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해냈습니다.”

윤경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이 까만 표지의 두터운 『친일인명사전』을 번쩍 들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일제히 “와!” 하는 환호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백범 김구 선생 묘소 앞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를 열고 『친일인명사전』을 공개하는 순간입니다. 이날 백범 묘소 앞 국민보고대회 분위기는 감격과 흥분의 연속이었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애초 대회는 이날 오후 2시, 숙명여대 숙명아트센터에서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수단체와 충돌을 우려한 아트센터 측이 장소 대관을 취소하고 또한 경찰병력이 학교 정문을 막자 근처에 있는 백범묘지 앞으로 장소를 옮겨 야외에서 행사를 진행한 것입니다. 숙대 정문에는 경찰병력 주위로 보수단체 회원들이 삼삼오오 눈에 띄었으나 ‘친일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 앞에 다소 주눅이 들어 보였습니다. 대회에 나온 민족단체 회원들은 “차라리 민족주의자 백범 선생 묘소에서 대회를 치르는 게 더 잘됐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은 일제 강점기에 친일 행위를 한 한국인의 목록을 정리한 총 3권, 3천 페이지에 달하는 사전입니다. 여기에는 일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인물 4천389명의 행적이 기록돼 있습니다. 결국 사전은 해방 직후 친일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와해된 지 60년 만에 그리고 편찬위가 발간 작업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완성됐습니다. 이 사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장면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김성수 전 부통령, 현상윤 고려대 초대 총장, 언론인 장지연, 음악가 안익태ㆍ홍난파, 소설가 김동인, 시인 서정주, 무용가 최승희 등 유력인사들이 수록돼 있습니다.

지난 세기에 청산되었어야 할 일제식민지 잔재가 세기를 달리해 지금 기록으로나마 정리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민간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의 말대로 세계 어디서도 역사적 과제를 시민들이 힘을 모아 맞선 적은 없었습니다. 이 자체만으로도 우리 국민은 긍지를 가질 만합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친일문제’와 같은 민족문제는 국가 차원에서 다뤄져야 합니다. 이 나라 민간은 ‘통일문제’처럼 ‘친일문제’도 정부가 할 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번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계기로 해서 이 나라 지배층이 ‘민족적으로’ 각성하고 또 정부도 ‘민족문제’에 적극 대처해 나가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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