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빨치산 출신의 비전향장기수 임방규(78) 선생의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를 매주 금요일에 연재한다. 이 자서전은 한국전쟁 당시 전북유격대 기포병단(일명 외팔이부대) 정치부 중대장이었던 필자가 사형을 선고받고 형 집행을 기다리며 동료, 가족과 나눈 깊은 인간애를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필자는 남쪽에 남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 뒤 빨치산 격전지 현장을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빨치산 역사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 편집자 주

가시철망 밖의 간수

1952년 겨울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칼바람이 종이로 막아놓은 철창을 후려쳤다. 영하로 내려간 마룻방에서 추위에 떨다보면 입이 얼어붙었다. 그래서 말을 하려면 아구뼈가 뻣뻣할 지경이었다.
깊은 밤에 이가사 주위를 둘러친 가시철망 밖에서 "아이고 추워! 아이고 추워!" 하는 간수의 신음소리가 들리곤 했다. 목구멍에 풀칠하려다 하필이면 우리를 감시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있는 자들의 자식이라면 밤잠을 안 자고 엄동설한에 바람막이도 없는 한데에서 떨고 있진 않을 것이었다.
간수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을 땐, 차라리 옷소매라도 잡고 "젊은 사람이 무슨 일을 못해서 이 추위에 이런 짓을 하고 있나? 기술을 배우던가 아니면 막노동이라도 해야지. 일하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떳떳하고 좋은가?" 하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간수도 물론 그곳에서 사람답게 살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밖에서 떨고 있는 간수에게 이 시대의 진실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나무재 진 행렬

일제치하의 어린 시절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해가 질 무렵 일제의 주구들이 마을을 덮쳐 집집마다 샅샅이 뒤졌다. 긴 창을 가지고 다니면서 곳곳을 찔러보며 땅 속에 감추어놓은 식량을 찾으려고 눈에 핏발을 세웠다. 식량이 나오거나 가마솥에 죽 아닌 밥이 끓고 있으면 주인을 맨 땅에 꿇려놓고 몽둥이로 치는 것도 보았다.
집집에 배당된 공출량이 때로는 수확량보다 많기 때문에 어느 집이나 공출량을 다 낼 수가 없었다. 농사 지어놓은 식량을 이리저리 다 빼앗긴 농민들은 고구마나 수수, 조, 밀을 갈아서 껍데기 채 그대로 쑨 푸데죽을 먹었다. 호박죽, 무밥, 콩나물밥, 실가리밥은 그래도 좋았다. 거름하라고 배급 주는 콩깻묵(콩기름을 짠 찌꺼기인데 타이어 바퀴만 했다. 만주에서 왔다고 한다.)은 곰팡이가 피어 있었는데, 그것을 물에 담갔다가 몇 번이고 씻어서 밥을 해 먹었다. 냄새가 역겨워서 목구멍에 넘기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배가 고파서 먹었는데 먹고 나서는 거의 설사를 했다.
어떻게 근근이 겨울을 난 농민들은(도시에서도 아주 적은 배급량으로 살아갔다) 봄에 풀잎이 나기 무섭게 들로 산으로 가서 나물을 뜯었다. 심지어 논에 나는 독새기풀, 자운영은 말할 것도 없고 보리도 뿌리까지 캐어다 먹었다. 소나무 속껍질(송키)을 벗겨 먹었다.
산과 들뿐만이 아니었다. 바닷가에 나는 나무재(이 삼십 센티의 가지 많은 식물인데 가지마다 속이 빈 둥글고 길죽한 잎이 다닥다닥 붙었음)도 돋아나는 대로 뜯어다 먹었다. 학교에 다닐 때 바닷가에서 멀리 이삼십 리 떨어진 마을에서 나이 드신 아저씨 아주머니와 어린 소녀들이 옹텡이를 이고 베자루를 지고 바다로 가고 오는 행렬을 볼 수 있었다. 아침은 요기를 한 탓인지 그래도 조금은 생기가 있었고 발걸음도 빨랐다. 그러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마주치곤 했던 굶주린 행렬은 비참했다.
어린 마음에 아프게 새겨진 듯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나무재를 이고 지고, 짚신을 골마리에 차거나 옹텡이 가에 찔러놓고 맨발과 누더기 옷에, 못 먹어서 부은 누렇게 뜬 사람들이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던 당시의 행렬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들 중 더러는 보릿고개를 못 넘기고 굶어죽은 사람도 있었다.

