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월간지 <노동사회>(2001년 7월호, 통권 56호)와 동시 게재됩니다.(편집자 주)


홍 민 기자(mhong@tongilnews.com)


양대 노총과 북한의 직총 사이의 교류가 한창이다. 그런데 직총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자기를 바로 아는 것만큼이나 상대를 바로 아는 것도 중요한 바, 북한의 노동자 단체라 불리는 직총을 살펴본다.

직총의 정식 명칭은 조선직업총동맹이다. 조선직업총동맹은 북한에서 직업을 가진 30세 이상의 모든 노동자·기술자·사무원을 대상으로 조직된 가장 방대한 근로단체 중의 하나이다. 현재 추산되는 가맹원은 약 160만 명 정도로 비(非)당원(당원은 원칙적으로 직맹원이 될 수 없다)과 다른 당 외곽단체(농근맹, 여맹, 청년동맹 등)에 가입한 대상자를 제외한 나머지 근로자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직총보다는 직업동맹, 혹은 직맹이라 불린다(이 글에서도 직맹이라 부르겠다).

직총보다는 직맹이라 불려

북한의 직맹은 사회주의 체제의 특성상,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옹호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조합과는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논리적으로 북한은 계급이 소멸된 무산계급의 사회이기 때문에 자본가와 같은 투쟁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북한에는 프롤레타리아의 당, 즉 노동당이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 같은 독립적인 노동자 권익단체가 필요 없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북한에서 직맹은 `혁명과 건설`이라는 체제목표 달성을 위해 조직적으로 동원되어 `정권 옹위와 생산`이라는 정치와 경제의 통합기능을 당의 명령 하에 수행해 왔다. 이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사상사업`을 통해 당의 통치이념을 생산현장과 노동자에게 선전하고 주입하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직맹의 기원

우선 직맹의 기원은 1945년 11월 30일 평양에서 결성된 `북조선직업총동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2월 노동당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회의를 개최하고 남한의 `조선노동조합평의회`와의 통합에 관한 결정에 의해 1951년 1월 20일 `남북조선 직업총동맹합의회`를 소집하고, 이 자리에서 `북조선직업총동맹`과 남한의 `조선노동자전국평의회`(전평)를 통합하여 `조선직업총동맹`으로 통합·단일화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직맹에의 가입은 일단 개별적·자발적 형식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가입 비준은 직맹의 실질적인 기층조직인 직맹 초급단체 총회에서 결정하여 각급 위원회의 비준을 받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한편 직맹의 조직구성상 형식적인 최고 지도기관은 직맹 대회이며, 정기대회는 규정상 4년에 2회 중앙위원회에 의해 소집·개최된다. 대회와 대회 사이의 휴회기간에는 대회에서 선출된 직맹 중앙위원회가 상설업무를 담당한다.

조직·회의 구조

중앙위원회는 직맹 조직 내에 필요한 기관과 부서를 설치하여 사업 및 재정을 관리·운영하는 핵심기관으로 모든 활동에서 직맹을 대표한다. 중앙위원회는 통상 1년에 3차례의 전원회의를 개최하고, 선전일꾼회의 등 관련 회의를 수시로 소집하여 현안을 토의한다. 전원회의에서는 직맹의 당면 현안을 집행하고,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을 소환하거나 선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고, 상무위원회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선출한다.

중앙위원회 산하에는 중앙부서로서 조직부, 선전부, 군중문화부, 국제부, 재정부기부, 문화부, 부녀부, 노임부, 노동보호부 등이 있다. 이중 핵심부서인 조직부는 직맹의 조직사업, 특히 직맹 간부사업을 주로 하며, 선전부는 직맹원들에게 당정책과 직맹 과업을 주체사상에 입각해 교양하는 사업을 담당한다. 이밖에 중앙검사위원회는 직맹의 재정 및 경리 집행을 감사한다.
중앙위원회는 위원장(현재 염순길)과 부위원장직을 두고 있으며, 부위원장은 대개 9∼10개의 독립조직으로 세분화된 산업별·직업별 동맹의 위원장(경공업, 상업, 교육·문화·보건, 공무원, 금속기계공업, 화학공업, 건설·임업, 운수·수산, 광업·동력, 공업기술)으로 충원하는 경향이 강하다.

