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실천적 지식인’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이번 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임을 한다. 그는 냉전시대와 탈냉전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에서 화제의 인물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 그의 학문적 논거는 늘 비바람을 몰고 왔다. 한국사회에서 강 교수만큼 진보 측과 보수 측으로부터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학자도 드물 것이다. 마침 그를 아는 동료들이 23일 오후 중앙대학교에서 ‘강정구 선생 정년퇴임식’을 베푼다. 浮薄(부박)한 학문세계에서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인터뷰는 20일 오후 강 교수의 자택 서재에서 진행됐다. / 편집자 주

▲ 20일 오후 강정구 교수 자택에서 정년퇴임에 즈음하여 '실천적 지식인' 강정구 교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강정구 교수는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학문세계와 관련 “학문의 본질은 참과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면서 “학문의 영역이 실천영역을 결코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학자이면서도 실천의 한가운데에 서 있어야 했던 한 지식인의 책무가 느껴졌다.

특히, 필화사건을 이야기할 때는 때로는 담담하고 때로는 격정적이었다. 2001년 ‘만경대 정신’과 2005년 ‘6.25는 통일전쟁’이라는 필화사건은 당시 한국사회를 격랑 속으로 몰고 갔다. 이에 대해 강 교수는 “당시 그렇게 파장이 클 줄 전혀 예상 못했다”면서도 아울러 “냉전세력의 성역화를 까발렸기에 냉전세력이 발악을 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냉전세력이 그렇게까지 발악할 줄을 몰랐던 것에 대해 주위 사람들이 자신더러 순진하다고 말했다면서 “내가 보더라도 조금 순진한 측면이 있다”며 자신의 순진함을 자인(?)하는 순진함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강 교수는 학자로서 드물게 통일방안과 평화협정안을 만들고 발표한 학자다. 이 점을 지적하자 그는 “통일방안도 그렇고 평화협정안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환하게 화답했다.

아울러, 한미동맹 문제, 주한미군철수 문제, 전시작전통제권 문제 등 기득권이나 정부당국의 가장 아픈 곳만을 때리는 이유를 묻자, 그는 이들 문제들이 성역에서도 가장 강고한 부분이기 때문이라면서 “냉전성역을 무너뜨리려면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려야 한다”며 여전한 결기를 보였다.

보수세력의 ‘편향적 지식인’이라는 지적에 대해 그는 대뜸 “나는 친북도 아니고 친남도 아닌 친민족”이라면서 “나의 기준은 남에도 북에도 머무를 수 없다. 전체 민족의 향방, 그것이 가장 큰 관심사”라고 정면으로 답했다.

그가 항상 밝혀왔듯이, 그의 학문세계의 주제는 한국사회의 ‘냉전성역 허물기’와 ‘평화통일 만들기’에 있다. 정년퇴임 후 그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주력할 것 같다면서 후학들이 전자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부탁했다.

끝으로, 그는 통일일꾼들에게 항상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그가 퇴임 후 연구과제인 ‘평화통일 만들기’에 전력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부채를 갚겠다는 어떤 의지의 표현 같았다.

다음은 강정구 교수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 강정구 교수는 "학문의 본질은 참과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며 자신의 학문세계를 밝혔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학문의 본질은 참과 진실을 밝히는 것”

□ 통일뉴스 : 교수님께서는 1988년에 동국대학교 강사가 되고 이후 89년에 교수가 되어 지금까지 동국대와 23년간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2006년 2월 동국대로부터 직위해제를 당한 바가 있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번 학기로 정년퇴임을 하신다. 남다른 소회가 있을 법한데요.

■ 강정구 교수 : 이번이 정년퇴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2006년에 정년퇴임한 것과 마찬가지다.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마지막 학기는 학생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20여 년 동안 함께 대학교정에서 서로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사제지간의 정을 나눴기에 마지막 학기에 강의를 하고 떠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못했다. 그게 아쉽다. 그렇다하더라도 내 나름대로 해야 할 바를 만족스럽게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도 있는데 교수님은 결국 마지막 수업을 못하신 거네요.

■ 그렇게 됐다. 그래도 2006년부터는 그렇다하더라도 이번 마지막 학기만은 강의를 하고 끝내는 게 제 모양도 좋고 학교 모양도 좋고 해서, 학교 측에서 그런 포용력을 발휘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했다. 특히 자비를 앞세우는 불교학교이니까 그렇게 되길 바랐는데, 그게 아쉬웠다.

□ 교수님께서는 강단에만 한정되지 않고 외부세계에 대해서도 소신을 피력해왔다. 그러기에 교수 신분임에도 상아탑에 머무르지 않고 거리로도 나왔다. 그래서 ‘실천적 지식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것은 교수님의 학문세계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다. 본인의 학문세계를 스스로 어떻게 규정하는가?