소학교 어린이도 전쟁에 내몰리다

전쟁물자를 대기 위해 일제는 쇠붙이라고 생긴 것은 모조리 수탈해 갔다. 마을에 있던 징이나 꽹과리, 놋그릇은 물론 수저와 젓가락, 제기(제사지낼 때 쓰는 놋그릇)까지도 모조리 빼앗아갔다. 석유공급이 어렵게 되자 그 대용으로 쓰기 위해서 집집마다 피마자, 해바라기, 목화씨, 관솔을 가지고 오게 하고 배당량을 주었다. 또 가마니, 목화, 누에고치도 생산량을 배당했다. 퇴비도 강요했다.
젊은이들은 징병으로, 성년들은 징용으로, 처녀들은 정신대로 끌려가서 목숨을 잃기도 하고 중노동에 혹사당했다. 대학생들은 전쟁터(학병)로, 중학생들은 군사진지를 구축하는 데로, 비행장을 닦는 데로 끌려갔다.
소학교 어린아이들까지 전쟁에 동원돼 관솔을 따고, 퇴비를 만들고 마초를 베고 새끼를 꼬아야 했다. 사학년 이상 학생들은 운동장에 수십 대의 가마니들을 열 지어 놓고 뙤약볕에서 가마니를 짜고, 똥통을 메고 다니면서 학교 소유의 논밭에 거름을 줘야 했다. 봄에는 모 심고, 여름에 보리 베고, 피 뽑고, 가을에는 나락을 베었다. 발에 걸치는 것이라고는 각자가 삼은 조리(일본짚신)가 고작이었다. 조리는 사흘이 못가서 바닥이 뚫리기 때문에 골마리에 차고 학교에 다녔다. 맨발로 다니다 교문에 들어갈 때만 조리를 꺼내 신었다.
전쟁시기에도 우리와는 달리 일본 아이들은 양복에 가죽가방을 메고 가죽구두나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그게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조선 아이들이 다니는 부안 소학교가 있었고 일본 아이들만 다니는 소학교(지금 부안여중학교 자리)가 있었는데 두 학교는 일 년에 한 두 차례 검도, 유도, 씨름 시합이 있었다. 시합 때마다 우리가 판판이 이겼다. 또 그림, 글씨, 공예품 전시회를 가졌는데 우리 작품이 더 우수했다. 학과실력도 우리가 나았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우리 글, 우리 역사는 없고 황민화 정책(우리민족을 일본 민족화 하는 정책)에 의해서 일본 고대 신화, 황실사, 일본역사, 일본말을 주로 가르쳤다. 학교 내에서 우리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월 초에 카드를 나누어주고 우리말을 하는 아이를 보면 카드 한 장씩 뺏도록 했고 월말에 가서 카드 조사를 했다. 카드가 없거나 적은 아이들은 벌을 받았고 카드를 많이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칭찬을 받았으며 수신 성적에 반영되었다. 우리말을 하는 아이는 불량하고 일본말을 하는 아이는 착하고 모범적인 아이로 둔갑했다. 우리는 조선말을 하는 친구의 카드를 빼앗아 선생에게 이르는 아이들을 따돌리고 우리들끼리만 놀았다.
조선 총독부는 일제 식민지 통치기구 산하의 각 도, 시, 군, 면 학교에 신사를 지어놓고 의무적으로 예배하도록 했다. 학교에 가면 먼저 신사 앞에 가서 절하고 집에 갈 때도 신사에 절을 하고 갔다. 일제 말에는 집집마다 새끼 신사를 설치하도록 강요했다. 또한 우리 민족의 고유한 풍습은 시대에 뒤떨어진 진부한 것으로 매도하면서 파괴했다.
의복도 여성들은 치마 대신에 일본 몸베이(속옷, 고쟁이 같은 바지)를 입게 했고, 흰옷은 입지 못하게 했다. 흰옷을 입고 밖에 나갔다가는 흔히들 먹총을 맞았다.
남녀 가리지 않고 청․장년들을 훈련시켰고 소학교 어린아이들도 군사훈련을 시켰다. 당시 연합군 사령관인 루스벨트, 처칠, 장개석을 짚으로 만들어놓고 이들을 식인종이라 하며 증오심을 가지고 죽창질을 하라고 했다.
일제는 우리의 성과 이름까지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했다. 바꾸지 않는 사람은 일체의 배급에서 제외하고 자녀들도 학교에 가지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묶어놓았다.
최남선은 ‘동조동근(同祖同根)’즉 우리민족과 일본민족은 조상이 같고 뿌리가 같다며 역사를 날조했으며 ‘내선일체(內鮮一體)’, 곧 조선과 일본이 하나라며 궤변을 일삼았다. 이광수는 우리 민족이 일본 민족으로 동화되는 것이 민족을 위한 것이라며 인민을 기만했다.
친일파들은 애국자를 수없이 살해했고 우리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었으며 우리 민족을 지상에서 영원히 말살하려는 일제의 황민화 정책 실현에 앞장섰다.

