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대마방직합영회사'는 '남북 합영회사 1호'라는 꼬리표가 항상 붙어 다닌다. 이전에도 합영 형식으로 평양에 진출한 남측 업체가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남북이 공동 출자하고, 이사진을 구성해 공동 경영하는 합영회사는 '평양대마방직'이 분단 이후 처음이다.

특히 원자재 공급부터 제품생산까지 모든 공정이 북측 지역에서 이뤄진다. 평양시 모란봉 일대, 황해도, 평안도 일대 등 협동농장 600만평에서 대마를 재배해 이를 직접 공장에 투입하고, 공장에서는 마, 실크, 면 등 원단뿐만 아니라 양말, 수건, 이불 등 완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모든 설비가 마련돼 있다.

(주)안동대마방직은 북측 새별 총회사와 3,000만불의 자본금으로 합영회사를 설립해 2008년 10월 30일 평양에서 평양대마방직합영회사 준공식을 가졌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축전을 보내 "평양대마방직의 준공식은 분단 60년사에 남북 경제인들이 힘을 합쳐 이룩한 민족의 쾌거이며, 개성공단에 이은 또 하나의 커다란 성과"라고 추켜세웠다.

2009년 방북 불허 "지금 고비가 치명타"

▲ <통일뉴스>는 지난 15일 서울 잠실 사무실에서 김정태 (주)안동대마방직 회장(68)과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기대를 한껏 모으고 준공한 '남북 합영회사 1호'는 지난해부터 방북길이 막히면서 최대 고비를 맞고 있다. 1999년부터 북한 진출을 준비해오면서 우여곡절 끝에 공장을 세웠지만 제대로 된 상품 한번 생산해 보지도 못하고 방북이 불허되면서 사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지난 15일 서울 잠실 사무실에서 만난 김정태 (주)안동대마방직 회장(68)은 "지금 고비가 치명타"라며 "횟수로 몇 년이냐, 그동안 수입도 없이 회사를 줄이고 줄여서 지금까지 버텨왔는데 참으로 안타깝다"라며 혀를 찼다. 그는 평양 진출을 준비하면서 중국과 국내에 있던 공장까지 모두 정리했다.

김 회장은 지난해 2월 28일 마지막으로 자신의 공장이 있는 평양을 방문했다. 준공식 이후 몇 개월 동안 시험가동을 마치고 남측 기술자를 보내 본격적인 생산 체계로 전환하는 시점이었다.

3월 말부터 북측 근로자 교육을 위해 각 분야 별로 기술자를 투입하기 위해 준비에 들어갔다. 갑자기 4월 북한의 로켓 발사를 앞두고 방북길이 막혀버렸다. 기술자가 들어가지 못하면서 주문이 모두 끊겼다. 북측 근로자들은 고용된 상태였지만 기술자 없이 제대로 된 상품을 생산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지난해 순손실만 70억원 이상 발생했다. 지금 현재 매출 자체가 없다.

"기계를 10개월 이상 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첨단 설비들이라 녹이 슬면 못쓰고 전부 교체해야 합니다. 부품을 전부 만들어서 교체하고 정상가동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지금 시작해도 4개월 정도는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겁니다."

"이명박 정부가 과거와 다른 새로운 정책을 시도한 것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남북교류가 20년이 되어가니까 우리로서 당연히 해야 되는 면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민간 기업을 막는 것은 방법상 옳지 않습니다. 개성공단도 다 돌아가고 엔지오(NGO)도 다 들어갑니다. 평양에 진출한 기업을 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정부에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주)안동대마방직은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 매출이 없는 상황에다 지난해 준공 당시 차입한 20억원도 바닥이 났다. 증자 계획도 남북관계 악화로 무산됐다. 이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김 회장은 결코 이 사업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저로서는 10년 동안 모든 것을 바친 사업입니다. 또 남북관계 경제협력 분야에서 상징성도 있습니다. 평양에서 민간기업의 교두보 확보는 먼 훗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합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2006년 첫번째 고비 '중단 결심'하기도
"내 인생에서 남북 위한 마지막 일"...북에서도 "역사에 남겨야"

평양에 합영회사를 세우기까지의 10년간의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시 북한에 진출한 많은 업체들이 중도 포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김 회장은 확실히 준비해서 성공 사례를 남기고 싶었다.

