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27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범민련) 쪽이 낸 통신비밀보호법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을 전격 수용했다. 국가보안법 사건과 관련해 수사기관들의 기존 수사 관행이 위헌 소지가 있다는 문제 제기라는 점에서 함의가 크고 앞으로의 재판에 미칠 영향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5형사부(부장판사 윤경)는 "이 사건 법률조항은 헌법 제37조 제2항에서 정한 과잉금지 원칙에 반하여 피고인들의 통신의 비밀 및 사생활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하여 헌법에 위배한다는 상당한 의심을 갖게 한다"며 지난 3일, 변호인단이 제출한 위헌심판제청신청을 받아들이고, 구속된 피고인 이규재.이경원.최은아 등에 대한 보석을 허가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통신비밀보호법에 의한 통신제한조치의 대상 범죄가 100여 개가 넘는 등 적용범위가 광범위한 점 △통신제한조치가 검찰에 의해 일정한 기간제한 등이 이뤄져야 함에도 경찰 등에 의해 장기간, 무제한적으로 허용됨으로써 외국의 입법례에 비추어 과잉된 점 △연장허가는 재청구와 달리 추가이유 등을 요구하지 않는 등 절차상 간이한 점 등에 비춰 헌법상 사생활의 자유, 통신의 자유의 본질적 부분을 침해할 수 있다며 이같이 판단했다.

보안법 사건에서 위헌심판제청 수용, 이례적
각계 "초법적 수사에 경종 울린 역사적 사건" 환영

▲ 27일 법원이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가 낸 통신비밀보호법 위헌심판제청 신청을 전격 수용했다. 이날 오후, 서울구치소 앞에서 석방자들을 맞는 환영식이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통신비밀보호법과 관련해 위헌심판제청 신청이 받아들여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국가보안법 재판에서 위헌심판제청 신청을 하는 경우도 드문 일이지만, 재판부가 이를 수용하고 재판을 중단시키고 피고인들을 보석 석방한 사례는 매우 이례적이다.

수십 년간 국가보안법 재판을 지켜본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해 위헌심판제청이 받아들여지고 구속자들이 석방되는 것을 처음 봤다"며 "아주 획기적인 사건, 사변"이라고 했다.

권 회장은 이어 "자주통일운동에 대한 사찰에 제동이 걸린 것"이라며 "국가보안법뿐만 아니라 모든 공안사건과 관련해 엄청난 영향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변호인단의 일원인 장경욱 변호사는 "법원의 이번 결정은 수사기관이 더 이상 감시가 아닌 정보 수집을 하라는 것"이라며 "반인권적, 초법적 행위에 경종을 울리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국정원 등 무제한 감청, 이경원 사무처장이 문제제기
국회 통비법 개정에도 제한조치 마련 등 목소리 높아질 듯

▲ 국정원 등은 이경원 사무처장에 대해 대상 변경 및 기간 연장등으로 6년간 감청을 해 왔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통비법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은 국정원 등에 의해 무려 6년간, 전화.팩스.인터넷회선 등 전방위적인 감청을 받아온 이경원 사무처장의 문제 제기에서 비롯됐다.

이 사무처장은 "전직 사무처장의 경우에도 전화.팩스 등의 감청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재판 과정에서 비로소 확인하게 됐다"며 "이 부분이 상당한 인권침해라는 생각이 들어서 통비법 관련 조문과 자료 등을 보내달라고 해서 (구치소) 안에서 꼼꼼히 살펴봤다"고 말했다.

조영선 변호사는 27일 법원의 결정이 난 후에 "변호인단도 그동안의 관성에 젖어 크게 놓치고 지나갔던 부분"이라며 "솔직히 처음에 이 사무처장이 제기했을 때도 이 부분이 받아들여질까 반신반의했었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그동안 암암리에 국정원 등 수사기관이 감청을 하고 있다며 우려를 쏟아냈지만, 이에 대한 법적 문제제기나 대응은 하지 못했다. 수사기관이 감청 사실을 피감청자에게 통보할 의무가 있음에도, 통보하지 않으면 감청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와 범민련의 경우처럼, 재판 진행 과정에서 재판부로부터 감청 사실을 통보받게 되는 일이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사기관의 과잉 감청에 대한 법적 대응은 재판의 주요 혐의 싸움 속에서 슬그머니 가장자리로 빠지게 된 부분이 크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2개월씩 무려 14회에 걸쳐 기간 연장을 하며 감청을 해 왔던 국정원의 초법적 수사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증거수집 방식으로서의 감청이 아닌 일상적 감시를 위한 감청이었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이와 관련,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통비법 개정과 관련해서 수사기관의 무제한적인 감청 행태를 제한할 수 있는 근본적인 조치들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층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위헌 여부 결정 때까지 재판 무기한 중단.."1년 이상 걸릴 듯"
지난해 야간 옥외집회 금지 위헌 결정도 11개월 소요

위헌법률심판은 법원이 당사자의 신청 또는 직권으로 위헌제청결정을 하고 대법원을 거쳐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결정서 정본이 송부되면, 헌법재판소는 이를 접수해 심판절차를 진행한다.

