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아'자도 싫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에 가족 모두가 힘들게 살았습니다."

1968년 '통일혁명당'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대공분실로 연행돼 조사를 받고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는 반국가단체를 조직했다는 혐의로, 이듬해 11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권재혁(당시 44)씨의 아들 병덕(59)씨는 지난 12일 이 사건이 진실화해위원회가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발표를 하자, 40년 동안의 회한을 쏟아내며 울먹였다.

병덕 씨는 <통일뉴스>와 전화인터뷰에서 "당시 아버님에 대한 피해의식이 너무 컸다. 어린 마음에 원망스럽고, 충격이 컸다"면서 "이제라도 진실이 밝혀진 것에 대해 너무나 감개무량하고, 40년 동안 누명을 뒤집어쓰고 살았는데, 이렇게 진실을 발표해줘서 너무나 고마울 따름"이라고 심정을 밝혔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병덕 씨는 권재혁 씨의 사망 소식을 듣고, '빨갱이 자식'이라는 낙인 때문에 졸업을 2달 남기고 학교도 그만뒀다. 그를 딱하게 여긴 담임선생님이 나중에 졸업장을 받아주기도 했다.

▲ 지난 1965년 5월 ‘한국경제문제연구회’ 주최로 열린 ‘수산업 근대화를 위한 세미나’에서 권재혁(당시 40·오른쪽) 씨가 토론자로 참여해 발표하고 있다. 권씨는 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주모자로 구속돼 1969년 11월 사형을 당했다. [사진제공-진실화해위원회]

아버지가 묻힌 모란공원 앞에 혼자 찾아가 운 날도 많았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사회에 대한 분노 속에서 한동안 방황을 거듭하던 그는 우울증까지 생겨서, 자살도 여러 번 기도했다. 아버지가 죽은 지 1년째 되는 날, 병덕 씨는 연탄가스를 마시고 자살을 기도했다.

정신이 든 곳은 병원이었고, 희미한 불빛 너머로 병실을 찾은 작은어머니의 꾸지람이 들려왔다.

"쓸데없이 죽으려고 그러냐, 어머니도 살려고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네가 못된 짓을 하면 되겠느냐."

병덕 씨는 그 후로부터는 죽는 것은 단념하고, "못났으면 못난 데로" '빨갱이 자식'이라는 오명을 안고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당시 육군사관학교, 건국대 강사로 장래가 촉망받던 학자였던 남편을 잃은 아내의 상심은 더욱 컸다. 생전 생계 활동을 하지 않았던 부인은 미아리에서 아들 병덕 씨와 함께 노점상을 하며 손수 3남매를 키웠다.

병덕 씨는 "진실화해위 발표를 듣고 어머니가 아주 좋아하셨다. 연세가 80세이신데, 소식을 듣고 많이 우셨다"며 "분하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노점 장사를 하시면서 어려운 세월을 겪으셨다"고 말했다.

병덕 씨와 가족들은 고인을 가슴 속에 묻고 살았다. 사건과 관련해 어떤 얘기도 하지 않으려고 했고, 세월의 강 속에 고인에 대한 기억들도 조금씩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는 "아버님이 고등학교 기억에 대학교수를 하셨다. 육사도 나가시고, 건국대학교도 나가시고 아버님을 학자로 알고 있었다"면서 "아버님하고는 주말에 시간이 나면 우이동 유원지도 가고 사이가 좋았다"고 추억했다.

가족들 사이에도 잊혀버렸던 권재혁 씨에 대한 기억은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를 착수하겠다고 부인을 설득하면서 다시금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병덕 씨는 "2007년에 과거사위 조사관이 와서 아버님 사건, 억울하게 돌아가신 죽음의 누명을 벗겨준다고 해서 긴가민가했었다"며 "조사관이 아주 애를 많이 쓰셔서 금년 4월 6일에 위원회에서 진실규명 사건으로 통과됐다고 연락이 왔었다"고 밝혔다.

이어 "저희는 아버님 사건 잊고 살고 싶었다. 피해의식 때문에 다시 생각하는 거 너무나 싫었다"며 "그런데 그분들이 어머님을 설득시켜서 어머님께 사건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듣고 조사를 해 주셨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또 아버지의 추모제를 맡아서 해 준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추모연대, 의장 박중기)에 대해서도 고마움을 표했다.

"4년 전에 우연히 모란공원에 갔었는데, 다른 분들이 와 가지고 추모식을 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 추모연대에서 고맙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인 11월 4일에 추모제를 해 왔던 것이다. 피해의식이 커서 가족들도 아버지 산소에 가기를 싫어했다. 민주열사라고 하면서 추모비도 세워주셨다. 너무나 고맙더라."

인터뷰 도중에도 감정이 북받치는 듯 말을 잊지 못하던 그는 끝으로 "사회적으로 아버지에 대해서 명예회복을 시켜 준 것에 대해 너무나 고맙다"면서 "저희는 법적으로 아직까지 죄인으로 되어 있다. 사법부에서 저희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 줄 수 있으면, 재판부가 아버지의 무죄를 밝혀주는 것이 저희 가족들의 마지막 소망"이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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