가 아니다. 시민운동가라고 하지만 통일운동하는 분들도 점잖은 분들이고, 정부에서 통일정책 다뤘던 사람들도 통일부 출신이고 하니까 통일부에 대해서 모질게 이야기를 못한다.

우리들이 세미나나 인터뷰에서 내는 목소리들이 결국 조금씩은 현실 정책대안으로 채택돼 간다는 느낌을 조금씩 받았다. 천암함 사과를 6자회담 전제조건으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계속했는데 요즘 풀리고 있다.

막무가내로 벽창호처럼 입력도 안 되고 반영도 안됐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나마 한쪽에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얘기들이 여론의 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정부도 의식하고 있지 않느냐. 다만 대북정책을 바꾸는데 자기 합리화 명분을 못 찾아 시간을 끌지 않나 생각한다.

□ 역으로, 지난 10년간 대북 포용정책이 결과적으로 충분치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 한국 사람이 가진 특징 중 하나가 ‘빨리빨리’고, 북쪽도 ‘속도전’이다. 그런데 사실 남북관계가 분단으로부터 기산한다면 국토분단은 65년, 이념분단은 60년이 넘었다. 김대중 집권 당시로 보면 50년 동안 적대하던 남과 북이 10년 안에 완전히 가까워지고 북이 완전한 변화 안했다는 것은 성급한 얘기다. 기대가 높았기 때문에 실망이 컸다고 할 수 있지만, 10년에 북한의 변화,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하기는 부족하다.

다른 나라 사례를 보더라도, 우리가 부러워하는 독일은 69년 사민당 연합정부로부터 20년 동안 꾸준히 화해협력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나. 그리고 사민당에서 기민당으로 정권이 넘어간 이후에도 정책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20년 정도의 일관된 정책이 추진됐었기 때문에 결국 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서독이 하나로 됐다. 20년 동안 동독에 굉장히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서독 사람들은 감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 테고, 그것을 조용하게 관리하면서 심화되도록 하고 있었다. 기민당이 사민당의 정책을 계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분위기, 토대가 마련됐다.

우리 경우에 지난 10년이라고 하지만 화해협력이 본격화 된 날로부터 우리 화해협력 정책이 실제로 먹혀들어가기 시작한 시점은 만 6,7년밖에 안된다. 2000년부터 시작돼서 노무현 정부가 미사일 발사 때문에 쌀 안 준다며 북측 대표단이 돌아가버린 2006년 7월 정도까지 밖에 화해협력정책이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 후반부로 가면 남북관계 우선론이 아니라 미.북관계 우선론이 주류가 되면서 정상회담도 늦어졌다. 만 10년이라고 해도 그렇지 못한데, 6,7년 사이에 북한 사회가 변한 것도 없다는 것은 아무리 ‘빨리빨리’, ‘속도전’을 좋아해도 50년 이상의 적대관계와 전근대적 통치의 북한이 변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또 한 가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10년 퍼주기’의 결과가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는데 남북협력기금이 1년에 5천억 정도, 약 5억불이다. 제일 많이 쓴 해가 철도.도로 연결하고 퍼준 것도 아니지만 4억불 정도 집행했을 것이다. 거기에 비해 69-89년 20년간 서독에서 동독으로 지원한 액수는 연간 30억불이 넘는다. 우리보다 절대액수로 7,8배 이상 많은 액수를 1,600만 동독 사람에게 퍼부었다. 2,300만 북한 주민에게 1년에 4억불 그것도 한 6년 정도 준 것이 전부다. 노무현 정부 후반기엔 지원이 없었다. ‘그렇게 퍼주고 좋은 소리 못 들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너무 성급한 이야기 아니냐.

□ 남북관계의 역사를 지켜보면서 아쉬운 대목도 많았을 것 같다.

■ 94년도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는데, 그때 정상회담이 이루어졌으면 우리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머릿속에는, 우리의 회담 준비 기본 컨셉은 경제지원을 통해 북한을 변화시킨다는 것이었다.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는 경제지원 밖에 없어 그것으로 움직이는 구도를 짰다. 김일성 주석은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북한의 대남 경제 의존도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됐고, 남북관계도 안정적으로 진행됐을 것이다. 94년부터 했더라면 김대중 대통령이 이어받고 노무현 대통령이 계승했으면 동서독처럼 됐을 것이다. 불행히도 김일성 주석 사망으로 6년 더 기다리는 바람에 경제협력을 통한 군사적 긴장완화와 북한 변화가 성과를 못 내면서 비판이 가능해졌다.

그 다음에 2000년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 이루어져 미.북관계가 빨리 진전됐으면, 어떤 의미있는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발전시켜 통일에 대한 기대를 잔뜩 부풀렸을 것이다. 그러면 이명박 정부도 이렇게 못했을 텐데...

▲ 그의 날카로운 비판의식은 남과 북, 중국과 미국을 가리지 않는다.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북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많이 내놓고 있는데.

■ 북쪽 생각까지 바꾸는지는 모르겠다. 좌우간 <프레시안> 정세토크는 북쪽에서도 볼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본다는 것을 확인했다. 북쪽 사람들도 대남사업에 깊이 관여 안했던 사람들은 정보가 차단돼 있으니까 나를 모른다. 그런데 회담장에서 누구냐고 그런다더라. 자기네 내부사정을 자기네보다 많이 안다고.

