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사정에 따라 중단됐던 ‘민족일보 다시보기’가 2l회부터 다시 연재를 시작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모두가 모두 돌았어요”
경협반대는 자연발생적인 민족의 감정
한강서 ‘라인강’의 기적 바라다니

“선건설 후통일이라고? 휴- 이것 아무래도 이상해 청량리뇌병원에 안내하고 싶어. 돌지 않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워요. 확실히 돈 것에 틀림없어. 감투에 눈이 멀고 세도에 머리가 돌았지. 그런데 요놈의 광병은 요사이 바짝 더 심해지더군. 을사조약으로 반백년의 생지옥을 더듬어 온 우리가 2․8 한․미 경제협정을 반대하는 것은 순수한 민족감정의 자연발생적인 현상일 텐데... 뭐 이것을 가리켜 공산당의 지시에 따른 움직임 이라고...허허...이것 참 야단났군. 자칫하다간 분별없는 광인의 칼날에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겠는데...하하하...”

김옹의 말이었다. 김옹의 웃음이었다. 풍찬노숙으로 이역을 표표(漂漂: 공중에 높이 떠있다-편집자 주)하며 조국의 해방을 목 놓아 부르던 항일투사 김성숙옹의 얘기였다.

셋방살이로 전전하며 그날 그날을 간신히 이어가면서도 내일의 조국을 설계하기에 여념이 없는 김옹은 예고 없는 기자의 방문을 맞으면서 부드럽고도 차근차근한 말씨로 한마디를 잇는 것이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의 말은 통일도 싫고 독립도 귀찮고 오직 자기들만이 고대광실 높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것으로 완전히 돌아버린 얘기야. 이제 남은 것은 그런 사람들을 하루빨리 민족의 이름으로 정신병원에 수용하는 것뿐이지.”

담배에 성냥을 긋는 옹의 안면엔 엷은 고소가 감돌았다. 가일층 우심해가는 민생고를 굽어 볼 때 제2공화국의 앞날도 기약할 수 없다는 옹의 표정은 침통하게 굳어진다.

“물론 나도 이남의 경제력이 이북의 그것을 능가할 수 있다면 선건설 후통일론을 무조건 환영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절대불가능하단 말입니다. 라인강의 기적을 경제바탕이 전혀 다른 한강변에서 이룩하려는 그 자체가 망상이죠.

이승만 정권 20년이 부패와 타성에 잠겼을 때 김일성 괴뢰정권은 죽자살자 짓기(건설)만 했어요. 선전에 이용하는 저들의 경제발전상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빈곤만이 악순환하는 이남의 그것보다 훨씬 앞섰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뭐 공산당들이 정치를 잘 했기에 앞섰다는 얘기는 아니죠. 공업발전을 가질 수 있는 자연적인 여건이 이남보다 훨씬 조화된 때문이에요. 석탄이나 철의 매장량이 몇 십 배에 가깝고 수력을 이용한 전기 생산이 풍부하단 말입니다.

그런데 보시오 이남의 자연환경을...전기사정은 말이 아니고 철 생산은 이름뿐이고 기껏해서 무연탄이 좀 나온다고 하지만 그것도 몇 십 년만 파먹으면 막장이랍니다.

이런 위치에서 선건설 후통일이라- 하하... 그런 말을 하시는 분들의 용기가 가○(해석불가-편집자 주)할만한 것입니다마는 그건 경제건설의 ABC도 모르는 무식의 폭로예요. 무식한 탓이 아니면 새빨간 거짓말이고 거짓말도 아니면 돌아버린 정신 탓이죠. 솔직한 말입니다마는 통일 없는 이남의 발전력은 철보다 도둑 전기보다 강도 그리고 또 공장건설에 앞서 살인강도사건이 더 발전할 것입니다“

신랄하면서도 비성어린 옹의 육성이었다. 일제의 총칼에 맞서 싸우며 항쟁의 깃발을 드높이 세웠지만 다시 찾은 조국은 한 허리를 잘린 반 동강이라는 한숨이었다.
8․15이후 16년간에 걸친 이렇듯 처절한 조국의 비극을 볼 것 없이 충국단심이라는 일념 하에 이국의 광야를 달리던 해방 이전에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는 옹의 차가운 독백이었다.

