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일 오전,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올해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원년으로 보고 있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상임대표는 13일 오전, 900차 '수요시위'에 앞서 가진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며 이같이 밝혔다.

윤미향 상임대표는 "2010년 과거사 단체들이 '부끄러웠던 지난 100년을 이제는 청산하자고 해서, 미래에는 과거사 해결이라는 목소리를 던져줘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모였다"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꼭 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지난해 과거사 관련 단체들은 '진실과미래, 국치100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국치 100 추위)'를 창립했다. 각 부문의 과거사 청산을 목표로 시민사회단체들이 뜻을 모은 것이다.

정대협도 여기에 참가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너무나도 부끄러운 역사의 상흔이지만, 차마 입에 담기 어려웠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사회적으로 주목받았던 때는 1991년 8월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있은 후였다. 당시 피해자의 용기있는 고백은 상당한 사회적 파장을 가져왔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단체들의 활동이 본격화됐다.

윤 상임대표도 김 할머니의 증언을 통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92년 1월 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시위'를 연 이래로 18년 동안 '수요시위'를 이어오고 있다. 이날, 900차를 맞은 '수요시위'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여성.인권단체의 역사적인 기록이었다.

그는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 그게 900차를 맞는 솔직한 심정"이라면서 "1,000차 수요시위는 열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어 "1,000차까지 가면 우리가 부끄러울 것 같다. 일본은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것"이라며 "우리 정부를 그렇게 만들지 못한 우리 자신에 대해 통곡해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대외적인 요소로 미국의 이중적인 태도를 들었다. 미국이 유럽과는 달리, "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을 이용하기 위해 면죄부를 준 것"이라는 지적이다. 대내적 요인으로는 한국 사회의 과거사 미청산과 분단 등을 꼽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입법적이고 행정적인 조치가 가장 해결의 실마리"라면서 "일본 국회를 통과해서 법이 제정될 수 있느냐가 가장 큰 관건"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 법이 제정된 이후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정적인 조치를 한국 정부와 외교테이블에 놓고 진행해야 한다"며 "그것을 위해서는 한국 정부도 수동적으로 있지 말고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일본의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법 제정 촉구를 위해 정대협은 한국 국민 1%인 50만 명의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동시에 일본에서도 일본 국민 1%에 해당하는 120만 명에 대한 서명운동을 펼쳐, 일본 정부를 압박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윤 상임대표는 "일본 정부의 분위기는 바뀌었지만, 역시 보수적인 분위기가 많기 때문에, 보수적인 분위기를 누를 수 있는 우리의 여론이 커야 된다"며 "여론을 통해 일본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 그런 여론을 우리가 만드는 것이 올해의 목표"라고 밝혔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900차 수요시위, 슬프고 괴롭다. 그러나 그만큼 자랑스럽다"

▲900차 수요시위를 맞는 윤 상임대표는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며 씁쓸한 심정을 전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통일뉴스 : 수요시위 900차 맞았는데, 개인적인 소회는?

■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 : 힘들다.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 그게 900차를 맞는 솔직한 심정이다. 겉으로 소감을 말하라고 여러 사람이 묻길래 그랬다. '기쁘다, 우리가 이렇게 900차가 되도록, 18년이 되도록 이 문제를 놓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했다는 것은 우리의 승리이기 때문에 기쁘다, 그것을 통해서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왔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더 많이 알릴 수 있었고, 또 역사를 모르는 일본 청년들한테도 살아있는 역사를 알려줄 수 있었다. 전혀 위안부 문제와 아시아와 상관이 없는, 역사적인 토대도 다른 프랑스라든가, 캐나다라든가, 유럽쪽의 서구 사람들에게까지 이 수요시위가 알려져서, 심지어는 관광책자에까지 실려서 관광 오신 분들이 수요시위에 참석하고 가신 분들이 있기 때문에, 이건 어쩌면 앞으로 역사 자원으로도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다. 또 평화와 인권을 만들기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굉장히 소중한 경험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이런 소감들을 얘기했다. 그런 거다. 두 가지다. 하나는 힘들고, 슬프고 괴로운 것이고, 또 하나는 그만큼 자랑스러운 것 하나, 이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 같다.

□ 이번 900회를 맞아 한.일에서 동시에 개최되는데?

■ 그렇다. 2003년부터인가, 그때부터 일본에서 1달에 한 번씩 수요시위를 하는 곳이 있었다. 오사카, 도쿄. 한국에서 피해자들이 매주 수요일마다 하는데, 우리는 한달에 한 번씩이라도 연대하는 시위를 하자, 그렇게 해서 일본 도쿄에서는 참의원 회관에서 침묵시위, 사람들에게 홍보 전단을 나눠주는 활동을 하고, 오사카에서는 여성들이 함께 모여서 집회식으로 발언도 하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홍보물도 전해주고 하는 집회를 간간히 해 왔다.

근데 이렇게 특별나게 700차, 800차, 900차, 이런 기념적인 시위 때는 여러 지역에서 함께 해 왔다. 그래서 이번에도 후쿠오카.나고야.효고.오사카.도쿄.교토 등에서 하는 것이고, 독일 베를린에서는 그동안에는 교포 여성들이 일본 여성들하고 같이 중심이 되서 연대시위를 해 왔다. 이번에는 청년들이 나섰다. 독일에 살고 있는 대만 청년.한국 청년, 일본 청년, 그리고 독일 청년들이 같이 연대해서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하고 브란덴부르그 문까지 행진하면서 시민들에게 홍보활동을 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성과다. 900차를 맞이하는 기쁨인데, 이것은 앞으로의 역사를 위해서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일본이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각국의 청년들이 이 문제를 알아간다면, 그들이 자라서 어른이 됐을때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면 역시 진실을 밝히라는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라는 것을 이런 증상들을 보면서 알 수 있다. 한국의 수요시위도 굉장히 젊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 길원옥 할머니가 수요시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에겐 빽이 있다. 이 젊은 애들이 바로 내 빽이다. 내가 죽어도 얘들이 잊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걱정 안 한다'는 말씀 하시는 것 같이, 정말 그런 것 같다.