■ 학문의 본질은 참과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참과 진실을 밝히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참과 진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대중들로 하여금 진실을 진실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진실을 바탕으로 세상이나 역사가 나아가도록 하는 그런 실천력도 함께 부과된 게 학자의 책무라고 본다. 참과 진실을 밝히고, 그것을 널리 알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거기에 합당한 세상과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실천, 이 세 가지가 다 학자와 지식인에게 부여된 책무이다. 그렇지 않고 그냥 진실, 그것만 밝히면 할 일이 끝났다 생각하면, 그런 사람은 제대로 된 학자로 보기 힘들다. 학문의 영역이 실천영역을 결코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그냥 강단에만 머물러있을 수 없었다.

□ 실천하고자하면 대상과 맞부딪치지 않는가. 그 대상이 냉전 세력, 기득권 세력일 수 있는데 교수님이 생각하는 냉전 세력, 기득권 세력은 무엇인가?

■ 냉전이라는 게 사실 우리 내부에서 싹이 튼 게 아니다. 냉전이라는 것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이념적 적대의 산물이다. 미소간의 이 이념적 적대가 제 3세계에까지 확산, 전파됐다. 한반도의 냉전분단 적대체제라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외생적인 것이다. 우리 스스로 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외세에 의해서 멍에가 씌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빨리 우리 스스로 그 멍에를 벗어버려야 하는 게 당연하다.

세계적으로 1990년대면 탈냉전인데 이 한반도의 경우, 특히 남한의 경우에 거기에 맞춰야했다. 그래도 노태우 정권에서는 7.7선언이나 남북기본합의서나 해서 상당히 방향전환을 했다. 그 다음에 김영삼 정권은 더 나아갈 수 있었는데 나아가지 못해 참 아쉬움이 많았다. 그래도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는 세계적인 탈냉전 흐름에 맞춰서 우리도 점차적으로 냉전을 해체하고 남북화해협력을 통해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장기적인 전망 하에서 나름대로 우리 남한을 이끌어갔다. 특히 당시 한나라당이나 냉전수구세력들이 온갖 가로막기를 주도해왔는데도 불구하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탈냉전을 상당히 진척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는 이명박 대통령 자신이 세계적인 탈냉전적 흐름과는 역으로 급냉전으로 내달렸다. 냉전을 격화시키는 1950년대 사람이 21세기 탈냉전 평화통일시대의 지도자로 들어와 있는 꼴이다. 그러니까 한반도가 세계적인 탈냉전에도 불구하고 급냉전으로 달리면서 전쟁위기로 치닫고 있다.

지금 천안함 사건을 보라. 천안함 사건 이후의 한반도 정세라는 것은 단기적인 국지전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지금 동해안과 서해안에서 한미군사훈련을 한다고 한다. 항공모함까지 동원해서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 전체에 새로운 어떤 냉전의 기운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처럼 냉전의 첨병 역할을 하는 게 이명박 정부다. 그야말로 역사를 거꾸로 가게 하더라도 한두 해 거꾸로 가는 게 아니라 오십년을 완전히 거꾸로 가는, 이런 정말 기막히고 안타깝고 통탄해마지 않는 그런 정세가 지금 펼쳐지고 있다.

▲ 2001년 '만경대 정신' 필화사건에 대해 강정구 교수는 "당시 그렇게 파장이 클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만경대 정신’, 당시 그렇게 파장이 클 줄 전혀 예상 못했다”

□ 교수님을 생각하면 많은 사건이 있는데 유난히 공안당국으로부터 시련을 받았다. 하나는 2001년 8.15 민족대축전 행사 때 평양에서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라고 썼다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 기소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당시 한국사회를 벌컥 뒤집어놓은 사건이었다. 교수님이 생각하는 ‘만경대 정신’이란 무엇인가?

■ 만경대 정신은 이렇다. 만경대를 통해 역사적으로 대여섯 가지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만경대는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를 평양 군민들이 격퇴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다음으로 김일성 주석의 증조부인가 이 양반들이 와서 정착을 했는데 소작인들이다. 그러니까 소작인들, 조선의 피지배 계급들이 수탈과 착취를 받으며 살아가는 그런 마을, 역사적인 자리이기도 하다. 또한 김구 선생이 1948년 4월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갔을 때 만경대에 들러서 김일성, 김두봉 등과 함께 했던 역사적 자리이다. 또 만경대는 김일성 주석이 태어난 곳이고 어릴 때 그곳의 사립문을 나가면서 조선의 독립을 마음에 새긴 역사적 장소이다. 그런데 나는 만경대를 그런 역사적 장소보다는 만경대학원이 있던 것에 의미를 뒀다. 혁명열사유자녀학원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었는데 내가 1996년에 <통일시대의 북한학> 책을 냈다. 그 책을 내면서 거기서 논문 중에 하나가 이와 관련이 있다.

