Ⅹ. 버마사고조사보고서 검토

1. 사고조사 의무국으로서의 버마


1-1. 버마는 ICAO가맹국으로서 당시 사고해역의 관할국가로 사고조사보고서 제출 의무국이었음.

▲ 버마는 KAL858기 사건 사고조사보고 의무국이었음 - 공판기록 참고인신문조서 [사진 - 서현우]

1-2. 당시 버마가 ICAO(국제민간항공기구)에 ‘KAL858기 사고조사보고서’(이하 버마보고서)를 제출한 때는 1988.3.17임,

▲ ICAO 제출 ‘버마보고서’ 표지 부문
[사진 - 서현우]

▷ 정기노선 취항 여객기사고에 대한 사고조사보고서로선 상당히 빠른 시기임.

▲ ‘버마보고서’ 작성 시기 - 표지 아래 부분
[사진 - 서현우]


2. 버마보고서의 치명적 문제점

2-1. 버마보고서는 자신들의 독자적 조사 및 판단 의무를 방기하고, 일부 항공기 운항시간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조사내용과 결론을 한국당국의 수사발표에 전적으로 의존한 결과임을 드러내고 있음.

2-2. 1987.12.13 당시 버마 관할구역에서 수거된 구명보트에 대한 정밀한 과학적 감정의 1차적 책임이 관할국 당국에 있었으나, 버마당국은 이를 회피하고 한국당국에 인도함.

▷ 버마 당국은 수거된 구명보트가 한국 측에 의해 KAL858기 장비품인 것만을 확인하곤 수거 3일 만에 한국당국에 인도해버림. (12.13수거, 12.16인도, 12.17서울도착)

▲ 구명보트 서울 도착 관련 기사 - 조선일보 [사진 - 서현우]

▷ 버마보고서 상의 구명보트(수거위치 N14.51, E97.16)에 대한 기재내용을 보면 “구명보트의 손상은 한국당국의 감정결과에 의하면 폭발에 의한 것으로 판명되었음”이라 기재하여 독자적인 감정을 거치지 않고 한국당국에 의존했음을 사실대로 기술함. (버마보고서1-12항목, 수사기록4140, 4185쪽)

▷ 구명보트는 한국국과수의 감정 결과 “압축과 마모에 의한 변형으로 폭발흔적이 없다”는 것으로 결론지었으나, 당시 안기부는 이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폭발에 의한 것으로 발표함. (Ⅷ.안기부 수사의 문제점4-1참조)

▷ 버마보고서의 구명보트 관련 내용은 한국 안기부의 견해를 충실히 반영하여 한국국과수의 실제 감정결과와 상반되게 기술함.

▲ 구명보트에 대한 감정은 한국당국에 의존했음이라 기재함 - 버마보고서1-12항
[사진 - 서현우]

2-3. ‘버마보고서’가 내린 ‘폭발에 의한 추락’이란 조사결론의 근거도 전적으로 한국당국에 의존함.

▷ 구체적으로 버마보고서엔 “한국당국에서 행한 증언에서 하치야 마유미는 … (콘포지션4 내장) 라디오와 함께 액체폭발물(PLX)이 담긴 술병을 들고 탑승하여 …”와, “한국당국에서 행한 콘포지션4 폭발물에 대한 실험실 폭발실험 결과 폭발력은 TNT의 1.34배에 해당하였으며” 등으로 기재됨. (버마보고서2-3,2-4항, 수사기록4142, 4186~4188쪽)

▲ 콘포지션4의 존재를 독자적으로 확인하지 못했으면서도 한국당국의 실험결과를 인용함
- 버마보고서2-4항 [사진 - 서현우]

▷ 버마보고서는 최종적으로 “사고원인은 승객으로 가장한 2명의 공작원이 기내에 두고 내린 시한폭탄이 비행 중 폭발한 것에 기인함”과 “항공기는 폭발물의 폭발에 의해 파괴되었음”이라고 결론을 내림. (버마보고서3-1의10,3-2항, 수사기록4143,4188쪽)

▷ 버마보고서가 언급한 폭발물 콘포지션4와 액체폭발물 PLX는 국정원과 국정원종합보고서에서조차 임의․추정하여 발표한 것임을 시인하였는데, 버마보고서에서는 당시 안기부 발표내용과 동일하게 마치 확인된 사실인양 기재됨.


3. 자체 감정 시도조차 없이 한국에 인도해버린 또 다른 증거물

3-1. 버마보고서의 마지막에 첨부된 항공기 의자쿠션(받침대) 등 2장의 사진에 나타난 증거물은 1988.1월 상순, 코코 섬과 나콘담 섬 인근 해역에서 수거된 것인데, 이 증거물에 대해선 사진 첨부 외에 어떤 설명도 없음.