"18년 전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 1992년 1월 8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첫 번째 수요시위.[사진-정대협 제공]
□ 수요시위 1992년부터 해 왔는데, 요구사항이 무엇인가?

■ 1992년 1월 8일, 그때만 해도 우리가 6가지 구호를 주장했다. 진상규명, 범죄인정, 공식 사죄, 법적 배상, 올바른 역사교육, 추모비.사료관 건립이었다. 근데 93년부터 하나 추가했다.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재발방지 조치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인 책임자 처벌이다. 책임자가 누구인지 밝혀내서 책임자를 처벌해야 다시는 이런 범죄의 책임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 7가지 요구를 계속 해오고 있다.

책임자도 처벌 안 됐고, 물론 다 죽었지만, 그 사람이 위안부 책임자라고 해서 죽은 것도 아니고 그냥 죽은 것이다. 책임자도 처벌 안 됐고, 진상도 여전히 규명되지 않았다. 우리가 몇 명이 끌려갔는지 아직도 모른다. 해방 후에 현지에 있는 사람들, 오키나와만 가더라도 '여기 조선여자들이 있었는데, 전쟁이 끝나니까 그 여자들 어디 사라졌더라, 그 뒤로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하늘로 증발했느냐, 어디로 갔느냐. 우리 추측은 분명히 죽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오키나와에 갔었던 피해자들 중에, 우리가 만난 피해자 분 중에, 한 분은 중간에 병이 걸려서 나왔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만났다. 근데 끝날때까지 있었던 사람은 우리 아무도 못 만났다. 오키나와에는 중국 여자들도 아니고, 조선 여자들만 다 갔는데, 그런데 거기에 전쟁이 끝나고 나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모른다. 그냥 증언만 있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 일본이 어떻게 그 여성들을 관리하고, 어떻게 했는지가 아직도 안 드러났다. 그것을 실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강제 실종이다, 의문사다. 사실은 전쟁 때문에 끌려갔는데, 그 다음에 돌아오지 않은 수많은 여자들 의문사를 당한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유골조차도 없다. 징용갔던 사람들은 유골 계속 송환하고 찾아서 오는데, 위안부 여성들 같은 경우에는 그것도 없다. 아직도 진상규명해야 될 일이 너무나 많다.

공식사죄와 법적 배상은 커녕, 역사 교육도 마찬가지다.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해서 추모하라고 했는데, 계속 저들은 야스쿠니만 중요하다고 하고 있다. 지금 구호가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근데 물론 진전은 있었다.

90년에만 해도 일본 정부가 국회에서 답변을 할 때 '위안부 문제는 군이 개입하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모르는 일이다. 있었다 하더라도 민간업자들이 한 일이었고, 여성들이 스스로 자원한 것'이라는 답변을 했다. 그니까 엄청난 분노가 일어났다. 그리고 92년 1월 8일 수요시위 시작하고, 92년 7월에 일본 정부가 1차 조사를 하고 발표를 했다. 그때 '군이 부분적으로 개입했다'라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강제적이지 않았다. 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 자원했다'라는 발표를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했다. 93년 8월에 와서야 '강제성이 있었다. 그리고 민간업자가 연행했다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여성들이 연행될 수밖에 없는 물리적 환경이 있었다'는 이런 애매모호한, 여전히 거기에는 책임이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일본 정부가 군 당국이 책임있다는 얘기를 못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책임을 져야 하니까. 군이 책임있다는 얘기를 하면, 곧바로 거기에 대한 사죄와 법적인 책임 문제를 논할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그 문제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발표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95년 자민당이 계속 잡다가 사회당이 정권을 잠깐 잡을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많이 기대했다. 사회당 의원들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한다는 요구를 계속 해왔고, 또 피해자들과 집회에 참가해서 마이크를 들고 굉장히 확신있게 얘기 했기 때문에 기대를 걸었다. 근데 무라야마가 정권을 잡자마자 '법적 보상 못 한다. 대신에 보상을 대신하는 조치로서의 국민 모금을 통해 기금을 전달하겠다'고 나온 것이다. 거기서 지금 달라지지 않았다. 보상은 못한다는.

"미국이 아시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에 면죄부 줬다"

□ 왜 이뤄지지 못하다고 보는가? 가장 큰 원인은?