당시 1993년, 1994년, 1995년 되면 북한연구자들이 엄청나게 갑자기 불어난다. 그래서 한결같이 하는 말이 북한은 곧 망한다, 언제까지 망하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온갖 이야기가 다 있었다. 그럴 때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런 소리 말아라, 북한을 잘 모르면서 그 따위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북한을 기초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북한은 동구 사회주의처럼 붕괴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논쟁을 했다. 어느 정권이든 내적으로 붕괴하려면 두 가지 측면 중 하나이거나 또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함께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다. 하나는 엘리트간의 갈등, 즉 위로부터의 갈등이 폭발해서 정권이 바뀌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동학농민전쟁과 같이 밑으로부터 민중들의 혁명에 의해서 정권이 무너지는 경우다. 북한에게는 양쪽 다 적용되지 않는다.

위로부터의 갈등, 엘리트간의 갈등은 만경대혁명열사유자녀학원 때문에 힘들다고 이미 결론을 내렸다. 왜냐? 만경대학원이 1946년인가 생겼는데, 그때 이렇게 만들어졌다. 항일유격대를 하면서 부부가 다 죽은 경우도 있고 한쪽만 남은 경우도 있다. 이런 분들의 자녀들이 고아가 된 경우가 많다. 고아가 안 되었더라도 어머니만 살아계시는 경우에 사실은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 해방은 됐지만 오지도 못하고 거기에 머물고 그러니까 김일성 주석이 그 당시 동료들을 보내서 이들을 데리고 왔다. 이 유격대 고아들을 데려오고 또 그 외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국내에서든 국외에서든 자금을 대고 활동한 사람들의 자녀들을 초청했다. 남쪽에도 추천이 왔다. 혁명열사들의 유자녀들을 만경대학원에 보내라, 그래서 남쪽에서도 올라간 사람이 있고 중국에서도 백두산 근처에서도 온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이 와서 특수유자녀 학원에 다니면서 북한 정권의 각별한 보호를 받았다.

강성산과 연형묵도 거기 출신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아이니까 명절이 되면 이 고아 학생들은 외롭고 쓸쓸해지기 마련이다. 바로 이 명절에 김일성 수상이 항상 이들을 찾아 왔다. 함께 명절을 보내니까 그 고아 학생들에게 김일성 수상은 마치 어버이와 같았다. 그래서 ‘어버이’수령이란 말이 만경대 학원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이들 만경대 출신들이 북한 엘리트 그룹을 형성하고 유학도 다녀오고 배려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 유자녀학원 출신이 북한 상층부를 이뤘다. 거기서 어려서부터 이들 유자녀들과 김정일 사이에 친분관계가 형성됐다. 그리고 김일성 첫째 부인인 김정숙이 유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옷도 입히고 밥도 해 먹이면서 그들 뒷바라지를 해줬으니까 가계(家系)로 연결된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북이 힘들더라도 그들 사이에서 정권에 대한 불신이나 투쟁과 갈등이 일어나기는 힘든 구조이다. 그래서 상층부 엘리트 간에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북한의 경우 밑으로부터의 혁명이 일어나려면 국가로부터 자발적인 조직이 필요한데 그게 어렵다. 북한사회는 수령과 당과 인민의 삼위일체 사회이다. 그렇기에 자발적인 조직이 생성되기 힘들다. 그러니까 밑으로부터의 대중혁명이 힘들다.

그래서 당시 북한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진단을 내렸던 것이다. 이런 분석을 해 왔던 차에 만경대에 가게 되니까 만경대학원을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만경대학원같이 민족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마음을 바친 사람들을 당대에 업적을 높이 기리고 평가할 뿐 아니라 그 자손들에게까지도 기리고 보살펴 주었을 경우 보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통일을 위해서 일을 할 것이고 희생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통일일꾼이 많이 생기고 그러면 통일이 빨리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언뜻 떠올랐다. 그래서 즉흥적이긴 한데 자연스럽게 만경대 정신이 떠올랐다. 그런 정신만 확산되면 통일 빨리 되겠구나, 그래서 간단하게 쓴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파장이 클 줄은 전혀 예상 못했다.

□ 이렇게 요약하면 되겠는가, 만경대 정신이란 보수세력에서 주장하듯 주체사상이나 북한 체제를 찬양했다는 게 아니라 독립정신이나 민족통일과 민족정기수호정신이다.

■ 그렇다. 민족을 위해서 일을 하게 되면 자신뿐 아니라 후손들까지도 영예를 받고 사회적으로 위세와 인정을 받고, 이렇게 하면 정말 민족을 위한 정신 이런 것이 점점 더 확산되면 우리 통일이 빨리되겠구나, 그러면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는가. 너무나도 간단하고 당연한 이야기다. 나에게는 당연한 이야기인데 냉전세력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 강 교수는 "6.25전쟁에 대해 경험적 사실에 의해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에 통일전쟁이고 내전이다"라고 견해를 강조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6.25는 통일전쟁 필화사건, 냉전세력이 발악한 것”

□ 냉전세력과 싸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이 간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게 있다. 2005년인가, 한 칼럼에서 6.25전쟁을 ‘통일전쟁이나 내전’이라고 전제한 뒤에 ‘6.25전쟁은 후삼국시대 견훤과 궁예, 왕건 등이 모두 삼한통일의 대의를 위해 서로 전쟁을 했듯이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해 필화사건이 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 6.25는 한국전쟁이라기보다는 6.25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르다고 본다. 6.25는 한국전쟁이란 전체 전쟁가운데 한 부분집합이지 6.25전쟁 자체가 한국전쟁의 모집합은 아니다. 한국전쟁 발발일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 어떤 사람은 1945년 9월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또 46년 10월, 48년 2월, 50년 6월 등 다양하다. 어쨌든 6.25전쟁은 통일전쟁이고 내전이었다.

