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87)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10일 오전 별세했습니다. 알다시피 황 전 비서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당 국제담당 비서 등을 맡아오다 1997년 남측으로 망명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북측에서 대우도 잘 받은 데다 가족도 있고 또 고령인 터라 굳이 망명까지 할 이유가 있나,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는 당시 김덕홍 전 여광무역 사장과 함께 망명했는데, 망명 이유에 대해 “우리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마지막 힘을 다 바침으로써 조금이나마 민족 앞에 속죄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북측은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고, 그는 남측으로 망명한 북측 인사 가운데 최고위급이자 이데올로그였기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습니다. 남측 김영삼 정부는 그를 열렬히 환영했지만 북측은 그에 대해 저 유명한 “배신자야 갈 테면 가라”는 단호한 결기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통상 ‘주체사상의 대부’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좀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이란 어느 개인에 의해 창시되거나 해석되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변화 발전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남쪽으로 온 뒤에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북한이 가장 아파하는 아킬레스건인 ‘북한 민주화운동’을 외치며 다양한 북한 민주화운동 단체의 대표급과 고문 등을 맡아왔습니다. 그는 연구와 저술, 강연과 방송 등을 통해 북한 민주화운동을 주장하면서 북한 체제를 비판해왔습니다. 아마도 그의 가장 큰 아픔은 사선을 함께 넘은 김덕홍 씨와의 결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의형제’ 황장엽-김덕홍 씨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에 미국 방문 문제를 두고 이견이 엇갈려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본디 망명객이란 몸과 마음이 고단한 법입니다. 그가 남측에서 국가정보원이 제공한 안가에 기거하면서 국무총리보다 높은 수준의 경호를 받았다고 해서 고향을 등지고 의형제와도 결별한 터에 마음이 편했을까요? 아울러 망명 이유는 ‘민족의 평화적 통일’이지만 사실상 햇볕정책을 반대하고 북한정권 타도운동을 펼쳤기에 타지에서의 삶에 부대끼지 않았을까요? 공교롭게도 그가 세상을 뜬 날이,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린 노동당 창건 65돌이기에 한 고단한 망명객의 얄궂은 운명을 보는 것 같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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