■ 유럽하고 비교하면 드러난다고 본다. 하나는 미국의 역할. 미국이 독일에 대해서는 지금도 계속 추궁한다. 보상하라고 하고, 확실하게 책임지라고 하고. 근데 미국의 역할이 아시아에 대해선 안 그랬다. 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일본을 통해 장악하기 위해서 일본을 이용했고, 그것을 통해 일본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전범재판에서도 위안부 문제 입 막았다. 확실한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는 유럽 같은 경우에, 지금 독일이 전범을 해결해서 유럽국가와 대등한 관계가 될 정도로, 거기에는 전쟁이 일어났지만 초토화되지 않았다. 근데 아시아 같은 경우 필리핀도 그렇고, 조선도 그렇고, 대만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전쟁 이후에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거의 없다. 다시 일본의 경제적인 예속을 받게 된 것이다. 어느 나라도 전후에 일본에게 예속되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그게 아시아 나라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게 미국의 역할과 아시아 나라가 구분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전후 친일파 청산 제대로 못한 것이 피해자들이 얘기 못하는 분위기 만들어"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한국 사회가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그런 관계 속에서 과거사 문제가 청산되지 않은 것도 있다. 한국 사회가 전후에 일제 과거사에 대한, 친일파에 대한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그것이 피해자들도 감히 얘기하지 못하게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가해자들은 여전히 면장하고, 국방부 장관하고, 이런 상황에서 '저 사람이 나를 끌고 갔다'고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들. 범죄자에 대한 불처벌 문제가 범죄 재발에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처벌을 하지 않고 넘어옴으로써 피해자는 오히려 피해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고, 가해자는 당당하게 활보하고 다니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계속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게 이 문제를 남쪽에서 해결하지 못하게 하는 한 가지 원인이었다.

분단된 것도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었다고 저는 생각한다. 분단된 현실에서 과거사를 청산하자는 목소리조차도 빨갱이로 호도되고, 처단 당하고 뒤로 몰리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역시 다른 아시아 나라에 비해, 우리 한국은 굉장히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여러가지가 함께 풀려야 한다. 통일도 풀려야 되고, 미국과의 관계도 풀려야 되고, 일본과의 경제적 예속이라든가 비자주적인 문제들까지 풀려야 한다. 또 내부에서는 과거 친일파들이 제대로 청산되어야 되고, 그로 인해서 한국에서 위안부들을 연행하는데 앞장섰던 사람들, 위안소까지 여성들을 끌고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 면장들, 이런 사람들이 제대로 진상 규명되고 청산되는 것, 처벌되는 것이 굉장히 필요하다. 그래야지 위안부 문제가 원상회복될 수 있다. 그건 언제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씩 풀어가다보면, 우리 후세대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는 것이다.

□ 현재 수요시위의 포맷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 미야자와가 오는 것이 수요일이었고, 낮 12시는 많이 알리기 위해서다. 그 시간은 사람들이 점심 먹으로 왔다갔다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시민들도 참여가 가능하고 홍보하기도 좋다. 그래서 시간을 정한 것이다.

"고개를 들지 못했던 피해자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해졌다"

□ 오랜 동안 수요시위 진행해왔는데, 가장 큰 성과는?

■ 우리는 수요시위를 거리의 박물관이라고 한다. 흔히들 얘기하면 건물로 된 박물관이 아니라, 요새는 박물관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움직이는 박물관 형태로 해서, 박물관이 시골로 갈 수도 있고, 도외지도 갈 수 있고, 또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는 자유로운 형태의 박물관을 꿈꾸고 있다. 우리도 이제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하는 수요시위가 옛 역사와 현 세대가 만나는 살아있는 역사 교실로서의 역할로 자리잡혔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학교에서 평화라든가, 인권이라든가 교육 잘 안 시키지 않나. 여기에 와서는 그런 평화와 인권을 함양할 수 있는 그러한 내용들로 교육을 시켜왔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중요한 성과는 수요시위를 통해서 피해자들이 변했다는 것이다. 92년 첫 수요시위 때의 모습은 저한테는 좀 슬펐다. 나도 기분이 행복하지 못했다. 할머니들 다섯명 서 있었고, 저하고 이오제 선생님, 그리고 몇 사람 10여 명 서 있었다. 그 때는 매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지 못했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사회 인식도 좋지 못했다. 그냥 부끄러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으며 손가락질 하기도 하고, '뭐 자랑스럽다고 저 앞에서 저렇게 시위를 하나' 라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 회사원들이 많지 않나. 지나가는 모습들이 썩 긍정적이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앞에 서 있는 광목천을 조끼로 두르고, 광목에 글씨가 새겨진 것을 들고, '사죄하라, 배상하라'라고 외치는 우리 입장에서도, '내가 왜 이런 시선을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또 한편으로는, 내 옆에 있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이 할머니들은 왜 지금 이런 시선을 받아야 하나. 이게 잘하는 일인가' 하는 생각에 굉장히 슬펐다.

근데 피해자가 아닌 나도 그런 생각을 가졌는데 피해자인 당사자들은 더 심했던 것이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현수막이 있으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선글라스 끼고 오는 분, 모자를 푹 눌러쓰고, 눈만 내놓고 참석하시는 분들이 많았었는데, 지금 엄청나게 당당하지 않나. '나는 죄인이 아니다, 일본 정부가 죄인이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할머니에게 물으니까, '여기 오시는 당신들 때문에 그렇다. 당신들이 내 이야기를 존중하면서 들어주고. 아 내가 이제는 존중받는 대상이구나. 내가 그런 피해를 덮고 혼자 살았다면 부끄러운 존재일지도 모르겠지만, 용감하게 드러내면서 이렇게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회개하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를 장하다, 잘 살아주셨다고 칭찬해줬다' 그러시니까, 할머니들이 자신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나갔을때 외국 사람들이 당신을 대하는 태도는 굉장하다. 전쟁의 피해자로 살아 있는 것도 중요한데, 피해자인면서 그것을 당당하게 증언하는 모습들은 굉장한 것이다. 외국사람들한테. 그것을 본인이 그대로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들이 자신있게 당당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게 굉장한 성과다.

