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소리 (9)

혁명재판이나 좀 과감하게
경제제일주의는 농촌부흥부터

신생활운동도 두고 봐야지
차라리 학생운동에나 기대

『통일-하면 정부 측은 덮어놓고 겁을 먹고 또 학생들은 너무 서두르고 있는 것 같애요. 그러나 통일은 언제나 되고 맙니다. 요는 어느 시기에 어떠한 방법으로 이룩되느냐가 초점인데 아시다시피 한국의 분단은 세계문제와 외따로 똑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세계정세의 「심볼」이라고도 할 수 있으므로 국제정세가 좋아질 때 통일은 될 것 입니다.』

유 교수는 하나의 기분이 아니라 이로정연하게 그의 통일관을 토로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팔찜끼고 드러누워서 그 시기를 부지하세월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거에요. 우리들 자신의 일을 자신들이 노력해서 그 시기의 조속한 도래를 달성하고 포착해야 합니다. 통일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남북한 양쪽이 서로 성의를 가지고 접근해야 될 것이고 또 그 시기는 올 것 입니다. 우선 양쪽이 사대주의를 정산하는 것부터서 「스타트」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큰 혼란을 초래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준비적인 단계라고 할까 통일에 앞서 서신교환이라든가 남북기자교류 같은 것은 매우 좋습니다. 서로의 실정을 똑바로 알아야하고 그럼으로써 또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의심도 풀 수 있어요』
씨는 이와 같이 통일문제에 대하여 극히 소극적이고 어물어물하는 미지근한 정부태도를 겁쟁이라고 핀잔하였다.

『장면내각은 아직 기반이 약해서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나 그렇다고 비관은 금물입니다. 일테면 정부가 능력이 있어도 민중이 아주 어두워서는 모든 과업이 완수안 되니깐요. 미국대통령 「케네디」씨를 한국에 갖다놔도 얼마 낫지 않을 것 입니다. 더군다나 소위 정치한다는 사람들 특히 민주당이나 신민당의 감투싸움들을 볼 때 국토분단의 비극에 못지않게 그들의 낮은 양식이나 몰지각을 슬퍼해요』

씨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지도자의 빈곤과 국민의 우매한 점을 개탄하였다.

『혁명과업요? 완수되지 않고 있다는거야 전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부정원흉들의 처단마저 이렇게 질질 끌고 있으니 뭣이 될 것 같은 신뢰가 가지 않는군요 -혁명에는 법적절차가 필요없다- 반드시 그런 거라고 우기는 것은 아니지만 혁명재판같은 것이 입때까지 있을 것이 아닙니다. 추상같은 판결을 즉각즉각 내리기를 전국민이 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일문제도 그렇습니다. 빨리 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통일-하면 겁부터 먼저 집어먹는 것 처럼 일본을 겁내는사람들도 있는 모양인데 알 수 없는 일이군요. 케케묵은 생각은 제발 버려야합니다. 그들은 공산국가하고도 교역, 문화교류를 하고있지 않습니까. 현대국가는 이익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감정을 쑥 빼고서 처리해야 합니다. 내가 얼마 전 일본에 갔었을 때 일본인이 모인 장소에서 강연을 한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들에게 우월감을 버릴 것과 근 40년 동안의 한국에 대한 식민죄과를 솔직히 반성해야 된다고 말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도 일인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그리고 우리는 정치가를 믿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로 변화무상이더군요 「청조회」니「신풍회」니 하는 신생활운동도 좀 두고 봐야지, 차라리 학생들의 운동을 주시하며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데까지 일부 정당인들이 파를 만들고 있으니 뭣이 될까요? 이것은 전국민운동으로 전개되야 해요』
씨는 다시 정부의 경제제일주의는 농촌부흥운동에서 「스타트」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도 정책이 확립돼야 합니다. 농민교육의 한 방법으로 국민교에 두가지 종류를 두어 단기(삼개월내지육개월)로 교양과 농업기술을 가르치도록 하는데, 우리나라 전인구의 근7할을 차지하고 있는 농민들을 포함하는 이른바 민중의 계몽향상을 도모하지 않고서는 아무 성과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지난번 선거 때 유권자들의 투표○권율(주-해독불가)이 높았던 것도 그들이 정치나 정객들에게 실망하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나 그보다도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그들이 스스로 민주주의를 타○하는(주-해독불가) 행위를하는 무식의 소치가 중요원인이 되지 않을까요?』