6.25전쟁을 보자. 일반적으로 6.25전쟁을 불법침략전쟁이라고 말하는데 침략전쟁이라는 말은 국제법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국제법적으로 침략전쟁이라고 하려면 별개의 주권국가끼리의 무력투쟁을 말한다. 그런데 남과 북은 별개 주권국가가 아니다. 헌법3조에서 북한이 별개의 주권국가가 아님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고 국보법도 그렇다. 침략전쟁이라는 게 헌법과 국보법 상으로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단지 북한의 先(선)침공전쟁이라면서 침공이란 말은 쓸 수 있다. 중립적인 의미에서다. 침공전쟁이라고는 말해도 침략전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내전의 경우에는 침략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내전의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의 남북전쟁이다. 북부의 링컨이 침략했는가, 남부의 리 장군이 침략했는가, 교과서나 역사책 어디에도 링컨이 침략자다, 리 장군이 침략자다, 라고 안 나온다. 침략자는 없다. 시빌 워(civil war)라고 한다. 시민적 전쟁이다. 이런 것이니까 침략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표준정답이 불법침략전쟁이라고 하는데 침략이라고 상식으로 말하는 것은 국제법적인 침략전쟁의 개념과 별개다. 

그 다음에 전쟁성격을 이야기할 때, 전쟁 주체의 목표에 따라서 전쟁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럼 전쟁주체가 누구냐. 6.25때 북한 지도부, 남한 지도부, 미국의 지도부, 중국의 지도부, 이 양반들이 다 뭘 원했는가. 북한이 먼저 침공할 때도 통일을 위해서 한 것이고 남한이 삼팔선 넘어서 올라갈 때도 무력북진통일 아니었나? 미국, 중국도 그랬다. 초기에는 그랬다. 북한은 계급해방을 위해 또 민족해방을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남에서는 사회주의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를 세우겠다고 했으니 이념전쟁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남도 북도, 중국도 미국도 군사적으로 누구도 승리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대충 끝내자고 했으니 분단고착화 전쟁도 되는 것이다.

전쟁 성격은 이처럼 시기별로 주체에 따라서 달라진다.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지배적인 전쟁주체의 목표는 통일이었다. 그래서 통일전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이념전쟁이다, 조국해방전쟁이라고도 한다. 사회주의를 없애는 것이니까 이념전쟁도 되고 분단고착화 전쟁도 되는 등 여러 가지 전쟁성격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불법침략전쟁 하나밖에 허용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 파시즘 전체주의인 것이다.

□ 2001년에 만경대정신으로 곤욕을 치렀는데 4년 뒤 또 통일전쟁 해서 곤욕을 치렀다. 그럴 때마다 용기가 필요하지 않는가?

■ 학문하는 사람에게는 6.25전쟁이 통일전쟁이고 내전이라는 게 너무나도 상식이고 뻔한 이야기다. 그런 것을 쓸 때에도 전혀 문제의식을 안했다. 자연스럽게 6.25전쟁은 통일전쟁이고 내전이다. 후삼국과 뭐가 다르냐. 견훤이 침략자인가, 궁예가 침략자인가, 왕건이 침략자인가. 역사책에는 삼한통일을 위해서 전쟁을 벌였다. 다 높게 평가한다. 통일전쟁은 뻔한 이야기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그 칼럼은 핵심이 맥아더였다. 맥아더 이야기가 핵심이지 6.25전쟁 이야기는 핵심이 아니었다. 칼럼의 제목이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였다. 2005년 7월 27일 정전협정일을 앞두고 썼다. 그런데 2005년은 내가 환갑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해방 60주년이고 분단 60주년, 주한미군 주둔 60주년이다. 그런데 나한테는 해방 60년보다는 분단 60년, 외국군 주둔 60년이 더 뼈아픈 것이었다. 2004년부터 나는 우리 역사에서 외국군이 60년 주둔한 적이 어디 있느냐, 일본군도 40년 정도인데, 그런데 평택에 가서 100년을 더 있도록 하겠다니, 이런 이야기를 해 왔다. 2004년부터 계속해서 2005년을 주한미군을 내보내는 원년으로 하자고 주장하는 글을 계속 발표했다.

그런데 2005년 7월에 맥아더동상 철거 때문에 옥신각신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문제 많은 맥아더가 이 땅에서 영웅 행세하는데 진실을 알고 하는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맥아더가 성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를 허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허물려고 하니까 이게 간단하게 신문에 칼럼 싣는 것으로는 안 되고 거의 60매 가까운 분량으로 논문처럼 썼다. 그래서 맥아더의 진실을 하나하나 들추어내다 보니까 사실은 냉전세력, 보수세력의 아주 뼈아픈 뭐라고 할까, 치부라 할까, 뭔가 감추고 싶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다.