또 하나는, 반대로 사람들이다. 언젠가 부천에서 자칭 '어린 청년'이 수요시위에 참석해서 자유발언을 시켰다. 그랬더니 마이크를 들고, 자기가 수요시위 참석하면서 발언을 하라고 해서 '할머니들한테 어떤 힘을 드릴까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고 왔는데, 답을 못 얻었다'고 했다. 근데 오히려 자기가 와서 할머니들한테 대단한 힘을 받아간다는 얘기를 했다. '저같으면, 제가 만약 할머니같은 삶을 살았다면, 삶을 포기했을 것 같습니다. 근데 포기하지 않고 우리 앞에 당당하게 서 계신 모습을 보니까 제 자신의 삶도 다시 고쳐잡아야 겠다'는 고백을 했다. 그것 같다. 서로, 일방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우리가 뭔가를 주는 것이 아니고, 피해자들은 후세들에게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고, 후세대들은 할머니들한테 힘도 주고, 격려도 주고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에너지도 제공하는 것 같다. 그게 이 수요시위가 가져다 준 굉장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1000차 수요시위는 열리지 않도록 해야"

▲ 이날 낮 12시, 18년 동안 이어진 수요시위가 900차를 맞았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위안부 문제 해결과 관련해 각오나 계획은?

■ 올해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원년으로 보고 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꼭 해야 된다. 1000차는 열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1000차는 정말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1000차까지 가면 우리가 부끄러울 것 같다. 일본은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것이다. 우리 정부를 그렇게 만들지 못한 우리 자신에 대해서 통곡해야 될 것이다. 물론 기념할 만하다. 기념할만 하지만, 통곡해야 될 때가 아닌가 싶다, 그 때는.

그리고 우리가 지금 2010년 과거사 단체들이 모여서 부끄러웠던 지난 100년을 이제는 청산하자고 해서, 미래에는 과거사 해결이라는 목소리를 던져줘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에 활동을 하고 있다. 근데 걱정스러운 부분은 있다. 제 단체가 모였기 때문에 성향들도 다 다른 것도 있다. 또 활동을 열심히 해 온 단체들도 있고, 또 부족한 단체들도 있다. 이런 단체들을 모아서 하나로 모아서 함께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하려고 집행부에서 노력을 열심히 하고 있다. 각 피해자들, 원폭 피해자.사할린 피해자.위안부 피해자.강제노동 피해자 등 엄청 많지 않나. 그 피해자들 목소리들을 모두 담아가면서 활동하려고 하고 있다.

그동안 운동을 해왔던 저로서 걱정되는 한 부분은 우리가 2010년만 살 것이 아닌데, 2010년 8월 29일을 중심으로 한 행사를 준비하는 일에 매달려가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이나 걱정은 든다. 그러나 논의과정에서 그런 것은 잘 극복하리라 믿는다. 일본과 워크샵을 통해서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 과정 속에서 일본 사회도 변화시키고 한국에서 참가하는 단체들도 변화시키고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전환점을 만들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와 확신은 가지고 있고, 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치 100년 맞아,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하는 여성대회 北에 제안"

근데 이런 행보에 북이 빠져있다. 처음에 '국치100 추위'가 출범하면서 3대원칙에 남북해외가 과거사 문제 해결한다는 것이 들어있다. 그리고 통일을 우리가 앞당긴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게 좀 풀리지 않는 일이다. 우리가 2008년에 겨레하나가 주선해서 평양에 가서 토론회를 했을때 그것을 제안했는데, 지금 남북상황이 워낙 안 좋아서, 이런 상황에서 그 동안 십 수년 동안 성과로 자리매김돼 왔던 남북관계, 남북연대, 남북교류가 위안부 문제 관련해서도 이것마저도 혹시나 후퇴하게 되면 어떻하나 하는 불안이 있다. 오히려 진전시켜야 되는데, 진전되지 않고 지금은 제자리 단계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혹시나 후퇴하게 어떨께 할까 하는 불안감이 있다.

정대협으로서는 지금 북에다 제안은 해놓은 상태다.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 행사와 3.1절도 있기 때문에, 그 즈음해서 평양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남북 여성대회, 토론회를 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한 상태다. 지난 12월 30일이다. 일본을 통해서 보냈다. 아직 연락은 없지만, 올 것이다. 올 것이라 믿는다. 위안부 문제는 꼭 돼야 한다.

"숙원 사업 중 하나, 北 고향인 할머니들 방북하는 것"

□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현재 몇 분 정도 계신지?

■ 87명이다. 수요시위 이래로 234명에서 87명이 있는 것이니까, 147명이 돌아가신 것이다.

올해 숙원 사업 중 하나가 북이 고향인 할머니들이 고향을 한 번도 방문하지 못했는데, 그 분들은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남쪽으로 돌아온 것이다. 인천항구로 들어와서 남쪽에 정착한 것이다. 그니까 고향에 그래도 가보고 돌아가셔야지, 부모형제는 못 만나더라도 고향 산천을 눈에 담고 갈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하는데, 그것도 사실은 겨레하나를 통해서 찾아달라고 요청을 해 놨다. 북 민화협한테. 그런데 아직 연락은 없다. 힘들 것 같다. 왜냐하면, 할머니들이 주소를 기억하고 있는 분이 길원옥 할머니였는데, 지난 2008년에 갔을때도 북의 행정구역이 다 틀려져 있더라. 평양도 한국전쟁때 완전 초토화돼서 찾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할머니들이 다 적십자에 오래 전부터 신청은 해 놨다.

할머니들은 당연히 급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내가 갖고 있는 돈이라도 줬으면 좋겠는데, TV에서 계속 북한 못 산다고 하고, 굶어죽는 다고 하니까 혹시 거기에 내 조카도 있나, 내 동생도 있나 막 그러시는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 그렇게 굶어죽을 지경은 아니다, 워낙 국제적으로 북을 고립시키려고 선전하는 것도 있다. 물론 살기는 힘들다. 그런데 다른 나라들이 선전하는 것처럼 죽을 지경은 아니니까, 옛날에 우리 보릿고개 다 살아남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고 얘기했는데, 그렇지가 않다.