씨는 끝으로 혁명과업완수에 대해 중언부언 강조하는것이었다.

『다른 것은 고만두고라도 혁명재판은 과감하게 처리돼야 합니다. 만일 미지근하게 되면 민노도 나오겠지만 앞으로의 민족정기에 중대한 영향을 주니까요. 모든 과업완수가 혁명정신에 얼마나 접근되어있느냐가 문제의 초점이 될 것 입니다.』

유달영 씨 약력
(경기도 이천 출생=50세)
▲수원고농졸 ▲개성 호수돈여학교 교사 ▲수원농대 교수
▲미국미네소타 교환교수
▲도미시찰
▲서울대 농대 농학과장(현직)
▲저서 =「인생노오트」「새역사를위하여」등

[민족일보 1961년 2월 21일자]

[해설]

성천 유달영은 1911년 4월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1922년 죽남공립보통학교, 1933년 양정고등보통학교, 1936년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전신)를 졸업하였다. 1956년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였고 1972년 건국대학교에서 명예농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6년 개성 호수돈여고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1959∼1979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원예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1972년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총재와 서울대학교 교수협의회 회장을 지냈고 1974년 국토통일원(지금의 통일부)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이듬해에는 원예학회 회장과 4H클럽 명예부총재를 지냈다.

1930년대에는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과 함께 농촌계몽운동을 벌였으며 최용신이 세상을 떠난 뒤 《농촌계몽의 선구 최용신의 소전》을 썼다. 1942년에는 ‘성서조선사건’에 연루,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2004년 사망했다.

曠野의 소리 (9)