해방과 라디오 없는 마을

1945년 8월 15일, 일제와 친일파의 살인적인 탄압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우리 민중은 더없이 기뻐했다. 해방이 되었다고, 이제 살기 좋은 세상이 온다는 희망에 차 있었다. 곧 바로 반일 투사들과 진보적인 사상적 영향을 받은 분들, 양심적이며 애국적인 분들이 중심이 되어 그 지도하에 전국적 범위에 걸쳐서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해방되던 날부터 고향 농민들은 모여앉아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한 문제들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국내외 소식이 한시가 급하게 듣고 싶은데 마을에 라디오가 한 대도 없었다. 그래서 청년 두 사람이 매일 이른 아침에 읍에 가서 라디오를 듣고 와서 마을사람들에게 전하기로 했다. 그들은 날이 저물어서야 중요한 뉴스를 기록한 노트를 옆에 끼고 마을로 돌아왔다.
농민들은 낮에 일하고 해가 지면 저녁을 들고는 거의 전원이 ‘제각’옆 잔디밭에 모였다. 읍에 간 청년들이 늦는 날이면 마을사람들은 한길 쪽에 눈을 주고 기다렸다. 기다리다가 어둠 속에 청년들이 나타나면,
“왜 늦었어?”
“좋은 소식 있나?”
“좋은 소식 있어?”
“눈 빠질 뻔했다.”
하며,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좋아했다. 청년(주로 고기성)들은 메모한 노트를 희미한 등불에 비춰보면서 국내외 소식을 조리 있게 들려주었다. 풀벌레 소리만 들려올 뿐 입을 다문 채 귀를 기울이고 있던 고향 농민들이 지금도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다.
이야기가 끝나면 청년들은 하루 이틀 묵은 신문(신문도 청년들이 가지고 왔다) 사설이나 시사면을 읽어주었다. 독보가 끝나면 정세를 전망하면서 모두들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나같이 좋은 소식이요, 희망적인 이야기였다. 열네 살짜리 소년인 나는 그게 좋아서 매일 밤 어른들 틈에 끼어서 이야기를 들었다.

인민위원회 - 최초의 진정한 민중조직

아마 해방된 지 한 주일이 채 안 되었을 것이다. 하루는 집집마다 통보를 해서 마을 사람 모두가 모였다. 사회자가 현 정세를 이야기한 뒤, 해방되었으니 우리 문제를 우리 스스로 풀어나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우리 정권기관을 수립해야 한다, 민주적인 선거방식을 통해서 선출된 우리의 대표로 리와 면, 군, 인민위원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회의에서 리 인민위원장과 리 위원이 선출되고 대의원 중에서 면에 보낼 대표를 선출했다.
회의는 리 인민위원장 추천, 토론, 표결, 결정, 리 위원 후보 추천, 토론, 표결, 결정의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충분한 토론을 거쳤기 때문에 모두가 만족스럽게 회의를 마치고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각 리에서 위임받은 대표들이 면에 모여서 면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면 대표들이 군에 모여서 군 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해방 직후 조직된 인민위원회야말로 우리 역사에 없었던 진정한 민중조직이었다.
당시의 인민위원회는 우리 고향에서처럼 밑에서부터 위로 인민위원회가 조직된 지방이 있고 중앙에서 도, 시, 군, 면으로 내리 조직된 곳이 있다.
해방직후 인민위원회뿐만 아니라 당과 노동자 동맹, 농민 동맹, 청년 동맹, 여성 동맹, 학생 동맹이 조직되었으며 광범위한 대중이 조국과 민족 발전을 위하여 떨쳐나섰다. 인민위원회는 적산 인수, 친일파 처단, 토지개혁 등의 당면과제를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열심히 활동했다.
농민들은 토지개혁을 통해서 자기 소유의 농토를 경작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자기 정권인 인민위원회에서 토지개혁을 실현하기 위하여 준비작업에 착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농민들은 대대로 가난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소급해 보면 율곡 선생이나 유형원 선생을 비롯하여 실학파 학자들은 하나같이 백성의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토를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주고 사사로이 매매할 수 없도록 국법으로 정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갑오농민 투쟁 당시에도 백산에서 기병할 때 토지는 농민에게 고루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일제치하에서도 토지문제,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줄기차게 싸웠다.
일제가 이 땅에 올 때 논밭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다. 홀몸으로 와서 세부측량을 통해, 가혹한 소작료와 고리대금을 통해서 우리 조상이 일구어 놓은 논밭을 제 것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농민들은 일제와 일본인 개인이 가지고 있던 많은 농토를 고루 분배 받으면 배고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에 차 있었다.