▷ 당시 구명보트 외에 버마에 의해 수거되어 법정증거물로 채택된 것은 총6종으로, 당시 언론보도와 ‘교통부 수색보고서’에 의하면 수거된 장소가 모두 당시 미국 해군기와 버마 공군기의 목격보고가 잇따른 N13~14, E97 선상으로 코코 섬과 나콘담 섬 인근 지역이나, 버마보고서엔 이 증거물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이 거저 수거장소의 경위도만 기재된 2종의 사진만을 첨부해 놓음. (Ⅷ.안기부 수사의 문제점5-1참조, 수사기록4172쪽)

▷ 앞장에서 확인한 바, 위 6종의 증거물이 수거된 지역에서의 앞서의 미국 해군기와 버마 공군기의 목격보고는 1987.12.10과 12.12에 총6차례였음. 그럼에도 버마보고서는 이를 묵살하는가 하면 심지어 같은 지역에서 실제 수거된 위 증거물에 대해서 아무런 분석과 설명이 없는 반면에, 이 지역과 330여km 떨어진 거리에서 단 1차례 수거된 구명보트만 부각시킴.


4. 목격자의 제보에 의존한 추락지점 판정

4-1. 버마보고서엔 항공기 추락지점이 N14.33. E97.23.라고 판정하고 있는데, 이는 오직 이 지역에서의 구명보트 수거와 어부의 목격담에 근거한 것임. (수사기록4185쪽)

▲ 어부의 목격담에 의존하여 추락지점 추정 - 국정원종합보고서 [사진 - 서현우]

▷ 이 지역은 수심 수십m의 대륙붕으로 수색결과 구명보트(내장품 포함) 외의 더 이상의 잔해 목격이나 수거는 없었음.

▷ 당시 안기부는 버마보고서와 달리 추락지점을 N14.45, E95.38이라 발표했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지, 또 버마보고서와 왜 차이가 나는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 된 해명이 없음.

▷ 항공기 사고 수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인 사고 직후의 시간을 허비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수색을 망치게 된 원인이 허위제보들에 있었음에도, 버마보고서는 사고지점 추정을 목격자 제보에 의존하고 있음.


5. 확인할 수 없는 교신일지

5-1. 버마보고서엔 가장 중요한 최종교신 지점을 URDIS라 기술하면서도 당시 랭군관제소의 교신 관련 자료는 첨부하지 않음.

▷ 최종교신지점은 항공기사고수습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함. 앞장에서 확인한 바, 1987.11.30자, 12.5자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버마의 랭군관제당국에 직접 문의한 결과를 토대로, 최종교신 지점이 URDIS가 아니라, URDIS 이전의 교신포인트인 TOLIS라 보도함. (Ⅶ.최종교신 지점과 수색과정의 미스터리1-2참조)

▷ 또 일본의 저널리스트 노다 미네오는 ‘파괴공작’에서 태국관할지역 내의 교신을 책임지고 있는 방콕의 라디오국에 대한 현지 취재를 통해 “KE858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TANEK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자, 랭군은 TOLIS에서는 교신했지만 그들은 URDIS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라는 라디오국과 랭군관제소의 당시 통화내용을 확인함. (Ⅶ.최종교신 지점과 수색과정의 미스터리1-2참조, ‘파괴공작’178쪽)

▷ URDIS를 통과하지 않았음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정황 증거는 TOLIS와 URDIS 사이의 사내교신 포인트인 MAROB와 GUMAN 두 곳 모두에서 교신이 없었다는 교통부 사고조사보고서의 내용임.

▲ URDIS 이전의 사내교신 포인트에선 교신이 없었음 - 교통부 사고조사보고서
[사진 - 서현우]

▷ 1988.12.10 수색지원을 위해 현지출장 중이던 홍순영 당시 외무부 차관보는 “KAL858기는 태국 레이더망에 들어오지 않았다. 즉 태국 비행구역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얘기이다”라고 발언함. (Ⅶ.최종교신 지점과 수색과정의 미스터리1-2참조, MBC뉴스데스크1987.12.10자)

‘● 앵커: KAL기 잔해 수색을 위해서 태국에 갔던 정부특별조사반장인 홍순영 외무부 2차관보가 오늘 저녁 귀국해서 공항에서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 홍순영(외무부 2차관보): 수색이 왜 이렇게 어려워지냐 할 것 같으면 비행기가 태국의 레이더망에는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태국 비행구역 안에는 안 들어왔다는 얘기지요. 버마에서는 그 시간에는 레이더가 작동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
(강성구 앵커) MBC뉴스데스크 1987.12.10자’