이분들은 워낙 60, 70년대 반공교육을 받고 살아오신 분들이다. 그러니까 길원옥 할머니도 평양에 가시기 전까지는 반공 생각 때문에 북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가서 보니까 애들 만나고 하니까, 아니거든. 사람들 만나서 '혹시 길씨 아냐'고 물어봐도, 아무도 제지 안하거든. 그러니까 할머니가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할머니들도 가 봐야 달라질 것이다. 지금 살아계신 분 가운데 6명 정도가 북이 고향이다. 평양이 2분이 있고, 평안도가 있고, 함경북도가 있다.

"박물관 건립, 서울시 관심 없다..'기다려라' 한 지 벌써 1년"

□ '일본군 위안부 명예와 인권을 위한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 착공했는데 공사는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상황은 어떤가?

■ 죽겠다. 다른 나라에도 작은 박물관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인데, '박물관을 서울에 건립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까, 그것도 한국의 수도에'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모금을 2003년 12월부터 했는데 건립위를 발족한 것은 2004년 12월이다. 그래서 모금을 쭉 했는데, 현금으로는 13억 들어왔다. 약정서 포함하면 18억 원 정도 모금됐다. 그것 가지고는 택도 없다. 그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작은 건물 2층, 3층짜리 사가지고, 박물관 만들 수 있는 정도다. 우리가 제일 원하는 것은 차로 가는 거 말고, 애들이 전철로 가서 조금 걸어서 볼 수 있는 곳, 또는 버스를 타고 가서 볼 수 있는 곳을 원하는 것인데, 그러다 보니까 서울시 서대문구 독립공원이 된 것이다.

근데 서울시도 땅을 줘놓고 관심이 없다. 정말 관심이 없다. 아마도 '김빼기'작전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광복회.순국선열 유족들이 반대하고 있지만, 서울시가 의지만 있다면 우리한테 하게 할 수 있다. 건축허가까지 내주고. 건축허가까지는 일사천리로 일정에 따라서, 법에 따라 쭉 진행시켜 왔다. 근데 광복회 등이 반대한다고 해서, 거기 매점을 철거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기다려라, 기다려라'고 한 것이 벌써 1년이다. 아직도 기다려 달라고 한다.

그래서 막판에 안 되면 대정부, 대서울시, 여기 모금에 참여한 기업에 대한 우리 나름대로의 입장 발표하고 반대 운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모금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이 다 박물관 건립을 지지하는 것인데, 그 사람들과 함께 여기는 꼭 건립되어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일 수밖에 없다. 사실은 해외에서 봤을때도 창피한 일이다. NGO가 박물관을 건립하겠다고 아둥바둥하는데, 정부도 하나도 지원 안하고, 기업도 지원 안 할 수 있느냐. 한국의 교회들도 얼마나 부자인가. 그런데 기부도 안 하고 있다. 제일 돈이 없는 기장에서나 지금 도와주겠다고 하고 있는 중이다. 감리교, 이명박 대통령이 다니는 소망교회 이런 데는 도대체 역사 문제에 관심없고, 대통령 눈치만 보는데 급급한 상황이다. 지금 이런 상황이다.

근데 저는 이것은 반드시 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고 있고, 저도 기억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운동에 있어서, 활동에 있어서, 피해자들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그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평화운동, 인권운동, 해방운동이 전개되어 왔는지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나중에 연구를 위해서도 그렇고, 이런 피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이렇게 봤을때 박물관은 꼭 건립되어야 한다. 지금 2010년인데, 전환점을 만들어야 한다. 작년에 우리가 4억 5천만 원 정도 모금했다. 어떤 방식이었냐면, 1만 인이 십 만원을 내면 10억을 냈다는 것인데, 1만 명을 모집하는 운동을 했다. 그나마 그게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구나 하고 다가왔던 것 같다. 그래서 1만 명은 안 됐지만, 4억 원이 모였다. 올해도 열심히 1만 명 모집을 하면, 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함께 만드는 박물관 되고 있다"

▲ 윤 상임대표는 '일본군 위안부 명예와 인권을 위한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 건립이 중단된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 건립위원으로의 참여와 관심을 호소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사실은 정부가 돈을 안 내서 좋은 면이 뭐가 있냐면, 우리가 함께 만드는 박물관이 되고 있다. 이것은 정말 힘들고, 꾸역꾸역 나가고 있는 것이지만, 덕분에 우리가 함께 만드는 박물관이 되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기회를 정부가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박물관이 건축이 되고 내부에 만들때도 사람들이 많이 참석해서 페인트칠 한 번이라도 칠할 수 있는 기회가 돼서, '이게 지어질때 내가 참여했다'는 생각을 갖게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 박물관 건립에 가장 큰 문제점은 ?

■ 큰 문제는 돈이다. 사실은 광복회 등이 반대한다고 해도, 돈이 모금돼 있으면, 합법적으로 건축허가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건물을 지을 수 있다. 만약에 건물을 누가 무너뜨리면, 그 사람은 서울시의 건물을 훼손한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그 순간을 통해 건물은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내가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결단적인 행동을 못하는 것은 아직 모금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그것만 됐더라면, 착공식을 끝나고 우리가 무조건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국민이 더 참여해서 모금을 더 모아야 되는, '아직은 아닌가 보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의 지원이 필요한 것이구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행동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저는 그 행동을 통해 제재를 받게 된다면, 충분한 국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91년 김학순 할머니 증언, 우리 사회에 굉장한 파장"

□ 위안부 문제가 사회적으로 부각됐던 때는 언제였나?