1999년 북한에 진출하기에 앞서 두만강 인근 중국 지역에서 땅을 얻어 대마 시험 재배를 시작했다. 식량이 부족한 북한에서 대마, 목화 등 특용작물을 재배할 땅을 배정받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식량 생산을 위한 이모작이 가능한 방법을 개발해야 했다.

첫해는 실패했다. 겨울이 되면 영하 20-30도까지 떨어지는 지역이라 겨울이 너무 길었다. 눈이 다 녹는 5월에 시를 뿌리면 이모작을 할 만큼 시간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고안한 방법이 겨울이 오기 전 10월 쯤 미리 씨를 뿌리는 것이었다. 얼음이 녹으면서 3월 말 쯤 싹아 돋아났다. 대마 성장기일이 100일이라고 했을 때 대마를 재배하고 빨리 밭을 갈면 조생콩 등 먹거리를 다시 심을 수 있었다.

이모작에 성공한 다음부터 북측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먼저 조선족을 통해 대마 이모작 재배 방법부터 전수했다. 2002년부터 북한 당국의 여러 기관에 사업 계획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 2008년 10월 30일 평양대마방직합영회사 준공식에서 김정태 회장(오른쪽 두번째)이 북측 박창련 민경련 부위원장(오른쪽 세번째)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주)안동대마방직]

"그 때 당시만 해도 북한에 들어가려면 일정 정도 기여금을 줘야만 했어요. 우리에게 3만 5천불 정도 기여하면 초청하겠다는 겁니다. 그 때 우리는 기업인인데 돈을 주고 가는 관행이 계속 된다면 정상적인 기업 활동이 안 된다며 거절했습니다."

"처음부터 주식회사 형태가 아니고서는 진출해봐야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북한도 우리와 합영회사를 만들어서 어느 정도 문호를 열어줘야 한다는 판단이었습니다. 합영회사가 되면 남측 기술자 28명 정도가 거주하면서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게 이뤄져야 하니까 평양에서 개방문제가 걸렸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북한에서 국가계획위원회나 내각에서 이런 형태의 합영회사를 받아들일 것인가를 두고 10여 차례 논의한 끝에 우리를 초청했다고 합니다."

김정태 회장이 북측을 상대로 원칙적인 기업 활동 보장을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만의 기술이 있기 때문이었다. 40년 가까이 섬유사업에 매진해온 김 회장은 대마방직 기술로 신지식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실물 생산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앞선 김 회장의 대마방직 기술을 북측도 인정한 것이다.

2003년 12월 북측 민족경제협력연합회 산하 새별총회사와 합영계약서를 체결했다. 대북진출을 준비한 지 5년 만이었다. 하지만 평양의 현실은 계획과 달랐다. 2005년 4월 공장 착공을 시작해 2005년 6.15에 완공할 계획이었지만 2006년 연말까지도 건물이 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당초 합영회사는 원단만 생산하고 평양에 있는 북측 방직공장을 활용해 제품 생산을 위한 공정을 분업화하려던 계획도 차질을 빚었다. 수출품을 만들기에는 평양 방직공장의 시설과 기술 수준이 떨어졌다. 전압도 고르지 않아 한 달 만에 제직설비가 80% 이상 고장이 났다. 산업 인프라부터 제품을 만드는 공정까지 16개의 공장을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 많은 투자가 필요했지만 자금이 마땅치 않았다.

"2006년 11월에 북측 부회장을 만나서 '이제 더 이상 할 수가 없겠다.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통보했습니다. 그 때 북측의 반응은 '이 사업은 남북 분단 60년 만에 처음 시도하는 민간경협의 상징으로 하나의 주춧돌 역할을 하는 것인데 여기서 포기하면 우리 민족의 미래도 없다'는 겁니다. '그동안 잘못된 것(공장 건설)은 시정하고 5개월 내에 완성할 테니 다시하자, 그래서 역사에 남겨야 한다'고 저를 설득시켰습니다."

김 회장 역시 비슷한 마음가짐이었다. 그는 당시 통일부 장관을 만나 이같은 상황을 설명하고 정부 대출지원을 받았다. 이와 함께 자체증자를 통해 1차적으로 65억원의 투자금액을 마련했다.