북한에 쓴소리를 많이 했다. 작년 5월 핵실험하고 났을 때 “오바마도 부시처럼 될 수밖에 없다. 왜 성급하냐. 오바마를 부시처럼 만들어서 무슨 득이 되나 과욕부리지 말라”고 했다. 후계체계에 대해서도 내부문제이기 때문에 간섭할 수 없지만 좋지 않다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미국에 대해서도 동맹이라고 하지만 그야말로 어느 순간 우리를 버리고 떠날 가능성이 항상 있다. 여러 번 당했다. 약속 뒤집은 것이 한두 개냐. ‘미국은 약속을 지키고 북한은 안 지킨다’는 것은 편견이다. FTA를 보라. 추가협상, 부속문서라는 꽁수를 써가면서 약속을 안 지킨다. 북한이나 미국이나 그거나 그거나다. 9.19공동성명이든, 2.13, 10.3합의가 됐건 이행과정에서 북한이 몇 가지 토다는 거나 다 똑같다.

편견은 버리자. 미국은 무조건 도덕적으로도 우위이고 성실한데, 북한은 부도덕하고 성실하지 않다는 것은 편견이고 버려야 한다.

□ 쓴소리와 비판의 근거나 기준은 무엇인가?

■ 나와 남을 항상 준별한다. 내가 아니면 다 남이다. 북한도 우리가 아니다. 하물며 미국은 내가 아니다. 크게 보면 남북을 뺀 나머지와 비하면 북도 우리 안이고, 남북을 제외한 것이 바깥이지만, 또 우리만 보면 나하고 북은 남이다.

‘밖에서 이렇게 돌아가고 있고, 남북은 이렇게 가고 있다’는 걸 알아서 빨리 정세에 올라타서 손해는 보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

무조건 북한을 미워하지 않아야 하니까 친북이 되어 버린다. 친미 아니면 반미고, 반미니까 친북이고. 반북 안하니까 반미고...

냉전시대는 막연한 얘기가 아니었다. 6.25전쟁 때 낮에는 국군.경찰이 설치고 밤에는 인민군.빨치산이 산에서 내려와 보급투쟁해 가고. 그때 협조하지 않으면 죽으니까 양자택일의 임계선상에서 너무 시달리다 보니까 그랬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살만큼 됐는데도 아픈 추억이 자기 판단의 기준처럼 굳어져버렸다. 그때 반대편에 대한 증오 때문에.

중간지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숙되지 않은 것이다. 경제성장에 발맞춰 흑백논리에 젖은 분들의 발언권이 약해져야 한다.

□ 정세 인터뷰는 아니지만 북중관계가 급속히 긴밀해지고 있는데 반해 한중관계는 소원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 말씀 하신다면?

■ 이번 G20회의를 보면서 미국의 힘이 빠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이미 3월 중순에 서울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미국을 ‘declining power’(쇠퇴하는 권력), 중국을 ‘rising power’(떠오르는 권력)으로 표현했다. 키신저가 그 정도로 말했다면 이미 현실이 됐다는 것이다.

중국은 ‘Middle Kingdom’(중화), 즉 천하중심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그동안 아편전쟁 이후 250년 정도는 정말 죽어지냈지만 이제 G2가 되면서부터는 화평굴기(和平崛起)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중국을 우리가 어떻게 상대할 것이냐가 앞으로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의 제일 큰 화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외교문제가 아니다. 경제 때문에도 그렇다. 우리경제의 해외의존도가 80% 이상이다. GDP를 1조 달러라 할 때 8천억불 이상이 수출입이다. 수출입의 상당부분이 중국이고 우리나라 연간 흑자의 액수(2009년 404억 달러)만큼 중국(324억 달러)에서 흑자를 보고 있다. 일본에는 적자(277억 달러)가 나고. 우리한테 중국은 절대적으로 흑자를 보장해주는 나라다. 자원 공급기지이면서 수출시장이다. 물론 계속해서 우리 상품시장으로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상품,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가 몰려오고 있다.

경제적으로 불가불리하고, 지리적으로 육속해 있는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이 결정된다. 한미동맹주의자들은 미국과의 관계를 잘 해야 우리가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앞으로는 미국과의 관계는 관계대로 유지해나가면서도 중국과의 관계를 잘 관리해나가는 등거리외교랄까 이런 것을 잘 해나가면서 동북아시아 문제에 있어서의 일종의 균형자, 조정자 역할도 감히 시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 역할을 일본은 절대 할 수 없다. 일본은 중국에 의해서 경쟁자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미.중간 갈등을 조정할 위치에 있지 않다. 우리는 중국에 경제적 위협이 안 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걸 위해서도 남북간에 협력해야 되는 것 아닌가. 남북간에 협력이 된다면 중국과의 관계를 잘 조정하고 관리해나가면서 동북아 문제에서 조정자 내지는 균형자 역할 할 여력이 생길 것이다. 그걸 위해서는 남북관계 개선이 필요하다.

북한이 예쁘기 때문에 잘 지내자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같은 동포이기 때문에 잘 지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군사적으로 대치상태에 있는 것을 무조건 동포니까 잘 해주자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손해를 덜 보기 때문에, 모양새 있게 잘 지내야 서로 이익을 볼 수 있고 남북이 하나의 협력체로서 동북아에서 위상을 높여나가면서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북한과의 관계를 요즘말로 ‘쿨하게’ 관리해 나가야 한다. 북한에 대한 적대의식이나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고 편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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