■ 남북 일본 여성 토론회다. 그게 이 위안부 운동을 아시아에서도 중요한 이슈로 부각시켰던 것이 1991년 진행됐던 남북 일본 여성 토론회 '아시아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었다.

또 하나는, 거기에 불을 부었던 것은 91년 8월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었다. 피해자의 고백이었다. 이게 우리 사회에 굉장한 힘을 미쳤다. 사실은 저도 그 힘을 받은 사람 중에 하나다. '아사아 평화와 여성의 역할' 행사도 있었지만, 더 동기를 부여했던 것은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었다. 설마 생존자가 살아있을까 생각도 못했는데, 피해자가 직접 나타나서 증언을 하고, 그 증언을 들으면서 '이것은 가만둬서는 안 되겠다'는 동기를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것 같다.

□ 그 이후 국제적 변화도 나타났는데, 위안부 문제가 해결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있었던 때는?

■ 유엔의 개입이었다. 그게 한국 정부도 꿇어 안게 하는 계기가 됐다. 우리가 유엔에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했던 것은 92년 8월이었다. 92년 8월에 유엔 인권 소위원회에 직접 참석했다. 물론 그 전에 문건을 보내고 하는 일들은 있었지만, 직접 참석해서 피해자를 모시고 증언을 했던 것은 92년 8월이었다. 그것을 통해서 이 위안부 문제가 과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보스니아 여성에 대한 세르비아계 군인들의 집단학살, 집단강간이 있었다. 이것들을 통해서 과거가 아니다는 것이 들어나면서 여성들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면서 유엔에서 다뤄지기 시작했고, 94년에 유엔에서 여성폭력문제특별보고관이 임명되게 됐는데, 그것을 우리가 로비를 했다. 물망으로 떠오르는 사람을 잡아서 '우리가 아시아 여성과 함께 너를 밀겠다, 대신 당신이 되면 첫 사업으로 위안부 문제를 조사해달라'고 얘기를 했다. 그게 이 여성에게 먹혔다. 그 여성이 스리랑카 여성이었다. 우리가 스리랑카까지 갔다.

"유엔 여성폭력문제특별보고관 후보에 대한 로비가 먹혔다"

그래서 94년에 여성폭력문제특별보고관에 임명이 됐다. 그리고 95년에 위안부 문제 조사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한국 정부도 만나고 하니까, 정부도 준비도 해야 되는 상황이었고. 그리고 96년에 보고서가 채택되면서 권고가 나왔다.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하고 법적 배상해야 한다'는 권고가 보고서를 통해서 이뤄졌고, 보고서가 채택됐다. 물론 그 보고서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엄청 로비를 했다. 채택을 저지하려고. 결국엔 채택을 저지하려는 것이 일본이 완전 망신 떨게 생겼으니까, 거기다가 채택의 수준으로 낮출려고, 그냥 '어댑터'한다는 식으로 낮출려고 했다. 근데 결국엔 여성들이 이겼다. '적극 환영한다'는 내용으로 채택됐다. 보고서를 통해서 일본 정부에게 사죄와 배상을 권고하고, 올바른 역사교육을 권고하고, 동시에 한국정부에게도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야 된다고 얘기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정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엔에서 발언을 할 때도 '여성폭력문제특별보고관의 권고대로, 일본 정부는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직접 사죄하고 배상하는 얘기는 못하고, 권고내용이 있으니까, 권고대로 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 때부터 정부도 유엔에서 발언할때는 그런 발언을 한다. 일본하고 외교테이블에서는 작아지지만.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유엔에서 받으니까 거꾸로 한국에 압력을 줘서 한국 언론들도 대서특필하고, 한국 국민들도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지금도 얘기하는 것인데, 한국 정부를 압박하려면, 한국 정부를 변하게 해서는 뉴욕타임즈, 워싱턴 포스트에 기사가 실리게 해서, 한국 정부 외교가 망신을 떨게 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게 얼마나 코미디인가. 우리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역시도 주변 강대국의 여론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굴욕적인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힘이 그렇게 없는가, 우리 여론이 그렇게 약한가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안타깝다. 지금도 엠네스티에서 보고서를 내면, 좀 관심을 보이고, ILO(국제노동기구)에서 관심을 보이면, 한국 정부가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최근에는 하토야마 정부 들어서고 나서는, 적극적인 대응을 해야되겠다고 해서 외교부와 면담을 하고 하는데, 굉장히 수동적이다. 어떻게 해결해야 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좀 걱정되기는 하는데, 최근에 일본 시민단체로부터 받은 변화된 사실은, 일본에 있는 주일한국대사관에서 직원들 30여 명 모여놓고 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시민운동가를 초청해서 위안부 문제 관련서 일본 국회 내에서 입법 운동이 어떻게 되는가 하고 강의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이다. 그 일본 시민운동가는 저한테 자기도 놀랐다고 말했다. 그런 것을 보면, 하토야마 정부 들어서서는 한국 외교부가 앉아있다가 당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은 들기는 하는데, 잘 모르겠다. 가봐야 아는 것이다.

□ 2008년 10월, 유엔 인권이사회 보고서 발표했는데, 이것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인가?