한마디로 냉전세력의 성역화를 까발렸다. 맥아더를 까발리고, 진실을 까발렸다. 한꺼번에 자기들 아픈 곳을 여기 쑤시고 저기 쑤시고, 아픈 곳 여러 군데를 한꺼번에 쑤시니까 냉전세력이 발악을 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까지 발악할 줄은 몰랐다. 그냥 어느 정도 떠들다 말겠지 그리고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나 조금 간단하게 언급하고 말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커질 줄 몰랐다. 만경대도 그랬다. 그러나 나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 보수 측에서 그렇게까지 발악할 줄은 몰랐다고 말씀했는데, 이는 거꾸로 이야기하면 교수님이 세상물정을 모르고 순진하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주위에서 그런 얘기 못 들었나?

■ 많이 들었다. 순진하고 어떤 면에서는 순수한 것 같다고 하더라. 내 집사람은 나더러 바보 같다고 한다. 그런데 동료들은 순진하다고 하는데 평화통일 쪽 어르신들은 생각이 다르다. 순진한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했기에 그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보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보더라도 조금 순진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 강 교수는 '통일방안과 평화협정안'에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밝혔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내가 간여한 통일방안과 평화협정안에 대해 자부심 갖고 있다”

□ 한국사회는 1945년 분단문제와 1950년 전쟁문제로부터 각각 통일문제와 평화문제가 대두된다. 그런데 교수님은 학자로서 통일방안과 평화협정안을 갖고 있는 보기 힘든 학자이다. 일례로 통일방안은 국가적 차원에서 남북 당국이 각각 갖고 있다. 또한 개인적 차원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재야 통일운동가인 김낙중 선생의 통일방안 정도가 알려져 있다. 통일방안과 평화협정안에 천착한 이유는?

■ 우선 평화협정안은 내 단독 안(案)이 아니다. 평화통일연구소에서 2년 이상 걸려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낸 것이다. 물론 내가 거기서 역할은 했지만 단독은 아니다. 그 다음에 내가 작성한 통일방안은 ‘아리랑통일민주공화국’이다. 2000년에 6.15선언이 발표됐는데 그 2항에 대해서 나는 매우 감격했고 이제 이 2항의 통일방안을 구체적으로 구현시켜야 한다고 고민을 했다. 그래서 동북아 신냉전이 생기면 큰일이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기간에는 통일하려고 해도 불가능했다, 지금은 탈냉전이므로 이 시기에 통일을 못하면 안 된다, 게다가 미래에 중국과 미국 간에 신냉전이 생기면 그래서 그게 굳어지면 통일은 물건너 간다, 그 전에 비록 상징적이고 형식적인 통일, 곧 부분통일이라도 이루어 지구촌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기정사실화 하자라는 주장을 해왔다.

615선언 2항에서 남쪽의 연합제와 북쪽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공통점이 있다고 했으니까 이거야 말로 진짜 통일방안이다, 신냉전에 대비한 통일방안이다, 그래서 바로 그때부터 통일방안을 검토하고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민노당에서도 통일방안 이야기가 나오고 내가 갖고 있던 통일방안을 민노당 통일방안에 어느 정도 반영을 시켰고, 그걸 다듬어서 2001년에 발표했다. 통일방안을 발표하고 책에 실은 것은 2002년이다. 그러니까 통일방안은 바로 6.15공동선언이 있고 나서 준비했다. 나는 동북아 신냉전이 2020년이면 다가올 것으로 봤다. 그래서 그 전에 뭔가 준비해야한다, 굉장히 다급했다. 그래서 끙끙거리면서 역대 통일방안을 공부하면서 나름대로 대비하기 위해서 완성했다.

□ 통일방안을 현실에 따라 계속 갈고 닦으면 좋은 안이 될 것 같다. 평화협정안에 대해서도 소개해 달라.

■ 평화협정안은 9.19공동성명 발표 이후에 바로 착수한 것이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앞으로는 평화협정이 핵심이다,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은 평화협정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연구소에서 당면과제로서 평화협정을 설정하고 거기에 매달렸다.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박명림 교수의 평화협정안이 있는데 그건 평화협정안이 아니라고 본다. 미국을 빼놓고, 전작권을 갖고 군사통제와 장악을 하고 있는 핵심당사자인 미국을 빼고 남북 간에 평화협정을 맺는다, 이는 속빈 강정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연구소가 만든 평화협정안은 누가 보더라도 이 정도라면 전쟁을 하고 싶어도 전쟁을 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 수 있는 획기적인 안이다. 그래서 미국의 북한전문가 세릭 해리슨도 높게 평가한다고 해서 추천서도 쓰고 했다. 정말 나는 통일방안도 그렇고 평화협정안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다.