역대 직맹위원장은 리효순(3차대회: 59년), 전창철(4차대회: 68년), 렴태준(5차대회: 71년), 김봉주(6차대회: 81년) 등이 역임하였으며, 1990년대 들어 제7차 직맹대회가 열리지 않은 채, 원동구와 한기창이 위원장을 역임하다, 1998년 6월28일 제6기 37차 직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현재의 직맹 위원장인 염순길(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이 선출되었다. 이들 직맹 위원장을 역임한 사람들은 대개 퇴임 후 당의 직맹 관련 주요 직책을 맡아 상당한 지위를 누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영체계 및 지역조직

주요 운영체계는 중앙위원회에 상무위원회와 조직위원회를 설치하고 있으며, 상무위원회는 전원회의와 전원회의 사이에 직맹 중앙위원회의 명의로 직맹의 모든 사업을 지도하는 실무기관 역할을 하고 있다. 조직위원회는 직맹 중앙위원회의 내부사업과 당면 현안 사업을 토의하고 진행한다. 그 외에 직맹간부 양성을 위한 중앙간부학교를 설치, 간부교육을 일임하고 있으며, 직맹출판사를 통해 각종 관련 교양 서적을 출판하고 있다. 또 직맹 기관지인 『로동자 신문』을 발간하는 노동자신문사 등을 운영하고 있다.

한편, 산업별·직업별 직업동맹조직과는 별도로 각급 지역단위별 직업동맹을 결성하고 있다. 평양특별시, 남포·개성직할시를 비롯하여 9개의 도에 도·직할시 직맹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으며, 시(구역)·군 단위에는 시(구역)·군 직맹위원회가 조직되어 있다. 지역별 단위의 가장 말단에는 공장·기업소 단위로 직맹 초급동맹위원회 혹은 초급단체위원회가 조직되어 있다. 직맹 초급단체위원회는 지역별 최하위의 단위이자, 산업별 조직의 최하층 조직으로서 직맹의 정치사업 활동을 직접 조직·지도하는 실질적인 기층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직맹의 핵심단위

바로 이 공장·기업소 단위에서 결성되는 초급동맹위원회가 실질적인 직맹의 핵심세포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이 바로 직맹원들과의 직접적인 접촉과 의사소통을 하는 단위이자 실체이기 때문이다. 한편 각 공장·기업소는 당 위원회의 일원적 지도를 통해 운영되는데 당 위원회의 책임비서 지도 하에 각종 근로단체 위원회가 조직되어 있고, 여기에 직맹 초급동맹위원회가 그 하나로 편제되어 있다.

공장·기업소 지배인은 당 위원회 및 직맹위원회 부위원장이 되며, 직맹 간부들의 선발도 당과 당 위원회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측면에서 직맹은 최고기관부터 말단 기층조직까지 북한 노동당의 완전한 통제와 조정안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직맹의 위로부터는 직맹대회와 직맹 전원회의가 당 대회 및 당 전원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구체화하고 실천방안을 토의하는 역할을 하고, 아래로는 공장·기업소에 있는 초급동맹위원회가 공장 내 당 위원회의 지도 아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직맹원 가입조건인 비당원 원칙에도 불구하고 직맹 간부는 모두 당원으로 충원되고 있는 점에서 당의 지도를 기능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과의 관계 - 자율성과 종속성 논쟁

이런 직맹의 당에 대한 철저한 종속성은 역사상 직업동맹의 성격이 당과의 관계 설정을 통해 근본적인 한계를 노정해 왔기 때문이다. 보통 사회주의 국가에서 노동조합의 위상과 역할은 체제 성립과 함께 모호해져 갈등을 드러내왔다. 왜냐하면, 노동자가 주인인 국가에서 계급투쟁의 목표인 자본가 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노동조합의 성격도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제 초기에 직업동맹에 관한 성격 규정은 당의 입장과 기능을 보조해야 한다는 입장과 노동조합 본래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이 갈등을 빚어 왔다.

북한도 직맹 창립 초기에 이러한 입장간에 갈등이 표출된 바 있다. 1946년 당 노동부장이었던 오기섭과 1956년 직맹위원장 이었던 서휘 등이 노동자의 권익단체로서 직맹의 위상과 법령상의 `단체계약 체결` 조항을 놓고, 직맹의 당에 대한 자율성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 김일성의 권력장악 전환점이었던 1958년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개인 영웅주의`로 몰려 완전 숙청되었다. 명분은 직맹에 대한 `권력화` 및 `행정화` 시도로서 반당·반혁명 종파주의가 이유였다.