■ 큰 부분이다. 더군다나 보고서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프랑스.인도네이사.아시아 나라 등지에서 일본정부의 인권 보고서를 심의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일본정부는 해야 된다는 굉장히 강력한 권고와 요구가 있었고, 그 후로 그것을 받아서 보고서를 채택된 것이 때문에 굉장히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일본이 그것을 큰 부분으로 받아들일느냐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유엔에서 일본이 부담하고 있는 경제적 비용은 엄청나다. 그러니까 일본이 자신이 있는 것이다. ILO 사무국 사람들 자체가 '혹시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피해자들의 요구를 들었을 경우 혹시 사무국 재정이 줄어들면 어떻게 하나'는 생각을 가질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크게 생각하지만, 일본은 크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본이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움직임에 대해서는. 그것 역시 겉으로는 대범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저지하고 로비하고 하는 게 않을까 생각한다. 항상 우리 보다 한발짝 앞서서 로비를 하고 있다.

"수요시위가 소풍의 장소가 됐구나"

□ 899차 동안 수요시위 진행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일들은?

■ 95년 815집회였을 것이다. 전여대협(전국여대생대표자협의회)이랑 대학생들이 시위에 참석한다고 해서, 우리는 굉장히 좋아했다. 그런데 경찰들이 긴장해서 모든 통로를 다 막았다. 할머니들은 이미 들어와있었고, 저도 못 들어가게 했다. 그래서 경찰들과 싸워서 저만 쏙 들여보내 준 것이다. 다른 사람들 아무도 안 보내주고. 할머니들하고 저하고 몇 사람만 있었다. 그냥 거기서 대성통곡을 했다. 할머니들을 만났는데, 그게 너무 화가 나니까 그렇게 울음이 나올 수 없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소리가 '엉엉' 내면서 울었다. 할머니들은 '왜 우냐, 너 울지 마라' 당신들 때문에 우는 줄 알고 할머니들은 할머니대로 난리가 나고, 그래서 그 때 집회를 두 군데서 했다. 대사관 앞에서 하고, 전경들이 막은 곳 앞에서 했다. 학생들은 결국 결합 못했다. 그게 최악의 기억이었다. (웃음)

좋았던 기억은 역시 학생들이 소풍을 온 것이다. 고등학생이었는데, 소풍을 다른 애들은 반별로 선택하게 해서 롯데월드.에버랜드에 갔다더라. 근데 자기들은 소풍을 수요시위로 왔다는 소감을 밝히면서 '역시 여기로 소풍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소중한 역사체험 현장이었다'고 애들이 얘기했는데, 그게 너무 감동이었다. '이게 소풍의 장소가 됐구나, 누구든지 일본대사관 앞을 도시락을 싸가지고 소풍을 오는 마음으로 와서 함께 역사를 배우고 평화와 인권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 운동은 승리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 그 얘기를 듣고, 우리 박물관도 역사라고 하면 어둡고 침울하고, 늘 싸움이 있고 이런 생각을 하지 않나. 근데 우리 박물관은 어두운 문제면 어두운 문제일수록 소풍을 여기로 와야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컨셉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 한 번 오고 마는 것이 아니라, 애들이 도시락 싸서 오고, 친구들과 데이트하러 오고, 선생님과 몇 사람이 공부하기 위해서 오고, 외국에서도 관광책자를 보고 오는 이런 공간을 만들면 그냥 내 생활과 함께 호흡하는 박물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한 계속 그 속에서 운동이 계속 될 것이다. 또 다른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전시가 이뤄지면서 사람들한테 전쟁이 왜 무서운지, 전쟁을 중단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 기억이 저한테도 미래를 세울 수 있는 계기를 줬던 것 같다.

지난 1월 6일 수요시위에서 전국공무원노조 지도부가 왔었다. 그때도 분위기가 감동적이었다. 지금 처음 참석한 것에 대해서 사죄한다며 할머니들에게 절하고, 앞으로 50만 서명운동도 열심히 하고, 박물관 1만인 건립위원을 위해서도 열심히 하겠다고 결의를 다져줬다.

한국 50만 명. 일본 120만 명 서명운동..오는 3월까지

□ 50만 서명운동은?

■ 일본하고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다. 일본은 일본 국민의 1%인 120만 명 서명운동, 한국은 한국 국민의 1% 50만 명 서명운동을 진행한다. 내용은 다르다. 일본은 일본 국민으로서 가해국의 국민으로서의 내용을 담고 있고, 우리는 피해국으로서 일본이 당연히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내용의 핵심은 똑같다. 일본 정부가 빨리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하기 위한 입법을 제정하라는 것이다. 시기도 3월까지 똑같다. 왜냐하면 일본이 지금 정기국회를 하고 있는데, 1월부터 3월까지 예산을 심의한다. 그리고 4월, 5월 두 달 동안 다른 문제들을 논의할 수 있다. 그 때 논의를 되게 하고, 하반기때 정기국회에서 또 그것을 진전시켜서 논의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는 이게 뭔가 되야 하기 때문에 3월까지 서명운동을 하고, 4월 일본 도쿄에서 큰 집회가 있는데 그 때 전달해서, 일본에서 일본 정부에 전달하고 국회의원에게도 전달한다. 동시에 우리는 한국 정부에게도 요구하는 것이 있다. 일본 정부에게 입법을 제정하도록 촉구하라는 내용을 우리 국민들의 1% 목소리로 하는 것이다. 동시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한국의 국회의원들에게 서명을 받을 것이다. 물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민주당은 걱정을 많이 안 한다. 한나라당 의원들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분들도 있다. 그 분들도 참여할 수 있게끔, 서명지를 일일이 직접 개인 의원들에게 보내서 서명을 받고 모이면 일본 정부에게 한국 국회의원들의 요구로 해서 우리가 대신 전달하려고 하고 있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 해 온지 20여 년, 그가 갖고 있는 최근 고민에서 오랜 연륜이 묻어나기도 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위안부 문제 해결 활동을 오랜 동안해 오면서 가장 힘든 부분은?