□ 교수님께서 이 시대 한국사회의 거대담론인 통일방안과 평화협정안에 유난히 관심이 있는 것에 늘 궁금해 했다. 그런데 계기가 있었네요. 통일방안은 6.15선언 발표 이후에 고민하셨고, 또 평화협정안은 9.19공동성명 발표 이후에 고민을 했으니까요. 모두가 한반도 현실에 대한 고민이라는 계기 속에서 천착하게 된 것이네요.

■ 그렇죠. 학문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2천 년 전 이스라엘이 아닌 18세기나 19세기에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면 맑스의 자본론은 예수가 썼을 것이다. 예수는 지식인이고 지성인이자 지도자이지 않는가. 2천년 전 이스라엘 땅이라는 역사적 조건에서는 예수의 신약이 나왔겠지만 맑스가 살았던 유럽 방직공장에 산소가 모자라 평균 나이가 삼십 세, 사십 세 되는 그런 역사적 조건에서는 신학보다 자본론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을 ‘학문의 존재구속성’이라고 한다. 자기가 존재하는 시대의 역사사회적 구조에 걸맞게 문제를 풀어나가는 학문이 필요한 것이다. 6·15공동선언이 통일방안을 요구했고, 9·19공동성명이 평화협정안을 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런 시대적 요구에 따랐을 따름이다. 물론 이는 탈냉전 시대에 냉전해체라는 큰 역사적 과제의 한 부분이다. 나는 이전부터 이 냉전해체 작업을 계속 해왔다. 우리가 언제까지 외세가 강요한 냉전적대 분단체제를 안고 살아야하는가, 이를 용납할 수가 없어서 학문을 하는 처음부터 이것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 궁금한 게 많이 풀렸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한반도 평화협정 문제를 비롯해 한미동맹 문제 주한미군철수 문제, 전시작전통제권 문제 등 기득권이나 정부당국의 가장 아픈 곳만을 때린다. 그 이유가 있는가?

■ 그들 문제들이 성역이고 또 성역에서도 가장 강고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냉전을 해체하고 냉전성역을 무너뜨리려면, 냉전성역 중에서도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려야 한다. 그 부분이 다름 아닌 군사 부분과 미국 부분이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깨뜨려야 참과 진실을 밝혀낼 수 있다. 그래야 사람들이 아 그게 아니고 이게 진실이구나, 한다. 그래야 그걸 바탕으로 해서 남과 북이 진정한 화해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이것도 내가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간첩은 남한이 북한보다 더 많이 보냈다. 데이터로 나와 있다. 그런데 누구도 이 이야기를 안했다. 그 누구도 간첩이야기를 못하는데 나는 일부로 했다. 사람들이 간첩 하면 무조건 북에서만 다 보낸 것으로 안다. 일반 사람들은 영화 실미도가 나오기 전에는 남한에서 북한에 간첩을 보낸 줄도 몰랐다. 남한이 더 많이 보낸 것은 더욱 모른다. 이제까지 철석같이 믿던 간첩이야기도 진실은 남쪽이 잘못한 일이 많은데 맨날 북한만 죽일 놈 하는데, 남쪽도 그렇고 북쪽도 그렇고 이런 양면이 있다는 진실을 알려야 남과 북이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지, 그렇지 않고서는 진정한 화해협력이 힘들다고 봤다.

그래서 주한미군 문제도 그렇고,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해서는 미국문제를 안 건드릴 수가 없다. 한미동맹을 안 깨트리면 안 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게 평화협정에서 핵심주제였다. 그리고 전쟁문제와 전쟁위기 또한 나의 핵심주제였다.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는가. 그런데 학문하는 사람들이건 일반인이든 전쟁위기에 대해서는 주제를 삼지 않는다. 냉전성역이므로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 강정구 교수가 2009년 7월 3일 평화통일연구소가 개최한 '7.4남북공동성명에 비춰본 한반도 위기 타개를 위한 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발제를 하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나는 친북도 아니고 친남도 아닌 친민족이다”

□ 이제 화제를 바꿔 정세에 대해 물어보겠다. 아직 천안함 사태가 아직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교수님은 지난 6월 초 동국대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천안함 사태와 관련 “천안함 사건은 한·미·일 수구세력이 만들어낸 것이라 ‘천안함 사건화’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 나는 지금도 천안함이 ‘사고’ 단계에 있다고 본다. 사고가 발생하면 그 사고의 원인에 대한 진실규명이 있어야 한다. 진실규명이 되면 그 다음에는 책임자 처벌문제, 재발방지라든지 이런 게 해결방안이고 정석이다. 지금 천안함의 경우에는 사고 단계인데 이미 북한 소행이 입증된 것처럼, 완전히 과학적으로 입증이 된 것처럼 전제를 하고 이걸 유엔 안보리에 끌고 가고 지자체 선거에 이용하고 그 다음에 전쟁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렇게 ‘사건화’를 한 것이다. 사고 단계인데 말이다. 물론 북한의 소행이란 것이 드러났을 경우에는 안보리에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재발방지책을 논의하고 북한에 대해 사과를 요청할 수 있다.