▷ 버마보고서와 당시 안기부가 지정한 추락지점(이 두 지점은 차이가 있음)은 태국 레이더망 내에 위치함. (’파괴공작‘180, 182쪽)

▲ 버마보고서와 안기부가 각기 다르게 발표한 추락지점은 모두 태국 레이더망 관할 지역이나 태국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음 - ‘파괴공작’ [사진 - 서현우]

▷ 사정이 이러하므로 버마보고서가 교신자료를 첨부하지 않은 문제는 매우 중요함.

▲ 태국 항공교통의 총괄 관리자(general manager)의 인터뷰 내용 - ‘파괴공작’ [사진 - 서현우]


6. 미국에서의 항공기 정비기록이 누락됨

6-1. 버마보고서는 항공기 정비기록 내역에 사고 직전의 미국 TRACOR사에서 행한 수리사실을 미 기재함. (버마보고서1-6항 참조)

▷ KAL858기는 1975년의 첫 동체착륙에 이어, 사건 3개월 전 제주-김포 간을 운항하던 중 1987.9.2 김포 공항에 또 다시 동체착륙 하는 사고를 당했음.

▷ KAL858기는 사고 후 국내에서 1차 수리를 거쳐 10.12~11.8 사이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 소재 TRACOR사에서 비행기 가격의 1/4에 해당하는 거액을 들여 엔진에 소음기를 부착하는 등 수리 및 개조 작업을 하였음. (교통부 사고조사보고서, MBC뉴스데스크1987.12.30)

▷ 위 미국에서의 수리․개조 후 첫 취항에서 사고를 당함.

▲ 사고 직전 미국에서 수리 개조 작업 함 - 교통부 사고조사보고서 [사진 - 서현우]


7. 한국당국이 관여한 버마보고서 작성

7-1. 버마보고서 검토에서 전제되어야 할 점은 버마보고서 작성에 한국당국이 관여한 점임.

▷ 관여의 증거는 버마 주재 한국대사관에 발송한 날짜미상 한국당국의 대외비 공문임. (수사기록 4219~4220쪽)

▲ 버마 주재 한국대사관에 발송한 한국당국의 대외비 공문 내용
[사진 - 서현우]

▷ 위 공문은 ‘버마 측 조사에 협조할 관계관 파견’에 대한 것으로, 핵심내용은 ‘활동계획’ 부문의 다음과 같은 내용임.
1. 버마 KAL기 사고조사위원회에 협조 (증언).
2. 아국(한국) 조사자료 제공 및 설명.
3. 수거 잔해물에 대한 1차 조사 결과 설명.
4. ICAO 제출 사고조사보고서 작성에 대한 자문.


8. (참고) 버마당국은 한국기자의 버마입국을 거부함

8-1. 무슨 이유에서인지 당시 버마당국은 한국기자의 버마입국을 거부함. (교통부 수색관련보고서)

▲ 버마정부 한국기자단 입국거부 - 교통부 수색관련 보고서 [사진 - 서현우]

▷ 국제사회의 지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피해당사국 언론의 자유로운 취재조차 가로막은 채 사건처리 과정을 폐쇄적으로 통제함.


9. (참고) 밀월 관계였던 당시 한국과 버마

9-1. 당시 한국과 버마관계는 양국 관계사에서 최고조의 밀월 관계였음.

▷ 사건 6개월여 전인 1987.6.8~6.12 당시 버마의 유산유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6.10의 민정당 대통령후보 선출 전당대회, 또 6․10항쟁이란 긴박한 정국 속에서 국가원수 방문으론 드물게 4박5일간이나 체류함. (경향신문1987.6.9자 1면)

▷ 인상적인 점은 유산유 대통령의 방한에 이용한 항공기는 한국 측이 제공한 KAL특별기란 점이며, 당시 3세계 지원에 매우 인색하던 우리 정부가 이례적으로 막대한 유․무상 경협차관을 버마에 제공하기로 약속한 점임. (MBC뉴스데스크 1987.6.8, 조선일보 1987.6.13자)

▷ 당시 한국-버마간 정상회담은 뉴욕타임즈의 ‘가상 한반도 시나리오’를 동아일보가 게재한 후 일주일 만에 개최된 것임.

▲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6.10대회와 함께 나란히 1면을 장식한 유산유 당시 버마 대통령과의 양국 정상회담 관련 보도 [사진 - 서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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