■ 개인적으로 사적인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건강을 좀 돌보고 싶은데, 그 시간을 가질 수 없을만큼 일들이 터진다. 이게 과거의 문제다보니까,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일들이면, 여론화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인데, 과거 문제이기 때문에 사업을 계속 만들어내지 않으면 묻히고 이게 거론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까 집에 가서도 가족들하고도 제대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참 부족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각자 흩어지고, 딸은 딸대로 살고, 부부는 부부대로 살고 해서 개인적으로 해야될 의무들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게 가장 힘든 부분이다. 앞으로 3년 후면 50살이다. 뒤도 돌아보게 되고 그러는데, 참 후회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을 한다. 매순간 소모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다. 그런데도 개인적인 시간이 부족하다는 부분이 참 힘든 부분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적으로 힘들다기보다, 우리가 운동을 하면서 제가 요즘 고민이 든다.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수 있는 운동의 방식이 무엇일까. 사실은 앞만 보면서 질주해왔다. 그러다보니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단체들이 있는데, 같이 호흡하다보면 앞에 있는 일들을 치고 나가기 어렵다. 정대협과 국제 여성들과 일본 여성들과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일들을 중심으로 만들어 왔는데, 올해 2010년 국치 100년을 두고 내부의 부끄러움이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변해야 하는데, 그 변하는 분위기 중에 하나는, 좀 안타까운데 서로 힘들게 운동하는 사람들끼리 칭찬하고 격려하는 분위기가 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입을 열면 남을 칭찬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올해 제 작은 소망이다. 그래서 남들이 비록 우리의 운동에 대해서 '잘난 척 한다, 너무 앞서간다'고 할지라고, 우리는 그 사람들을 칭찬을 하자, 격려를 하자, 기분나빠하지 말자는 얘기를 같이 나누고 있다. 통일운동하는 사람도 생각도 다르고 색깔이 다르더라도, 그래도 통일로 가는 목표가 같다면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면서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통일이 될 수 있다. 우리 스스로가 색깔이 약간 다르다고 쪼개져 버린다면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고, 민주화하고 우리가 단합할 수 있겠나. 조금 다르면 내가 먼저 노력해서 쌍방이 함께 노력할 수 있도록 분위기 만들고 끊임없이 대화하면 좁혀지지 않겠나. 그래서 함께 하는 운동, 함께 만들어 가는 통일, 함께 만들어 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함께 만들어가는 박물관, 함께 만드는 행복을 만들고 싶다.

"입법적이고 행정적인 조치가 해결의 실마리"

□ 위안부 문제가 어떻게 하면 해결될 수 있을까? 제도적 부분도 있을 것이고, 다른 부분도 있을 것인데?

■ 입법적이고 행정적인 조치가 가장 해결의 실마리라고 생각한다. 지금 서명운동에 담고 있는 핵심, 일본 정부에서 법을 만들어서 일본 국회를 통과해서 법이 제정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다. 그 법이 제정된 이후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정적인 조치를 한국 정부와 외교테이블에 놓고 진행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한국 정부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다가 일본에서 제시하는대로 그대로 받다가는 안 되는 것이니까. 한국 정부가 제대로 된 안을 만들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노력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한국의 국회의원들의 활동도 필요하고, 시민운동 진영의 활동도 필요하다. 그래서 4자,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 일본의 시민들과 한국의 시민들이 같이 되면서 입법과 행정이 같이 아울러지는 위안부 문제 해결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정말 한 발자국만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 한 발자국 나가는 것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보수여론을 누를 수 있는 우리의 여론이 커야"

□ 일본의 경우에도 새 정권이 들어섰다. 위안부 문제 해결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 정부 분위기는 바뀌었는데, 역시 보수적인 분위기가 많기 때문에, 보수적인 분위기를 누를 수 있는 우리의 여론이 커야 된다. 그 여론은 일본도 우리와 비슷해서 국제적인 힘을 더 많이 받는다. 국제적인 압력을 더 받는 것이다. 주일미군 기지도 다른 곳을 하겠다고 해서 미국과 이상한 기운이 흐르고 있지만, 역시 미국의 압력 무시 못하고, 유엔 무대의 국제적인 압력도 무시하지 못 한다. 그런 여론을 통해서 일본에게 압력을 가해야 한다. 그런 여론을 우리가 만드는 것이 올해 운동의 목표다.

□ 마지막으로, 한일 당국과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 1000차 수요시위 안 할 수 있게끔 해달라. 2010년 8월 29일 국치일인데, 그때까지는 아니더라도, 2010년을 마무리할 때는 정말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올 한해 사적인 시간들을 조금만 줄여서 노력했으면 좋겠다. 특히 국민들 같은 경우에,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만약에 우리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로 갔으면 저는 못 태어났을 것이다' 그건 바로 역사에 대한 책임이 '나는 그런 역사 위에 토대를 두고 서 있는 것이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이 역사에 대해 내가 책임이 있는 것인데, 그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할 것인가. 그것은 박물관 건립에 참여하는 것으로, 일본 정부에게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것으로, 한국 정부와 자기가 사는 지역 국회의원에게 이 문제 해결 요구하는 것으로, 각자 삶의 부문에 따라서, 삶의 영역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다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 문제다'는 생각을 가지고, 정부는 정부대로,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함께 참여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을 함께 못할때는 후원으로 해주셨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덜 파괴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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