그런데 사고의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게 마치 북이 한 것으로 백퍼센트 기정사실화하고 유엔안보리에서 저렇게 하고 또 연속으로 군사훈련을 하고 하는데... 이걸 미국이 모를까? 모든 정보를 다 갖고 있기에 진실을 다 알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한국도 떳떳하면 중국이 제안한 4대국 공동조사든, 북한 검열단이든, 중국 와라, 북한 와라, 러시아 미국 다 와라, 유엔도 와라, 해서 명명백백히 보여주면 될 것 아닌가.

□ 교수님께서는 보수세력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보수세력이 아주 거북해 하기도 한다. 보수세력은 교수님을 ‘편향적 지식인’으로 평가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알고 있다. 북에 대해 친북적이다, 편향적이다, 라고 하는데 나는 친북도 아니고 친남도 아닌 친민족이다. 나의 기준은 남에도 북에도 머무를 수 없다. 전체 민족의 향방, 그것이 가장 큰 관심사다. 민족 전체 이익에 부합하는 정책을 남이 펴면 친남이 되고 북이 펴면 친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은 친민족이다. 그렇게 보면 결코 내게 ‘편향적’이란 주장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변호사가 내게 ‘강 교수님은 계속 냉전성역 허물기, 그리고 진실과 참을 이야기하는데 보수세력이 보기에는 그게 객관적이지도 않고 학문 같지도 않다고 하는데 법정에서 어떻게 변론할 것이냐’고 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이 학문도 아니다, 객관적이지 않다고 하는데 그런 사실 자체가 내가 제대로 냉전성역을 허물고 있다는 입증으로 된다. 왜냐? 내가 하는 게 북한문제, 통일문제, 평화군사문제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기나 엉터리로 왜곡해서 판을 치는 게 이 부분만큼 심한 게 어디 있는가? 그러니까 완전히 판이 180도 거꾸로 왜곡된 것에 물들어있는 사람들이 볼 때 왜곡되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면 이상하게 볼 것은 당연하다. 마치 미친 사람이 미치지 않은 사람을 보면 오히려 그 미친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그 사람들이 나를 편향적이라고 보는 것 자체야말로 내가 냉전성역 허물기를 제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다.

민족주의 문제에 있어서는 진보세력도 마찬가지다. 진보세력도 소위 계급분야에 있다 보니까 민족 문제를 잘 몰라서 오해를 하거나, 관심도 없거나 해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다. 또 계급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실 계급문제는 기본적인 모순의 문제이고 중요하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문제이다. 그런데 지금 인권에서 자유권, 사회권이니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평화생명권이다.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는가. 전쟁을 막는 것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는가.

지금 한반도의 경우 분단되어있는 적대체제 하에서, 내가 계속 해온 이야기인데 냉전기간 중에 네 번의 전쟁위기가 있었고, 탈냉전기간에 일곱 번의 위기가 있었다. 이중 서해교전 빼고는 다 미국이 주도한 것이다. 1994년에는 전쟁 일보직전까지 간 아슬아슬한 위기상황도 있었다. 이런 것을 알면 학계에서나 언론에서나 민족 문제를 자꾸 경원시할 수가 없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통합과 통일이다. 또 민족국가 간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항적 민족주의를 나치나 일본의 민족배타주의로 등치시키는 것은 잘못된 사고이다. 전혀 역사적이지 않고 허공에다 하는 이야기이다. 그런 진보적 지식인들 입장에서 보면 내가 못마땅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내가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비판을 받는 셈이다.

□ 그렇지만 교수님은 전반적으로 진보세력으로부터는 더할 나위없는 우군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진보세력에서도 교수님이 기득권 세력 및 냉전세력을 비판하거나 문제제기를 하는 것에 박수를 치지만 좀 더 깊은 이론적 제시나 학문적 결과를 아쉬워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어디선가 교수님이 비판학문, 민족학문, 민중학문에 대해 말한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 2008년 1월 17일 평화통일연구소 주최 '한반도 평화협정시안 발표 토론회'가 열렸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퇴임후 ‘냉전성역 허물기’와 ‘평화통일 만들기’ 중에서 후자에 집중할 것”   