왕년의 친일파가 다시금 득세하여 조국을 농단하는 이러한 세상에 조금도 머물고 싶지 않다는 옹의 자학적 비명이었다. 그러나 옹은 굴하지 않았다.
조국에 바친 이 몸 마지막 그날까지 깨끗이 간직하겠다는 굳은 결의 속에 불붙는 그의 눈은 강렬히 빛나고 있었다. 양심과 양식이 마비되지 않은 이상 한․미 협정같은 민족적인 굴욕에 이 이상 더 참을 수 없다는 옹은 바야흐로 사생결단할 때는 다가섰다고 선언하면서

“통일없이 독립없어! 통일없이 건설없고 평화도 역시 깃들 수 없어. 극우나 극좌 그리고 친일분자를 물리친 다음에 민족적인 민주세력을 형성하며 통일독립민주사회주의공화국으로 줄기찬 전진을 하는 것 뿐”이라고 조용히 끝맺었다.

김성숙 씨 약력
▲ 평북 철산 출생
▲ 독립학교, 북경민국대학, 중산대학 졸업
▲ 3․1운동에 참가 옥고 2년
▲ 중경임시정부 국무위원
▲ 해방 후 망명 30년 만에 귀국
▲ 이승만 정권에 의해 투옥 3차

<해설>
운암 김성숙은 평안북도 철산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봉선사 승려로 양주 광천시장 시위 주모자로 체포되어 1년간 복역하였고 192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창일당을 조직하면서 <혁명>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였고 고려유학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뽑혀 활발히 활동하였다. 1926년 유학한국혁명청년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행동>을 발간하고 이듬해 대한독립단촉성회 광동분회를 조직하였다.

1931년 반제동맹에 가담하여 기관지 <봉화>, <반일민중>이라는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로군에도 참전하였다. 1936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각각 조직하여 상임이사, 선전부장으로 활약하였고, 이듬해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정치부장으로 일하였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하였고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귀국하였다. 1969년 4월 사망하였으며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자료-민족일보 1961.2.18자)

▲ [사진-민족일보 1961.2.18자 캡쳐]

『先建設 後統一이라고? 휴- 이것아무래도 이상해 淸凉理腦病院에 案內하고 싶어. 돌지않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의 精神狀態가 疑心스러워요. 確實히 돈 것에 틀림없어. 감투에 눈이 멀고 勢道에 머리가 돌았지. 그런데 요놈의 狂病은 요사이 바짝 더 甚해지더군 乙巳條約으로 半百年의 生地獄을 더듬어 온 우리가 二․八 韓․美經濟協定을 반대하는 것은 純粹한 民族感情의 自然發生的인 現象일텐데... 뭐 이것을 가리켜 共産黨의 指示에 따른 움직임 이라고...허허...이것 참 야단났군 자칫하단 분별없는 狂人의 칼날에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겠는데...하하하...』

金翁의 말이었다. 金翁의 웃음이었다. 풍찬노숙으로 異域을 漂漂하며 祖國의 解放을 목놓아 부르던 抗日鬪士 金星淑翁의 얘기였다. 셋방살이로 轉轉하며 그날 그날을 간신히 이어가면서도 來日의 祖國을 設計하기에 餘念이 없는 金翁은 豫告없는 記者의 訪問을 맞으면서 부드럽고도 차근차근한 말씨로 한마디를 잇는 것이었다.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의 말은 統一도 싫고 獨立도 귀찮고 오직 自己들만이 고대광실 높은 집에서 잘먹고 잘살면 된다는 것으로 完全히 돌아버린 얘기야. 이제 남은 것은 그런 사람들을 하루빨리 民族의 이름으로 精神病院에 收容하는 것뿐이지』

담배에 성냥을 긋는 翁의 顔面엔 엷은 苦笑가 감돌았다. 加一層 尤甚해가는 民生苦를 굽어 봄때 第二共和國의 앞날도 期約할 수없다는 翁의 表情은 沈痛하게 굳어진다.