법원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때에는 당해 소송사건의 재판은 헌법재판소의 위헌 여부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정지된다. 최종 결정이 나기까지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보통 1년 가까이 되는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여 범민련 재판도 무기한 중단될 전망이다.

지난해 10월,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한 집시법 제10조와 제23조1호의 위헌 여부를 심판해달라는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에 대한 위헌 결정도 11개월이 지난, 올해 9월 말에 그 결과가 나왔다.

조영선 변호사는 "재판기일이 언제 열릴지는 모른다. 위헌결정이 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며 "1년 이상은 기다려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안이 간단하기 때문에 오히려 빠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1년 정도는 걸리지 않겠나 보고 있다"고 말했다.

법원 "위헌 여부에 따라 증거 채택 및 유.무죄 결론 달라질 수 있어"

일반적으로 위헌법률심판의 제청은 심판대상이 된 법률조항이 헌법에 위배되는 여부가 관련 사건에서 재판의 전제가 되는 경우에 한한다. 다시 말해서, 범민련 재판에서 통신제한조치에 대한 위헌 여부는 재판의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통신제한조치 등 법률조항을 근거로 수집된 증거자료들은 이 사건의 당시의 피고인들의 활동, 행적, 성향, 이 사건 공소사실에 기재된 북한공작원과의 접촉 내용 등을 뒷받침하는 중요 증거라고 보인다"며 "이 사건 법률조항의 위헌 여부에 따라 연장허가된 통신제한조치에 대한 근거 법률의 효력이 상실될 수도 있어..법원이 위 자료들을 증거로 채택할지 여부에 대한 결론에 영향을 주고 그 결과 이 사건의 유.무죄의 결론 역시 달라질 수 있으므로, 이 사건 법률조항의 위헌 여부는 이 사건 재판의 전제가 된다"고 밝혔다.

범민련 재판에서 검찰의 주요 공소사실은 '잠입.탈출'과 '회합.통신'인데, 법원은 연장허가된 통신제한조치에 의해 수집된 증거자료가 이 혐의를 입증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나게 된다면, 통신제한조치에 따라 수집된 자료는 효력을 잃게 돼 증거로 채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영선 "위헌 결정 나면, 재판 양상 크게 달라져"
이경원 "검찰, 주요 혐의 입증하는 데 위헌 결정 크게 영향 안 미친다는 생각"
"범민련 합법적 활동 입증하는 데 중점 둘 것"

▲ 통신제한조치에 따른 위헌 결정 여부에 따라 범민련 재판의 향배도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27일, 7개월 만에 풀려난 이경원.이규재.최은아.(왼쪽부터)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이에 따라 범민련 재판의 향배도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위헌 결정이 재판의 적지 않은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조영선 변호사는 "위헌 결정이 난다면, 주요 혐의에 대한 증거자료들이 무효가 되고 이에 따라 재판의 양상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며 "최선의 경우에는 무죄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고 기대했다.

권오헌 명예회장은 "위헌 결정이 난다면, 검찰이 공소사실을 재구성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며 "범민련의 이적성과 관련한 부분으로 재판의 초점이 맞춰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예상했다.

이경원 사무처장도 앞으로 통신제한조치와 관련한 위헌 여부를 떠나서 범민련 활동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권 회장의 전망에 맥락을 같이 하면서도, 위헌 결정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이 사무처장은 "통비법 위헌 여부는 재판에 크게 적용이 안 될 수 있다. 일부분에 불과할 것으로 보인다"며 증거자료가 효력이 상실된다고 할지라도 재판의 판결이 크게 좌우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봤다.

그는 "검찰은 '회합.통신'과 같은 혐의에 대한 증거자료는 남북 공동결의문 등 같은 것인데, 이는 홈페이지 등에 공개적으로 나와 있기 때문에 주요 혐의를 입증하는 데는 통신제한조치 위헌 결정이 나더라도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라며 "또한 공소장에 나와있는 '잠입.탈출'과 관련된 자료는 이메일 압수수색을 통해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위헌 여부가 상관이 없다는 입장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회합.통신'에서 북측 사람들과 만나서 들은 얘기는 모두 다 지령 수수라고 한다면, 우리 쪽이 얘기했던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라며 "이 모든 것이 당시 회의록에 나와 있고, 범민련의 활동이 남북 당국의 허가를 받은 합법적인 교류라는 측면을 입증하는 데 보다 중점을 둘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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