45년 9월 8일, 미군 상륙, 맥아더포고령

그러나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이 땅에 상륙함으로써 우리 농민의 세기적 숙망은 좌절되었다. 인민위원회를 미제는 강제로 해산시켰으며 일본 소유 농토를 신한공사에 흡수시켰다. 뿐만이 아니었다. 미제는 이 땅에 진주하면서(9월 7일) 소위 맥아더 포고령을 발표했다.
‘미군정을 실시한다. 지난날(일제 때) 관직에 있었던 사람은 전원 전직에 복귀하라. 미 군령을 어기는 사람은 가차 없이 처단한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이로부터 친일한 자들이 또다시 칼자루를 쥐게 되었다.
친일파들은 일제가 패망하자 인민위원회 지도하의 청년들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자들은 늘씬하게 얻어맞고(초등학교 우리 반 교실에 책상과 걸상을 전부 뒤로 밀어붙여놓고 그자들을 몽둥이로 패는 것을 보았다) 유치장에 갇혔다. 가까스로 잡히지 않은 자들은 다른 지방으로 탈출하거나 지하에 숨었다.
친일파들은 그들을 비호하던 일제가 무너지자마자 한 줌도 못 되는 존재로 그 정체가 드러났다. 그리도 당당하고 세도를 부리던 자들이 민중의 힘 앞에 무력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힘없는 자가 힘 센 자를 등에 업고 큰 소리 치다가 힘 센 자가 무너지면 힘을 못 쓰는 약한 자로 본래의 제 모습으로 돌아가는 법이다. 오라에 묶인 친일파들의 몰골이라니. 그들의 축 늘어진 어깨에 고개 숙인 추레한 모습, 눈빛은 퀭했고, 두 손을 비비며 살려달라는 모습은 그렇게도 비굴할 수가 없었다. 해방된 이 땅에서 친일파들의 앞날은 절망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미제는 친일파들을 전직에 복직시켰다. 중앙과 도, 시, 군, 면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전 분야를 친일파들이 장악했다. 일제 때 검․판사는 미 군정하에서 검사부장, 판사부장이요, 일제 때 반일 투사들을 검거, 고문, 투옥, 학살한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들은 미 군정 하에서 사찰계 주임이요, 일제 때 경찰은 경찰 간부, 일본군 장교는 군부 핵심이 되었다. 캄캄한 나락에서 자기들을 건져주었을 뿐 아니라 벼슬까지 높여 준 (일본인들이 빠져 나간 빈자리가 많아서 거의 전원을 두 세 계급씩 높여 주었다.) 미제를 친일파들은 구세주로 여겼으며 그들의 식민지 정책 실현에 앞장섰다.
미제는 왜 친일파를 규합하고 등용했는가?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현지의 앞잡이들이 필요한 것인데 어떤 사람이, 어떤 계층이 그를 담당할 것인가. 반일 투사? 사회주의자? 어림도 없는 일이다. 민족주의자? 평상시에는 몰라도 민족적 이해관계가 대립될 때는 말을 안들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친일파? 그렇다. 친일파야말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 민족을 배반했던 자들이었다. 일본보다 먹을 것을 더 주고 지위를 높여주면 일제에게 충성했던 것 이상으로 충성할 수 있다고 미국은 보았을 것이다.
8.15 후 김구 선생이 중국에서 국내로 입국하려고 미국과 교섭했을 때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간판을 가지고 입국하려 했지만, 미국은 임시정부 간판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이에 대해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는 1919년 이후 망명정부로 국내외에 알려진 정부인만큼 간판을 가지고 가겠다고 계속 주장했으나 미국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개인자격으로 뒤늦게 입국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미국의 속내를 꿰뚫어볼 수 있다. 임정요원들이 간판을 가지고 입국하면 그들을 중심으로 힘이 구축될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 이 땅을 그들의 식민지로 요리하는 데 미국은 불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제는 친일파만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며 자기들에게 충성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미군은 이 땅에 상륙하자마자 인민위원회를 강제로 해산시켰으며 일본 국가, 일본인 소유의 전 농토를 신한공사에 흡수시켰다. 그것만이 아니다. 공출을 실시했고 공출 미납자들의 집을 뒤져서 곡식을 빼앗아갔다. (우리 마을에서도 공출을 내지 않는다고 경찰들이 몰려와서 집집마다 뒤졌으며 700여 가마를 빼앗아 갔다) 소작인으로서 농민들의 처지는 일제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노동자들도 일제가 패망하자 바로 노조를 결성했으며 일본국가와 일본인 개인의 공장을 접수했다. 기계와 시설, 하다못해 나사 하나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들이 만들지 않은 것이 있는가. 그들이 만들어놓고 빼앗겼던 재산을 스스로 되찾은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재를 구입하고 생산하고 판매하고 생산물을 공평하게 분배했다.
그런데 미제가 군정을 실시하면서 적산이라고 노동자들의 재산을 강탈했으며 친일파, 친미파와 미국인을 파견하여 공장을 경영했다. 해방이 되면서 되찾은 토지와 공장을 이번에는 미제에게 또다시 빼앗긴 것이다.