당이 완전히 통제

이후 1964년 6월 당중앙 제4기 9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형식적이나마 존재했던 직맹의 기업관리에 대한 `감독통제 역할`과 단체계약 제도가 완전 폐지되고, 당의 완전 통제가 공식화되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근로 단체 사업을 개선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담화를 통해 "작금의 직맹조직들이 마치 제2의 노동성과 같이 행정사업을 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난하고, "직업동맹은 … 행정기관이 아니라, 광범한 로동자와 사무원들을 묶어 세운 근로단체이며 당과 로동계급을 련결시키는 인전대"라고 선언했다.

이런 직맹에 대한 당의 통제와 인전대로의 역할 규정은 정치 경제적 의미에서 당시 1961년 12월에 `대안의 사업체계`가 도입된 계기와 밀접한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대안의 사업체계`는 김일성이 대안전기공장을 현지 지도한 후 나온 경제관리방식이다. 이전의 부문별 관리에 입각한 유일 관리제 방식이 공장·기업소에 대한 당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한계점과 함께 공장 지배인에 의한 주관주의, 독단에 의해 관료주의적 폐해를 가져왔다고 지적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공장당위원회를 최고지도기관으로 하는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생산 단위에 대한 당의 정치적 지도와 국가의 경제 기술적 지도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자 `대안의 사업체계`를 도입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안의 사업체계`는 이런 경제관리방식 상의 변화 의미 이외에, 50년대 말 당내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김일성이 정치적인 유일 권력체계와 경제부문의 강력한 통제를 통합적으로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이런 배경 하에 직맹에 대한 당의 통제와 성격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김일성의 의도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직업동맹의 성격과 임무에 대하여>라는 제5차 직맹대회 연설에서 직접 언급된다. "사회주의 제도가 서고 대안의 사업체계가 나온 다음에는 직업동맹이 공장·기업소의 관리운영에 대하여 감독 통제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따라서 직업동맹의 성격과 임무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 그리고 직업동맹을 반사상 교양단체, 반행정식 조직으로부터 로동계급과 직맹원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하여 당의 두리에 튼튼히 묶어 세우며, 그들을 당이 내세운 정치, 경제적 과업수행에로 조직 동원하여 완전한 사상교양단체로 전화시켰습니다."

이로써 직맹규약에 "조선직업동맹은 조선로동당의 믿음직한 옹호자이며 … 당의 령도 하에 자기의 모든 활동을 전개한다. 조선직업동맹은 로동계급의 통일과 단결을 강화하며, 그들을 당 주위에 결속시켜 당이 제기한 혁명임무 수행에로 조직·동원한다"고 임무가 명시되게 된다.

직맹의 조직적 목표와 기능

이런 성격규정을 통해 직맹의 총체적 목표는 1968년 개정 직맹규약과 1971년 김일성 연설에 나타나듯이 ▲ 노동자·사무원의 계급교양, ▲ 맹원의 공산주의 교양, ▲ 기술·문화교양 사업 실시, ▲ 노동자들의 생산능률 제고 및 노동규율 강화, ▲ 노동보호사업의 조직집행, ▲ 사회주의경쟁운동 지도, ▲ 조국통일 실현 등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1984년 5월 김정일은 「직업동맹사업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직맹 일군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직맹의 기능을 ▲ 3대혁명(사상, 기술, 문화)의 완수, ▲ 당과 수령에 대한 교양학습, ▲ 혁명전통강화와 반수정주의 교양강화, ▲ 생산문화와 생활문화 개선, ▲ 경제건설을 위한 조직동원 사업, ▲ 노동규율 준수 기능 등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북한에서 직맹은 당의 방침과 정책 관철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노동자에 대한 정치사상교양의 핵심단체로 기능하고 있다. 여기엔 권력 차원의 수령유일체계를 유지·보존·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목표가 기저에 깔려 있다. 또 생산성 극대화를 위한 대중동원의 방식으로서 공장 내 생산문화를 정치·도덕적 자극을 통해 달성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한편 직맹의 중요한 상징적 기능 중에 하나는 통일역량의 차원에서 남한 노동자와의 연대를 통한 통일완수 기능을 들 수 있다. 물론 1990년대 이후 사실상 남북한 체제 경쟁적 의미에서 발전 격차가 벌어진 상황에서 통일역량으로서 직맹의 기능은 제한적이고 위축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까지 직맹이 직맹대회 때마다 `남조선 로동계급에게 보내는 호소문` 등을 채택하고 남북한 노동자 연대를 주장하는 이면에는 바로 이런 통일역량으로서 직맹의 목표가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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