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다. 그러기에 ‘이후락’ 하면 왠지 습지의 음습한 냄새가 난다. ‘박정희의 심복’, ‘유신시대의 풍운아’, ‘권력의 화신’, ‘정권의 2인자’, ‘공작정치의 대명사’, ‘DJ 납치사건의 주범’, ‘부정부패 원흉’ 등 달갑지 않은 평판을 얻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1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 이 전 부장에게 “나는 박정희 후보에게 진 것이 아니라 이 부장에게 졌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1980년 신군부로부터 부정축재자로 몰리자 당시 재산과 관련해 “떡(정치자금)을 만지다보면 떡고물(부스러기 돈)이 묻는 것 아니냐”고 해명해, ‘떡고물’이란 말이 장안의 유행어가 된 것은 아직도 눈에 선하고 귀에 쟁쟁하다.
그러나 그에게 다른 면이 하나 있다.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던 1972년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명을 받고 밀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대한민국 제1세대 대북 밀사’였던 셈이다. 그는 3박4일간의 방북기간 중 당시 김일성 수상을 두 차례 만나 북측과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7.4남북공동성명의 기본 원칙에 합의했다. 이어 북측의 박성철 제2부수상이 서울을 답방해 박 전 대통령과 수차례 회담을 가졌다. 그 결과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그가 “제가 박 대통령 각하의 뜻을 받들어 평양에 갔다 왔습니다.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회담이 있었습니다”며 기자회견을 하자 전국의 국민들은 흥분의 도가니로 빠졌다. 6.25한국전쟁이 끝난지 20년도 안 된 세월이었다.
그는 인생의 영욕을 두루 겪으면서 주요하게는 ‘권력무상’과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그렇다고 그를 단순히 ‘잊힐 사람’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도 현 정부의 통일ㆍ안보 관련 인사들이 배울 게 있다. 이후락은 남파간첩을 잡는 책임자였지만 남북대화를 위해서는 자살용 청산가리 캡슐을 몸에 감추고 판문점을 넘는 대범함을 보여주었다. 적어도 왼손이 할 일과 오른손이 할 일을 가릴 줄은 알았던 것이다. 아쉬운 건 말년에 경기 하남시에 있는 별장에 칩거하면서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것이다. 권력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겠지만 7.4공동성명의 비화까지 털어놓지 않은 건 아까운 일이다. 그가 무덤 속에서라도 덧없는 권력의 달콤함에 아쉬워하기보다는 7.4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 현 정부에서 지지부진함을 안타까워했으면 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후락은 재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글은 통일뉴스의 추태다.
수개월후의 유신체제를 앞두고 행한 이후락의 연극과, 시대환경이 불러 온 7.4성명은 서로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