革命裁判이나좀果敢하게
經濟第一主義는 農村復興부터

新生活運動도두고봐야지
차라리 學生運動에나 기대

『統一-하면 政府側은 덮어놓고 겁을 먹고 또 學生들은 너무 서두르고있는것같애요. 그러나 統一은 언제나되고맙니다. 要는 어느時機에 어떠한方法으로이룩되느냐가 焦點인데아시다시피 韓國의 分斷은 世界問題와 외따로 똑 떨어진것이아니라世界情勢의 「심볼」이라고도 할수있으므로國際情勢가 좋아질 때 統一은 될것입니다.』
柳敎授는 하나의 氣分이아니라 理路整然하게 그의統一觀을 吐露하였다.
『그렇다고해서 팔찜끼고 드러누워서 그時機를 不知何歲月로 기다리고있을수는 없는거에요. 우리들 自身의일을 自身들이 努力해서 그時機의 早速한到來를達成하고포착해야합니다. 統一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南北韓 兩쪽이 서로 誠意를 가지고 接近해야 될것이고 또 그時機는 올것입니다. 于先 兩쪽이 事大主義를 精算하는것부터서 「스타트」해야 돼요. 그렇지않으면 큰 混亂을 招來할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準備的인 段階라고 할까 統一에 앞서 書信交換이라든가 南北記者交流같은 것은 매우 좋습니다. 서로의 實情을 똑바로 알아야하고 그럼으로써 또 마음속에 품고있는 疑心도 풀수있어요』
氏는 이와같이 統一問題에대하여 極히 消極的이고 어물어물하는 미지근한 政府態度를 겁쟁이라고 핀잔하였다.
『張勉內閣은 아직基盤이 弱해서 좀더 두고봐야 할것이나 그렇다고 悲觀은 禁物입니다. 일테면 정부가 能力이있어도 民衆이 아주 어두워서는 모든課業이 完遂안되니깐요. 美國大統領 「케네디」氏를 韓國에 갖다놔도 얼마 낫지않을것입니다. 더군다나 所謂 政治한다는 사람들 特히 民主黨이나 新民黨의 감투싸움들을 볼 때 國土分斷의 悲劇에못지않게 그들의 낮은良識이나 沒知覺을 슬퍼해요』
氏는 憂鬱한 表情을 지으며 이렇게 指導者의 貧困과 國民의 愚昧한點을 慨嘆하였다.
『革命課業요? 完遂되지않고있다는거야 全國民이다아는事實이지만 不正元兇들의處斷마저이렇게질질끌고있으니뭣이될것같은信賴가가지않는군요-革命에는法的節次가必要없다-반드시 그런거라고 우기는 것은 아니지만 革命裁判같은 것이 입때까지 있을것이아닙니다. 秋霜같은判決을 卽刻卽刻내리기를全國民이 渴望하고 있지않습니까』
『韓日問題도 그렇습니다. 빨리 解決하는 것이 좋습니다. 統一-하면 겁부터 먼저 집어먹는것처럼 日本을겁내는사람들도 있는모양인데 알 수 없는 일이군요. 케케묵은 생각은 제발 버려야합니다. 그들은 共産國家하고도 交易, 文化交流를하고있지 않습니까. 現代國家는 利益이 되는일이면 무엇이든 感情을 쑥 빼고서 處理해야합니다. 내가 얼마前 日本에 갔었을 때 日本人이 모인 場所에서 講演을 한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들에게 優越感을 버릴것과 近四十年동안의 韓國에대한 植民罪過를 率直히 反省해야 된다고 말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도 日人을 두려워 할 必要는 없다고 봐요』
『그리고 우리는 政治家를 믿지않습니다. 자기들의 個人的인 利害關係로 變化無常이더군요 「淸潮會」니「新風會」니 하는 新生活運動도 좀 두고 봐야지, 차라리 學生들의運動을 注視하며 期待를하는것입니다. 이런데까지 一部政黨人들이 派를만들고있으니 뭣이 될까요? 이것은 全國民運動으로展開되야 해요』
氏는 다시 政府의經濟第一主義는 農村復興運動에서 「스타트」해야된다고强調했다.
『무엇보다도 政策이 確立돼야 합니다. 農民敎育의 한方法으로 國民校에 두가지種類를두어 短期(三個月乃至六個月)로 敎養과 農業技術을 가르치도록하는데, 우리나라 全人口의 近七割을 차지하고있는 農民들을 包含하는 이른바 民衆의 啓蒙向上을圖謀하지않고서는 아무成果도 期待하기 어렵습니다. 지난번 選擧때 有權者들의 投票○權率이 높았던것도 그들이 政治나 政客들에게 失望하고 있다는것도 하나의 理由가 될 것이나 그보다도 民主主義를 부르짖는 그들이 스스로 民主主義를 扡○하는行爲를하는 無識의所致가 重要原因이되지않을까요?』
氏는끝으로 革命課業完遂에 대해 重言復言强調하는것이었다.
『다른 것은 고만두고라도 革命裁判은 果敢하게 處理돼야합니다. 萬一 미지근하게되면 民怒도 나오겠지만 앞으로의民族正氣에重大한影響을주니까요. 모든課業完遂가革命情神에 얼마나 接近되어있느냐가 問題의 焦點이될것입니다.』

柳達永氏 略歷
(京畿道利川出生=50歲)
▲水原高農卒 ▲開城好壽敦女學校敎師 ▲水原農大敎授
▲美國미네소타交換敎授
▲渡美視察
▲서울大農大農學科長(現職)
▲著書=「人生노오트」「새歷史를위하여」等

[民族日報 1961年 2月 21日字]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