『勿論 나도 以南의 經濟力이 以北의 그것을 凌駕할 수 있다면 先建設 後統一論을 無條件 歡迎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絶對不可能하단 말입니다.「라인」江의 奇蹟을 經濟바탕이 전연 다른 漢江邊에서 이룩하려는 그 自體가 妄想이죠. 李政權 十二年이 腐敗와 惰性에 잠겼을 때 金日成傀儡政權은 죽자살자 짓기(建設)만 했어요. 宣傳에 利用하는 저들의 經濟發展狀況을 額面 그대로 받아들이는것은 아니지만 貧困만이 惡循環하는 以南의 그것보담 훨씬 앞섰다는것은 否認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뭐 共産黨들이 政治를잘했기에 앞섰다는 얘기는아니죠 工業發展을 가질 수 있는 自然的인 與件이 以南보다 훨씬 調和된때문이에요. 石炭이나 鐵의 埋藏量이 몇 十倍에 가깝고 水力을 利用한 電氣生産이 豊富하단 말입니다. 그런데 보시오 以南의 自然環境을...電氣事情은 말이 아니고 鐵生産은 이름 뿐이고 기껏해서 無煙炭이 좀나온다고 하지만 그것도 몇十년만 파먹으면 막장이랍니다. 이런 位置에서 先建設 後統一이라- 하하... 그런말을 하시는분들의 勇氣가 可○할만한 것입니다마는 그건 經濟建設의 ABC도 모르는 無識의 暴露예요. 無識한 탓이아니면 새빨간 거짓말이고 거짓말도 아니면 돌아버린 精神탓이죠. 솔직한 말입니다마는 統一없는 以南의 發展力은 鐵보다 도둑 電氣보다 强盜 그리고또工場建設에 앞서 殺人强盜事件이 더 發展할 것입니다』

신랄하면서도 悲聲어린 翁의 肉聲이었다. 日帝의총칼에 맞서 싸우며 抗爭의깃발을 드높이세웠지만 다시찾은 祖國은 한허리를잘린반동강이라는 한숨이었다.
八․一五以後 十六年間에 걸친 이렇듯 悽絶한 祖國의 悲劇을볼것없이 忠國丹心이라는 一念下에 異國의 曠野를 달리던 해방以前에 죽지못한것이 恨스럽다는 翁의차거운 獨白이었다.

往年의 親日派가 다시금 得勢하여 祖國을 壟斷하는 이러한世上에 조금도 머물고 싶지않다는 翁의 自虐的 悲鳴이었다. 그러나 翁은 屈하지 않았다.
祖國에 바친 이몸 마지막 그날까지 깨끗이 간직하겠다는 굳은 決意 속에 불붙는 그의눈은 强烈히 빛나고 있었다. 良心과 良識이 마비되지않은以上韓․美協定같은 民族的인 屈辱에 이 以上 더참을 수 없다는 翁은 바야흐로 死生決斷할 때는 다가섰다고 宣言하면서

『統一없이 獨立없어! 統一없이 建設없고 平和도亦是 깃들수일없어. 極右나 極左 그리고 親日分子를 물리친다음에 民族的인 民主勢力을形成하며統一獨立民主社會主義共和國으로줄기찬 前進을 하는 것 뿐』이라고 조용히 끝맺었다.

金星淑씨略歷
▲ 平北 鐵山 出生
▲ 獨立學校, 北京民國大學, 中山大學卒業
▲ 三․一運動에 參加 獄苦 二年
▲ 重慶臨時政府 國務委員
▲ 解放後 亡命 三十年만에 歸國
▲ 李承晩政權에 依해 投獄 三次

(자료-民族日報  1961.2.18자)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