"이 길이 참 힘들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국내에서도 기피하고 있는 제조업이 기업환경이 열악한 북쪽에 진출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는 결정입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이 이것을 안 하면 누군가가 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이게 내 인생에서 남과 북 국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다'라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미관계 진전, 미국 회사의 투자 검토... 새로운 기회

▲평양대마방직은 지난해 연말부터 북.미관계 진전 기미가 보이면서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방북 불허로 최악의 위기에 처한 평양대마방직은 지난해 연말부터 북.미관계 진전 기미가 보이면서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 미국 기업들이 남북합영회사인 평양대마방직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기업들이 우리 회사에 대한 관심도가 예상보다 높아요. 남쪽의 기업이 평양에서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겠는가 관심이 지대합니다. '지금 당사의 금융관계가 안 좋은데도 불구하고 투자를 하겠다'는 움직임을 저희가 받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자금을 가지고 있는 기업이 왜 나 같은 사람을 찾아와서 함께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런 것을 보면 북.미관계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 회장은 투자를 검토하고 있는 미국 기업으로부터 북.미관계에 특별한 악재가 없다면 빠르면 3,4월 늦어도 6월 안에 평양에 미국의 무역대표부가 서고 워싱턴에 북한의 연락사무소가 설 것이라는 말도 전해 들었다. 이를 위해 지난해 12월 방북했던 미국 기업인 중 재미동포 한 명이 북한에 잔류해 후속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북.미관계가 진전될 경우 정부의 기업인 평양방북 불허도 풀릴 가능성이 높다. 김 회장은 "남과 북이 이번 이런 상황을 백년지대계의 기회로 활용했으면 좋겠다"며 "정부도 한반도 전체를 위해서 번영할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야한다. 이 기회를 이대로 흘려보내지 말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편 김 회장은 정부가 남북경협에 손을 놓고 있는 동안 북.중경협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현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김 회장은 "중국의 북한 진출 속도는 예상보다 빠르다"며 "북한의 지하자원이 중국기업에 대해 거의 무방비 상태"라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동북 3성 등 접경 지역에서 이뤄지던 북.중경협이 지난해 원자바오 총리 방북 이후 산둥성까지 내려오고 있어요. 중국의 방직협회, 제지협회 등 기관과 주요단체들이 움직이면서 변방에서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하자원 교역은 공식적으로 조인만 안 됐지 내막에서는 거의 합의가 됐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원자재에 대한 투자를 하고 있는 중국이 북한이 가지고 있는 지하자원을 놓칠 리 없습니다. 거기에 대한 우리의 대비가 소홀합니다. 우리 민족의 국부가 중국으로 유출되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에 대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올해 공장 정상 가동해서 북측 사람들 많이 고용하겠다"

▲북측 근로자들이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둘러보고 있는 김정태 회장. [사진제공- (주)안동대마방직]

김 회장은 사양산업이 된 섬유 원자재 산업에 대한 남측 기술을 북측에 전수해 중국을 대체하는 새로운 생산거점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으로 대북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러한 기업가적 구상도 있었지만 그를 평양으로 이끈 이는 1998년 배고픔을 못 이겨 두만강 중국 접경지역 인근까지 걸어 나온 북한의 한 아이였다. 당시 북한은 고난의 행군 막바지로 식량부족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한 아이가 두만강 다리에 앉아 있었어요. 다리 중간 빨간 지점까지는 중국 땅이고 그 너머는 북한이에요. 그 아이 눈에 초점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무심코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마음에 밥이라도 사 먹으라고 주머니에서 중국 돈을 줬습니다. 그랬더니 이 녀석이 '저 조선서 왔어요' 하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 밤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오후에 그 곳으로 가봤더니 전날 맥이 빠져 있던 아이가 다음 날 나를 보면서 얼굴에 희망이 가득한 겁니다. 초점도 없었던 아이가 생기가 돌아 희망을 보이는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결국 그 아이가 평양을 알게 해줬고, 그 아이 때문에 평양에 가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평양대마방직' 합영회사는 본공장 4만 5천여㎥, 제2공장 1만여㎥ 규모로 정상 가동될 경우 근로자 수는 3천명이다. 김 회장은 사업이 확장될 경우 공장 종업원 1만 2천명, 그리고 대마, 목화 재배농가까지 포함해 3만 세대, 12만명의 고용을 창출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우선 올해 우리 공장이 정상 가동되어 북측의 많은 인력을 고용하고 기술전수도 하고 싶습니다. 북측 경제에도 기여하고 남측 경제에도 기여하고 싶어요. 우리를 본보기로 삼아 더 많은 노동집약적인 사업이 북측 지역에 진출해서 생산 거점을 확보하는 것은 국내 기업을 살리는 길이며, 국익에 부합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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