신탁통치의 진실

미제가 우리 민족에게 안긴 고통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분단이나 신탁통치 문제도 그렇다. 38선을 거론한 것이 미제가 아닌가. 그를 승인한 소련, 그 또한 우리 민족 앞에 죄를 지었고, 그것이 내겐 한(恨)으로 남아 있다. 미국은 조선민족은 통치능력이 없기 때문에 40년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3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50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국가를 수립하고 문화를 찬란하게 발전시킨 문화민족이 아닌가.
우리 민족에게 통치능력이 없다는 그들의 주장은 거짓이며 이 땅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야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방 직후에 우리민족은 인민정권을 수립하고 질서를 잡아가고 있지 않았던가. 이는 우리 민족에게 통치능력이 탁월함을 입증하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미제는 40년 신탁통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20년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그것도 안 되자 다시 10년 신탁통치를 고집했지만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5개년 후견제로 결정을 보았다. 이에 미국은 뜻대로 되지 않자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5개년 후견제가 아닌, 5년 신탁통치로 왜곡 보도하면서 우익분자들을 통해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반대하도록 종용했다. 전체 언론기관은 대서특필로 신탁통치 반대 논설을 실었다.
"왜 또 다시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야 하느냐!"
분노한 민중은 거리로 뛰쳐나갔다. 신탁통치 반대 구호를 외치며 플랜카드를 든 시위군중이 큰길을 메웠다. 군중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다. 이는 외세의 지배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조선인민의 반외세 투쟁의 일환이었다.
며칠 후, 진보진영은 모스크바 삼상결정 원문을 입수하여 그것을 각종 보도기관을 통해서 해설 소개했다. 신탁통치가 아니라 5개년 후견제라는 점, 기간이 오 년이지만 그 이전에라도 각 당, 단체 대표들에 의해서 구성될 임시정부가 자기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 언제든지 협의하여 철수하며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미제와 그 주구들이 외세의 지배를 반대하는 조선 인민의 애국적 열정을 그들 식민지 정책에 역이용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되었고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각 지역에서 군중집회를 갖고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지지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했다.
당시 좌우 어느 쪽이 애국적이며 정당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오늘의 역사는 준엄하게 답변하고 있다.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지지하는 쪽으로 전 민족이 단결하여 전진했다면 5년 이내에 외세의 지배가 없는 독립국가를 건설했을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외국 군대가 서울 한복판에 주둔하고 있는 민족적 수모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약소국가 영토 내에, 특히 수도에, 강대국 군대가 주둔하는 조건하에서 독립을 유지한 약소국가가 인류 역사상 어느 곳에 있었던가. 그때 삼상결정을 지지하는 쪽으로 뜻을 모았다면, 분단으로 우리민족이 당한 극심한 고통과 민족적 손실은 없었을 것이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는 9월 8일 전까지는 우리민족은 외세의 압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시기였다. 민중 자신의 정권인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활동했을 뿐 우익단체란 존재하지 않았다. 미제가 이 땅에 들어온 후 그들의 비호 하에 우익의 당과 단체들이 조직된 것이다. 우익진영의 당과 단체들은 인민위원회와 애국적인 당과 단체들을 파괴하는 것이 활동의 전부였다. 테러도 서슴없이 자행했다.