■ 한국사회는 성역과 금기의 영역이 너무 많다. 그래서 이를 허무는 비판학문이 요구된다. 그런데 비판학문을 하면 자연스럽게 민족학문과 민중학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두개를 다하면 좋은데 두개를 다할 역량이 못 됐다. 무리하게 양쪽 다 하려고 하면 이것도 저것도 제대로 못하기 쉽다. 그래서 민중학문보다는 민족학문에 집중했다고 볼 수 있다. 민족학문에서도 ‘냉전성역 허물기’와 ‘평화통일 만들기’에 천착해 왔다. 박사논문 쓸 때부터 냉전성역 허물기가 학문의 좌표였다. 당시 냉전성역 허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한테는 냉전성역 허물기가 주어진 큰 책무였다. 그래서 냉전성역을 허무는 전초전을 해야 했다. 내가 앞장서서 핵심부분을 치고 그 다음에 후속세대들이 갈고 닦아서 더 깊게 심층적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냉전성역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이 냉전성역 허물기를 학문의 신속기동화와 물꼬트기 방식으로 접근했다. 예를 들어서 이승만 되살리기가 나올 때 이승만 파헤치기로 대응하고, 노근리 학살 나올 때 민간인 학살문제 제기하고, 베트남 전쟁의 학살 나올 때도 민간인 학살문제를 제기했다. 또 민족정통성 문제, 민간인 학살문제, 월남자 월북자 문제 등도 제기했다. 이렇게 물꼬 트는 작업을 해놔야만 나중에 사람들이 더 넓힐 수 있다고 봤다. 그 작업을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실 주위에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 않는가.

나에게 깊이 있는 학문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냉전성역 허물기라는 미지의 또는 ‘초유’의 영역을 물꼬트기와 학문의 신속기동화로 여러 부분에서 확산시키는 것을 학문의 좌표로 설정하고 있는 나에게 이런 요구는 무리다. 심층적인 연구는 그 분들이 해야 할 과제이다. 물꼬를 여러 분야에서 트는 일이 나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한다.

또한 사회학과 역사학의 차이 때문에 나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측면도 있다. 역사학 같은 경우는 미주알고주알 파헤치는 것이다. 미주알고주알 다 헤치다보면 어느 게 핵심인지 잘 모른다. 너무 미시적으로 가니까 이놈도 잘했고 저놈도 잘했다고 결론을 내기 쉽다. 그래서 나는 양시양비론을 경계한다. 그런 방식은 사회학적 접근이 아니다. 사회학에서는 미주알고주알 할 필요가 없다. 핵심을 파악하는 것에 무게를 둔다. 전통역사학은 한국전쟁을 미주알고주알 파고 드는 경우가 많다. 누가 이렇게 했고 누가 저렇게 했다고 하면서 사람중심의 서술을 한다. 그렇다면 누가 없으면 한국전쟁이 안 일어나는 것인가, 라는 식으로 질문하면 답변이 궁색해진다. 사람도 문제지만 더 문제는 사람들이 그렇게 선택하고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역사와 사회구조를 규명하는 것이라고 본다.

□ 교수님 말씀을 듣다보니, 한 지식인의 냉전성역 허물기라는 작업이 마치 한 인간이 거대한 빙벽 앞에 서있는 것 같다.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았는가.

■ 주위에서 많이 좀 동참해주면 직격탄을 덜 받았겠다. 전쟁위기라든지 한미문제, 주한미군문제 등에서 그렇다.

□ 교수님은 이 시대 ‘비판적 지식인’, ‘논쟁적 지식인’이라고 평가받는다. 교수가 아니었다면 어떤 일을 하셨겠는가?

■ 교수가 아니었다면 기자를 하려고 했다. 기자하려고 했는데 기자로서는 한계가 있다. 몸이 안 좋아서 술도 잘 못 마신다. 대인관계에서도 부드럽게 만나고 쉽게 어울려야 하는데 그걸 잘 못한다. 그래서 기자 안하기를 잘했다. 지금은 다르겠지만 예전에 기자로 갔다면 내 연령대는 최소한 술 잘 마시고, 뭐든지 잘 개기고 하는 게 기본이었던 것 같다. 그런 구조에서 잘 견뎠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 이제 곧 정년퇴임을 한다. 정년퇴임을 한다고 학문연구가 끝나거나 변경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정년퇴임 후 연구작업은?

■ 아마 냉전성역 허물기보다는 평화통일 만들기를 위한 과제에 집중할 것 같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평화통일 만들기에 국한해서 여기에 실천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연구를 할 것 같다. 냉전성역 허물기는 그동안 많이 해왔고 후학들이 했으면 한다.

□ 끝으로, 교수님은 학문만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천도 해오셨다. 특히 현장에 있는 운동가, 활동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 통일일꾼들에게 항상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 특히 통일일꾼 어르신들을 만나면 그렇다. 이 분들은 자신의 일생을 다 바친 분들이다. 정말 자기의 목숨과 모든 걸 다 바친 분들이다. 여기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간에 신념을 갖고 끝까지 꿋꿋하게 버텨 오신 점이 너무나도 존경스럽다. 내 자신을 비추어볼 때 그런 부채의식이 있다.

동시에 평통사를 비롯해 자기의 삶을 온통 민족과 사회의 정의, 평화, 통일에 바치는 소장일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뭐 명예욕이 있겠나, 돈이 생겨서 하는 것인가. 오직 역사적 사명감이나 개인의 양심에서 모든 걸 희생하고 버텨나가는 분들이다. 이런 젊은 일꾼들, 평화일꾼, 민중일꾼들에 대해서도 어르신들 못지않게 부채의식이 있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서 널리 알려져 있지 않고 또 역사적으로 평가도 못 받지만 활동하시는 그런 분들에 대한 부채의식도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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