태엽만 남아 찰칵거리던 시계

고창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집에 와보니 집안이 쑥대밭이 돼 있었다.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이 백주에 사람 사는 집에 침입해 살림살이를 부수고 난장판을 만들어놓았다. 집 기둥을 도끼로 찍어놓고 방장을 파버리고 살림살이를 부수는데, 심지어는 솥단지까지도 깨버렸다. 도끼나 작두같이 깰 수 없는 것은 우물 안에 처박아버렸다. 우물가에 깨진 벽시계가 버려져 있었다. 태엽은 아직 감겨 있어서 찰칵거리고 있었다. 지금도 태엽만 남아 찰칵거리던 시계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중부님과 형님은 서북청년단들에게 맞아 전신이 멍든 채, 똥물을 켜고 계셨다. 나도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맞았다. 물고문은 그래도 나았다. 머리를 몽둥이로 치고 기둥에 묶어놓고 몽둥이 끝을 식도에 대고 힘껏 밀어붙이는 고문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보다 더한 것은 나를 두 놈이 등판하고 엉덩이를 높이 받쳐 올렸다가 동시에 놓아버리는 고문이었다. 마룻장에 뻗어버린 사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워카로 짓밟고 아무데나 차는 놈들의 테러는 표현할 수 없이 잔인했다.
미군정하의 친일파들은 미제가 준 총칼로 애국적인 당과 사회단체의 간부와 가입자는 물론 운동에 참가한 민중까지도 검거하고 고문했으며 투옥하고 학살했다. 미제는 물에 빠진 친일파들을 건져주었으며, 되살아난 친일파들은 그들 힘의 원천인 미제를 등에 업고 동족에게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미제의 앞잡이들은 해방을 겪으면서 민중이 정권을 잡게 되면 살아가기가 막막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민주역량을 파괴하는 데 혈안이 돼 폭력을 동원했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예를 들면 고창중학교, 정읍 농업학교 교정에서 학생과 군민을 모아 놓고 유치장 안에 갇힌 피의자들을 조서도 작성하지 않은 채 끌어다가 총살시킨 일이며, 아버지와 아내를 잡아놓고 서로를 욕하며 뺨을 때리도록 했으며 심지어 시아버지와 며느리 옷을 벗겨놓고 성관계를 하라고 매질했다는 말을 들었다. 인륜에 반한 극악한 만행이다.
미제야말로 당시 우리 민족의 고통의 원천이었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 미제를 축출하기 위해 우리 민중은 줄기차게 싸웠다. 합법에서 반합으로, 반합에서 비합으로 집요하게 싸웠다.
8.15 이후, 미국의 식민지 정책을 반대하는 반외세 애국 세력과 친일파가 핵심이 된 외세비호 세력 간의 적대적 대립의 치열성을 알지 않고는, 46년 10월 대구인민항쟁이 어떻게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해방된 지 일여 년 만에 반외세세력이 1500여 명이나 살해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47년 3.22총파업, 48년 2.7투쟁, 4.3 제주인민항쟁, 5.10단선 반대투쟁, 9월 여순 애국군인봉기, 빨치산 무장투쟁, 이 모두가 미제와 그 앞잡이들과의 치열한 투쟁이 아니었던가.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